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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고대사 원문보기 글쓴이: 대고려
이 책을 열면서, 속으로는 '문화예술과 관련된 내용이라 지루할 텐데, 다 읽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오래 전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최태영' 선생님의 저서들을 읽다가 '존 카터 코벨'이라는 외국인 학자의 주장이 본문 중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고 일단 구매부터 해놓은 터였다. 그 후 2,3년 동안 책꽂이에 꽂아만 놓고 있다가 일종의 사명감(?) 때문에 빼들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책 장은 빠른 속도로 넘어갔다. 문화재와 관련된 예술사적 설명은 문외한인 독자에게 재미 없는 부분인 것이 사실이기도 했지만, 일본에 정통한 예술사가로서 높은 학문적 권위와 지식을 바탕으로 풀어낸 고대 우리 역사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다.
AD 369년 가야의 진구 황후와 부여족이 동해를 건너 당시의 야마토 왜(倭)를 정벌하여 일본 최초의 중앙집권적 국가를 세우고 통치한 사실에 대한 확신에 찬 주장은 위축 되있는 우리 고대사 인식에 새로운 박동을 더해 주기에 충분하다.
저자가 외국인으로서 제3자의 입장이며, 영어권 학자로는 최초로 일본미술사 분야의 박사로서 학문적 권위를 일본에서도 인정 받고 있었다는 점과 함께, 그의 일본인 이웃에게 절교를 당하면서 까지도 자신의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가 일본 예술사 연구의 종착점으로 한국을 연구할 수 밖에 없었던 점들은 학문적으로도 필연적 귀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타자기를 삽과 곡괭이 삼아 한국문화의 광산에서 보물을 캐내는 것"이라고 한 표현만 보더라도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하겠다.
또한, 저자가 부여족을 한민족의 주류로 보는 역사인식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우리는 부여족의 후손이라고 한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수많은 존 카터 코벨 박사의 글들을 정리하고 번역하여 훌륭한 책으로 엮어낸 김유경 편역자의 노고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귀중한 역사의 사실들을 접할 수 있는 것 역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책을 닫으면서 국내에 나와있는 저자의 다른 책 "부여기마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을 주문했다.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는 저자의 말이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belega>
[저자의 서문 중에서]
ㅇ. "중국과 일본의 예술사와 문화를 깊이 접하고 난 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나는 한국 예술과 문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미국인인 내게 한국예술은 한중일 3국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 역시 수십년간 알고 지내온 터인데도 한국보다 당기는 맛은 덜하다."
ㅇ. "자연과 매우 깊이 벗하며 날 때부터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인 나로서 일본의 '폐쇄된 사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보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심성을 지녔으며, 자연에 가까운 사람들임을 안다. 한국인들은 고래로 물려받은 기질인 바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이 땅에 흐르는 강과 산천경개와 일심동체가 되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중국예술은 너무 위압적이고 자연을 압도하는 인위성과 극단적으로 위계적이란 사실이 자유와 자연을 애호하는 미국 태생의 본인에게 거부감을 갖게 한다."
ㅇ. "한국인들은 자연을 거슬러 이를 제압하려 드는 방식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자연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여겨왔다."
ㅇ. "한국인들은 행동이 보다 자연스럽고 덜 속박된 감정에 자기 느낌을 보다 솔직하게 드러낸다. '바람직한 행동규범'을 위해 실제로는 마음속에 진심을 숨기고 있는 일본인들과는 다르다"
ㅇ. "한국예술사는 기원전 2333년의 단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는 기원전 10만 년 한반도의 초기 거주자들이 사슴뼈에 그려놓은 최초의 그림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는 일본을 석기시대에서 빠져나오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다."
[에필로그 - 편역자 김유경의 글 중에서]
ㅇ "........(중략)......... 이러한 활동은 한국문화를 가장 본질적으로 꿰뚫어본 학자이며 탁월한 문장가이자 한중일 3국을 모두 경험해본 미술사학자에 의한 영문판 한국문화사를 배출해냈다."
ㅇ. "나는 남녀를 통틀어 존 카터 코벨 박사처럼 모든 시대를 망라하는 박식함에 학문적 진실에만 모든 것을 거는 학자를 가까이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ㅇ. "한국문화는 20세기 말 존 코벨이라는 미술사학자를 만나 가장 정선된 안목과 사실 추구의 치열한 과정을 거쳐 씌어진 영문 해설서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그리 자주, 쉽게 일어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내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덧붙여 한국문화에 깊이를 더하는 것이 될 것이다."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라는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존 카터 코벨과 앨런 코벨이 함께 저술하였으며 여러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고조선(실제로 고조선뿐만이 아니다.)을 인정하고 인류의 기원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있다.
책의 내용으로....
세계최초로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인이 아니고 한국인 이라고 발표했다.
이 기사에서 “인류의 기원이 한국인인 증거로 요동성 근방 만주 지역에서 대량의 탄미(炭米=불에 탄 쌀)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탄미의 DNA 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니고 교배종이란 것이 판명됨으로써 농사기술이 상당한 수준을 이룩했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대량으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 탄미는 군량미로 생각되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큰 전쟁이 있었던 듯 하다는 의견이다. 또한 이 쌀은 1만7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당시 사람의 DNA를 검사한 결과 평균수명이 1,000년 정도로 판명되어 고조선(古朝鮮) 이전의 왕국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고 한다. 노예 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나라 한국(桓國)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의 종주국(宗主國)이라는 사실과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역사가 진실이라는 것이 확인 된 것이다.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인이라 할수 있는 증거는 요동성 근방 만주 지역에서 대량의 탄미 발견함으로 시작됨.
DNA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닌 교배종이란것이 판명됨으로서 농사 기술이 첨단 과학을 이룩했던 것으로 판명됨
군량미로 생각되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전쟁이 있었던 듯하다는 의견
1만 7천년전 것으로 추정됨.
사람의 DNA 검사 결과 평균 수명 1000세에 달함.
고조선 이전의 왕국을 인정함
노예 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환국 나라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
사람이 하늘이라 믿는 신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가 없는 사상임
주) [환(桓)]자는 〈설문해자〉에 보면 〈한〉이라 읽는다고 나와 있다. 그림에 보시는 대로 桓자는 호단절(胡端切) 곧 호의 〈ㅎ〉+단의 〈안〉=한이라 익는다고 설명하였는데 모두들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인류의 기원의 한국인설은 당연하다.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는 일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환국은 인류 최초의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일만7천 년 전의 쌀이 동아시아에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인류 최초의 것이 된다. 한국(桓國) 이전이라 함은 〈마고성(麻姑城)시대〉라고도 추정할 수 있는데, 이 역사는 오직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대역사인 것이다. 마고성 시대란 주전70379년~7197년경으로서 마고가 임금으로 있던 시대를 말한다. 이를 전한국(前桓國)시대라 한다. 파미르 고원의 중앙에 마고를 모시는 천부단이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 보단을 두었으며, 보와 보 사이에는 3개씩 도랑이 있어 12개의 성문을 두었다. 2궁 2소(二穹二巢) 사방에 2궁과 2소를 두어 오음(五音) 칠조(七調)의 율려(律呂)를 맡게 하였다.
2. “한국인은 일본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존 카터(John Carter Covell): 부부 지음: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출판사: Hollyn International Corp. (아래 그림은 책 표지)
일본은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유산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Dr. Jon Carter Covell 1912~96) 박사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지은이 존 카터 코벨 부부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들은 미국인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이하 본문 요지】
일본천황 혈통의 기원은 한국이며 일본의 시조는 통설대로 주전 660년이 아니라 주후 369년임을 밝히고 있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이었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원숭이 나라” 일본의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 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주) 일본인의 교활함을 말할 때 〈여우보다 간교한 원숭이 나라〉라고 각국이서 말한다. 남의 것 흉내내 만들고는 그게 본디 제것인데 남이 베껴갔다는 식이다. 심지어 한글도 지들이 만들었는데 세종대왕이 베껴갔다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이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新羅坊)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기(須惠器)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주) 스에기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시기로 보고 있다. 스에기(須惠器)토기는 '질 좋은 토기'라는 뜻이라고 하며,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이 토기에 '스에(すえ)'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스에'는 우리말의 '쇠'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쇠처럼 단단한 토기'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들어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넘은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아래 내용은 위 내용과 관련된 기사들입니다.
세계 최초의 것은 거의 한국에 있다
1) 우리나라 〈소로리 볍씨〉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볍씨로 국제공인
출처:대한매일 2001. 1. 18. 1면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국제학술회의에서 인정받았다. 농촌진흥청은 17일 필리핀 국제미작(米作)연구소가 지난 해 말 세계 28개국 500여명의 학자들을 초청해 개최한 ‘제4회 국제벼유전학술회의’에서 이같이 공인됐다고 밝혔다.
학술회의에서 〈소로리 볍씨〉는 DNA 분석결과 1만5,000년 전 것으로 확인돼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 3천년이나 앞선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kdaily.com
문화일보 [2003-10-22] 기사를 보자.
충북 청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 볍씨(약 1만 5천년전것)로서 이때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도 약 3천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고 영국 BBC 인터넷판이 22일 보도했다. BBC 인터넷판은 기사에서 충북대 이융조(선사고고학) 교수 연구팀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고대 탄화(炭化) 볍씨를 발굴했으며 59개의 볍씨를 대상으로 탄소연대측정법을 실시,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에서 발표한 ‘세계최고의 〈소로리볍씨〉의 발굴과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1만5000년 된 것 등 4개종의 볍씨 59톨을 발견했으며, 이는 지난 97년 중국 황허(黃河)강변 장시(江西)성에서 발견된 선인동 볍씨(1만500년)보다 약 4500년 정도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 결과는 미국의 권위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Geochron)과 서울대의 AMS연구팀으로부터 동일하게 얻은 것이어서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의 박태식 박사가 이 볍씨에 대해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벼라고 밝혀 1만5000년전에 한반도 중부에서 농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주) 이 발표는 20,000~15,000년으로 나온 시험결과에서 낮은 연대를 발표한 것이라 한다.
기사원문: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id=etc&sid1=102&mode=LPOD&oid=021&aid=0000048289
2) 배 만들기도 한국이 세계 최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 발견 - 8천년 전 배YTN 뉴스 동영상 보기 (8천년 전 배)
-http://news.naver.com/tv/read.php?mode=LSD&office_id=052&article_id=0000090729
창녕 신석기 유적서 8,000년前제작 추정. [한국일보 2005-09-05] 8,000년 목선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아래 그림 참조)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木船)이 발견됐다. 국립김해박물관은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에서 통나무를 이용해 만든 소형 선박을 발견했다고 5일 밝혔다. 김해박물관은 목선 발견 지점이 비봉리 유적 아래 신석기 초창기 층위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선박이 8,000년 전에 제작,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과학적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이 같은 추정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국내 발굴 선박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경주 안압지 배(8세기)보다. 6,800년 앞서게 된다. 또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 고선박보다 3,400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으로 알려진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끼리끼(伊木力) 유적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된다. 실물 기준으로 볼 때 〈비봉리 목선〉은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 정도의 규모이며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길이 4미터 이상 추정)
배는 불로 나무를 그슬린 뒤 날카로운 석기로 제작했으며 어로용, 이동용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박물관측은 “어로 활동 등 신석기인들의 생활상과, 목선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던 당시 사람들의 기술력 등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기사출처::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509/h2005090518362923280.htm
고대의 산해경(山海經)도 한반도 남부지방의 특성으로 [배(선박)]를 거론하고 있다. 기록과 유물이 일치한다 하겠다. 21세기. 현대의 한국은 세계제1의 조선국. 역시 원조(오리지널)의 힘은 강력하다 하겠다.
3) <한국이 고래잡이> 세계 최초
- 영국 BBC 방송
한국에서는 8천년전에 이미 목축과 고래잡이가 성행했었다. 영국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경향신문 2004-04-21 ]
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벌써 기원전 6,000년부터 고래 사냥을 시작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BBC 인터넷판이 21일 보도했다. BBC는 반구대의 암각화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浮具),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 를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림 참조).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들. 각종 고래 그림이 그려 있다. (UNESCO 문화재 등록)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이상목씨와 공동으로 연구에 참여한 대니얼 로비노 박사는 “암각화에는 돌고래 및 고래의 그림과 함께 배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면서 “이것은 고래잡이 광경”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인류학 잡지인 랑트로폴로지(L‘Anthropologie)에 실릴 예정이다.
〈이상연기자〉 기사 출처:
4) 세계최초의 마제석기((磨製石器, 갈아 만든 돌 그릇)도 한반도에서
백과사전에 보면 세계최초의 마제석기(갈아 만든 석기)가 주전 9000년경 즉 약 1만 1천년전에 중동(아랍)에서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약 2만년전의 마제석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가 출토되었었는데 그래도 긴가민가 설마설마 하다가 이번엔 아예 숫돌까지 발견된 것.
1만 수천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만 해도 중동(아랍) 신석기보다 빠르다. [동아일보 2004-5-13]
5) 전남 장흥군에서 약 2만 년 전 신석기 유물 출토
후기구석기 유적서 간돌 첫 출토.
우리나라의 전형적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磨製石器)이 여러 점 출토돼 마제석기(신석기)의 최초 사용 시기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李起吉)은 13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만8500년 전∼2만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이 출토 됐다고 발표했다.
발굴된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점,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자귀 2점,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이 나온 가장 오래된 유적은 1만 2천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다. 따라서 이보다 최대 1만년 앞선 신북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다. 국내에선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가 출토 됐지만 마제석기의 제작 도구까지 함께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대 박물관 이기길 관장은 “이번 발굴로 신석기시대 이전에도 마제석기가 사용됐음이 확실해졌다”고 밝혔다.
(펀주: 한국 신석기 시대가 지금까지의 예상보다 사실은 훨씬 더 일찍 시작했다는 말.)
출처: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405130294
【마치면서】 유네스코에서는 1889년부터 유네스코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퇴치(文盲退治)에 공이 큰 이들에게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다. UNESCO는 인류의 시작이 한국이며 한국어를 세계 공용어로 하고 쓰기 편한 과학적인 글 한글을 영어대신 쓰자고까지 주장했는데 이제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끝】
[ 전문가 칼럼 ]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 - 조상 부정하고 욕하는 패륜
[시사타임즈 = 이을형 박사] 고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와 강성한 국가였던 고구려가 망한 후 우리의 문화유산과 수많은 보물 및 서적들이 중국에 빼앗겼다. 또한 근세에 와서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으로 빼앗긴 문화재와 서책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국과 일본은 빼앗아간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를 제멋대로 꾸미며 자신들이 우리 한민족을 지배한 것처럼 역사를 변조·왜곡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따르면 백제가 망한 후 당나라가 강제로 빼앗아간 서책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서기 660년 당시 백제의 경우는 의자왕과 태자 및 왕자들, 대신(大臣), 장사(壯士) 88명과 1만2807명의 백제인들이 당나라에 끌려 갔다. 고구려는 보장왕(寶藏王)을 비롯한 3만8300호(戶) 22만명이 강제로 끌려 갔다. 이 때 당나라는 수많은 보물과 서적들도 빼앗아 갔다.
또 일본이 빼앗은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것만도 22만여권에 이르고, 비공식적으로 가져간 것을 합치면 27만권이 넘는다. 이때부터 우리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을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었지만 그 흔적이 지워졌다.
3세기의 중국사서 삼국지(삼국지)와 위지(魏志)에 보면 당시 ‘일본에 말(馬)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4세기에 와서 많은 말이 일본에 나타난다. 이것은 일본이 숨겨온 역사다. 고구려 이웃 북방 지역 부여의 한민족은 말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백제 서부지역을 점령했다. 아울러 북방 가야족이 부산 근처 가야지역으로 퍼지던 당시 과감했던 이들 일부는 서기 369년 바다건너 일본으로 가 왜(倭)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일본을 지배하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한국 고대사에 ‘동부여(東夫餘)가 바다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일본사(日本史)는 이를 기피한다. 일본의 어용학자는 이를 숨기고 부여족의 일본정벌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 학자에 대해 일본은 철저히 불이익을 주었다.
예컨대, 규수대학(九州大學) 다무라(田村)교수는 지난 1982년 출판한 저서에서 ‘8세기 이후 중국이 일본문화의 종주국으로 나서기 전까지 한국은 수백 년 동안 일본문화의 모체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다무라(田村)교수는 이 책을 출판한 직후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은 한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지금의 아베신조나 하시모토 도루가 왜 괴변을 말 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오늘은 너무 어이없기까지 한 일본의 망언을 되돌리기 위해 우리가 일본을 지배했던 고대사 부분을 기술하고자 한다.
자랑할 만한 역사도 사상도 철학도 없는 일본은 국민마저 속인다
우리 한민족이 일본을 지배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많은 역사 고증자료에서 얼마든지 입증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 같은 사실을 철저히 숨긴다. 그것은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자랑할 만한 역사가 없고 내세울 수 있는 사상과 철학이 없는데서 기인한다. 일본이 지금은 아시아의 선진국가지만 과거에는 볼품이 없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결코 아시아 민족을 이끌 수 없는 거짓과 허위가 난무하는 혼란스러움만을 주고 있다. 그들은 지난날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을 내걸고 아세아침략을 감행했으면서도 침략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민족에게 무한 고통과 비극을 안겨준 강도·살상·강간 등의 침략행위까지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는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나쁘게 물들어 있는지 짐작케 하는 일이다. 일본의 과거 역사가 어떠했는지 그 본성을 짐작케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 망령이 또다시 일어나 지난달의 낡은 목표가 회상되는지 일본에서는 신군국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일본의 수상이며 오사카 시장의 미친 소리를 듣고는 참을 수 없어 지난 글에서 다 끝내지 못한 일본의 실체를 다시 벗겨 세우려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가 아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 한민족이 고대부터 일본을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부분이다. 일본은 왕조사를 조작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진구(神功)왕후, 진무(神武) 및 여러 왕대(王代)의 기록에도 이 사실이 수없이 반영되어 있으나 이런 사실들을 철저히 숨겼다. 최태영 선생은 ‘부여 기마족과 왜(倭)’(코벨박사 저, 김유경 편역 287면)에서 “일본인의 9할은 자기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고 했다.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부성은 열등한 일본의 역사와 전통성에 자신이 없기에 한국이 4세기부터 일본을 지배했다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일본은 국민들이 열등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교육을 통해 철저히 고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일본의 본체가 한국이라는 것을 숨기며 날이 갈수록 역사왜곡을 더 과감히 하고 있다.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이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들인 줄을 모르게 됐다. 우리 민족이 일본을 세운 사실과 이 같은 우리 역사를 자기들 역사처럼 조작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오직 왜곡된 역사가 진짜 역사인양 맹신한다.
일본은 폐리 미제독이 시모다(下田)에 오기 전까지 12번의 조선통신사를 통해 새 문물을 받아온 터라 국민에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우리역사를 왜곡·변조시켜야만 국가적 자신감을 얻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처럼 맹목적 충성을 이끌어 냈다. 이는 역사를 들춰보면 모두 확인 할 수 있는 사실들이며, 지금 일본의 극우정객들의 행태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외국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은폐돼 있기도 하다. 따라서 거짓역사에 더 거짓을 가하고 있는 일본이다. 오사카 시장 하시모도 도루는 자기 조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조차 모르는 역사무지가다. 그는 망언으로 진실된 역사를 또한 가리고 있다.
일본의 1대에서 14대 왕은 모두 허구이기에 망언으로 감추려 한다
일본 역사의 위조는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일본왕가가 아닌데서 부터 터무니없는 위조사(僞造史)임이 판명되고 있다. 일본은 교과서에서 일본의 지배자 혈통이 BC660년부터 진무왕(神武王) 이후 한 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져 온 만세일계(萬歲一系)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지만 이는 모두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다. BC660년 일본에는 국가가 없었다. 일본의 왕 1대에서 제14대까지는 모두 허구의 조작된 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이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즉, 1대 진무(神武), 2대 수이제이(綏靖), 3대 안네이(安寧), 4대 이토쿠(懿德), 5대 코우쇼우(孝昭), 6대 코우안(孝安), 7대 코우레이(孝靈), 8대 코우겐(孝元), 9대 카이카(開化), 10대 스진(崇神), 11대 스이닌(垂仁), 12대 케이코우(景行), 13대 세이무(成務), 14대 츄우아이(仲哀) 등이다. 이는 모두 조작의 왕들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712년과 720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두 역사서에서 나와 있다. 두 책 모두 8세기 당대의 일왕을 합법화 시키느라고 조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편찬 당시 일본 왕가는 겨우 100년 정도였을 뿐 그때까지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역사서가 편찬되는 7세기는 왕권다툼의 전란 속에서 불타버렸다. 일본왕은 백제에서 망명 온 안만려(安萬呂) 등 학자들에게 ‘일본서기’를 편찬토록 했다. 이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원한과 함께 새로 섬기게 된 일왕에게 충성을 서약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손에서 나온 일본 역사서는 엄청난 모순과 날조로 가득 찬 것이 됐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년이나 더 길게 역사를 늘려 쓰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도 넘게 통치했다고 왜곡했다. 그러나 이처럼 엿가락 늘리듯 늘린 일본의 역사는 일본학자들도 ‘2600년의 역사는 거짓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일본의 역사왜곡에서 말한 바 있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의 미쓰노(水野 祐)교수는 “일본 역사는 978년이 조작됐다”고 말하고 있으며 가지마 노부르(鹿島 昇)는 “일본의 황통사(皇統史)는 거짓역사이지만 일본이 놀랄 만큼 짧은 기간 내에 과학과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청·일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세계지배를 꿈꿀 정도로 자부심과 용기를 갖고 발전한 것은 한국과 중국에는 미안한 일이나 이러한 역사의 위조의 공적이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 가장 높이 모시는 이세징구(伊勢神宮) 신위도 모두 한국인
일본이 미쳐 왜곡을 하지 못한 제사에 관한 것을 기록한 방대한 책 연희식(延喜式=10세기 일본법령집)이 있다. 이 책에는 궁내성좌(宮內省坐) 신삼좌(神三坐) 즉, 일본 조상신 3분이 모셔져 있다. 일본 황거(皇居) 대궐서 제사지내는 신위(神位)도 똑 같다. 거기에는 원신(園神=가락국 신라조상)과 한신이좌(韓神二坐=백제조상신 이좌·二坐)가 있다. 이 원신과 한신은 모두 우리 한국인이며 일본서 가장 높이 모시는 이세징구(伊勢神宮)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 36좌(坐)의 일본 조상신 가운데 앞자리에 위치한다. 밑에 36좌의 신위도 모두 한국인이다.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상가야 왕조사(上伽倻 王朝史)를 연구하는 학자는 “군부나 신직(神職)이 개입한 역사나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는 정직한 역사가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 아베신조나 하시모도 도루며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동경도지사 등 일본 정치인들이 하는 망언과 억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이 왜 저토록 미친 억지 망언을 남발하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망언을 하는 자들은 일본의 역사 기술(記述)에서 승리는 과장하고 패배는 고쳐서 개서하고 망명은 서술(敍述)하지 않는는 수법을 쓴다. 이들은 역사를 작성하는 기본 원칙을 고수한답시고 망언을 하고 있으나 결국 내세울 게 없기 때문이다.
외국학자들도 일본의 역사 위조를 말하고 있다
미국태생으로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해온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 1910~1996) 박사는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는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약 20년을 한국에 머물면서 ‘한·일 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 등에 14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다. 또한 그는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영문저작을 내고 일본 문화와 미술에 관한 16권이상의 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 아들 앨런 코벨도 도중에 어머니와 합류해 모자가 한국고대사 가운데서도 가야유물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채고 4세기에 바다를 건너가 왜를 제압한 가야와 부여족이 한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리는데 적극 나섰다. 이들은 외국인으로 VISA를 받기 위해 6개월마다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의 간악한 역사왜곡에 대해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등을 발간하며 우리역사를 제대로 찾는데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학자들은 369년 부여 기마족이 왜를 정벌한 것을 비롯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가 정립한 우리나라 삼국시대는 삼국이 아닌 가야까지 쳐서 4국으로 불러야 옳다고 하면서 우리의 역사분류까지 잘못 기술돼 있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역사를 제대로 연구해온 학자치고 한국을 포함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 열도의 진짜 사서라고 믿는 사학자나 고고학자는 없다. 만약에 있다면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에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심으려 조작한 ‘조선사편수회’의 왜곡한 역사를 신주 모시듯 하는 악마에게 혼을 팔아먹은 일본의 사학자와 우리나라 일부 학노(學奴)들만이 있을 뿐이다.
일본은 예부터 고구려, 백제가 망한 후부터 당나라의 지시에 따르고 신라에 아부했다. 나아가 일본에 나라를 건설한 상가야 역사를 말살하고 허구의 일본사를 만들어 냈다. 일본은 지금도 고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그리고 날이 갈수록 우리역사를 도둑질하며 거짓역사를 날조하는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제 우리도 이에 맞서 역사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역사를 지키고, 나아가 잃어버린 역사 되찾기에 총력을 기울여 우리 선조들의 찬란한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더 이상 주저해서는 안 된다. Arthur Helps가 말한바와 같이 ‘역사란 국민의 노력을 위한 해도(海圖)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이을형 박사(전 숭실대법대교수, 본지 고문)
시사타임즈 2013.06.03 10:44 입력
[ 전문가 칼럼 ]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
[시사타임즈 = 이을형 박사]
코벨 박사의 연구에서 보는 일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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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박사(전 숭실대 법대교수) ⒞시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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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고대사를 연구해 온 존 카터 코벨 박사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올바른 연구를 했다. 그의 저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에는 한국 상고사와 관련된 학설이 제기돼 있다.
코벨 박사는 369년 가야의 기마민족이 바다건너 왜(일본)를 정벌했다고 했으며, 일본이 역사왜곡을 한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했다. 그는 또 우리 선조들에 대해 아주 일찍 깬 민족으로 규정했다. 코벨 박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석기시대부터 다른 곳에서 유입해와 요동과 한반도에 제일먼저 정착한 토박이 주인이었음을 단군항목에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요동에 일찍부터 선주했으며 고유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이다.
중국문화는 우리보다 뒤에 은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이미 논한바와 같다. 존 코벨과 알란 코벨 모자는 요동과 한반도 일대 청동기 시대에 이미 우수한 종족인 한민족이 선주해 있었고 중국과는 다른 별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단군의 실재 존재를 간파해 냈다.
코벨 박사 모자는 4세기 한국의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벌한 것을 증명하는 예로 말(馬)과 관련한 유물유적과 일본 이소노가미(石上)신궁의 칠지도(七支刀)를 언급하고 있다.
코벨박사 모자의 이 같은 주장은 제3국 학자가 보는 한·일 고대사론이기에 한국사를 위해 더없이 중요하다. 일본 문화는 불교와 그 저변에 무교(巫敎)가 자리 잡고 있는 것까지 한국에서 간 문화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런 역사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역사왜곡에 더 비중을 둔다. 때문에 일본의 신토가 한국의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드물다.
한국무속은 일본에 가서 미화되고 일왕 숭배사상과 결합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유교 지배층과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비천한 것으로 격하됐다.
코벨 박사는 “일본에 있는 고분 발굴과 연구가 자유롭게 허용된다면 고고학은 과거 일왕의 존재를 제대로 밝혀 낼 도구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일제시대인 1920년대 초 일본은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경주일대 고분을 발굴토록 해 여러 점의 아름다운 금관, 귀 거리, 허리장식 띠 등 수많은 부장품을 확보했다. 이들은 또 규슈(九州)의 한 고분에서 말과 배 그림으로 뒤덮인 벽화를 찾아냈다. 여기에서는 금동 관만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고학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5~6세기 한국은 왜(일본)보다 월등히 앞선 ‘선진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당황한 나머지 고고학 발굴을 금기시하게 됐다.
일본 관서지방 나라평원에 있는 일왕 고분들은 발굴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만약 발굴된다면 부장품들은 한국이 선진국인 사실을 입증하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조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고학은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1872년 아이지겡(愛知縣) 사가이(堺)에 있는 세계 3대 무덤중 하나라는 인덕왕릉(仁德王陵)이 산사태로 그 유물이 나온 적이 있다.
그 유물은 미국 보스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덕왕은 백제 근초고왕의 왕손이다. 인덕왕은 일본의 첫 왕이 된 오진 왕(應神王)의 아들로 왜왕 2세다.
일본은 인덕왕 위에 14대나 왕이 있는 것 같이 역사를 조작해 가르치고 있으나 앞서 원고에서 기술한 대로 1~14세 까지는 허수아비 왕으로 있지도 않은 가공의 왕들이다.
5세기 초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들이 일본에 왜국을 세웠다. 기마민족이 건국한 왕1세가 바로 오진 왕(應神王)이다. 오진왕은 일본의 첫 번째 왕인 것이다. 이는 실존한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은 자기들의 열등한 것을 숨기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고 지금 일본 정치인들도 이 조작한 역사가 사실인 것 같이 믿으나 모두 거짓인 것이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우리는 고대부터 일본에 건너가 왜를 세우고 그들을 지배했다. 가야(伽倻) 또는 가라(加羅)는 신라보다 100년이나 늦게 세운나라이나 가야(伽倻)는 당시 쇠와 농산물이 풍부해 교역을 하던 왜국에 진출, 그 곳에 임나(任那)라는 작은 분국(分國)을 만들고 연맹해 신라·백제에 대항했다.
임나(任那)는 왜국에 세운, 왜 땅에 건설한 우리 식민지다. 일본은 이에 대해 거꾸로 왜가 한국에 임나(任那=미나마)를 세우고 다스렸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역사는 종종 지배자에게 야합하는 날조된 기록을 남긴다. 김부식(金富軾) 등 야합하는 학노(學奴)는 어느 때든 있다. 그러나 고고학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유물만을 남기고 여기서 진정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8세기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쓴 일본 사가들은 일찍이 한국에서 건너간 우리 부여기마족의 130여 년간 흔적을 없애려고 있지도 않은 역사를 날조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규슈로부터 야마토(大和) 나라로 들어온 정복자 진무왕(神武王)의 역정을 서기전 660년의 일로 각색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야만의 상황이었기에 나라도 문화도 없었다. 그러다가 BC300년대에 와서 우리 한민족의 도래로 논농사와 청동기 금속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한국은 4세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한국으로부터 철기와 청동기, 도자기 등을 받고 물레 사용법을 익힌 서기 3세기를 일본사회는 석기시대를 막 벗어난 야요이시대(彌生時代)라고 부른다. 이 당시 육로 교통은 보잘 것 없었고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 이때 한반도의 가야인 김해는 철광이 있어 한반도 북부와 중국, 일본으로 철을 선적해 수출하는 요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문화에 영향 준 한민족 후손 오진(應神)이 일왕 1대
10세기 일본법령집 중 연희식(延喜式) 책에 실려 있는 그대로 일본궁내성좌(宮內省坐) 신삼좌(神三坐)에는 일본 조상신 3분이 모셔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은 일본을 세우고 일본을 통치한 한민족이다. 이는 일본 황거(皇居) 대궐서 제사지내는 신위(神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원신(園神=가락국 신라조상)과 한신이좌(韓神二坐=백제조상신 이좌((二坐)가 있는데, 이중 원신인 가야 조상은 왜가 건설되기 전부터 일본 열도에 건너가 많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한신인 백제 조상도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준 결과 백제는 후에 일본에 태양과 같은 나라로 여겨질 만큼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왜)의 문화 수준은 구석기시대인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 머물러 있어서 중앙집권화 된 통치행정능력이 없었음은 물론 조선에서 건너간 무녀 히미코(卑弥呼)가 부족 100여의 부족을 통일해 일본 최초의 나라인 이도국(伊都國)=사마대국(邪馬臺國)을 규슈(九州)에 세웠다. 하지만 부족국가 수준이어서 국가로 보기에는 미약하다.
서기 240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신이 왜국에 왔을 때 그 곳에서 정보를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규모의 부족장들이 히미코(卑弥呼) 여왕과 더불어 나라지역의 비옥한 땅을 통치한다고 이들은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는 무속신앙이 팽배해 수많은 신령들이 있어서 무속적 지배자가 예언을 하며 통치했는데, 강한 신령(神靈)을 받은 자는 거의가 여자였다. 이들은 크고 작은 수로 혹세무민을 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처럼 미개한 당시 일본은 우리와 상대가 안 되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서 정벌의 본말을 통틀어 뒤집어 놓는 역사왜곡을 했다.
일본이 한국을 정벌한 것처럼 기록해 후일 일본인들이 자기네 역사에 대해서 만족하게 여기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유민된 한을 역사왜곡을 통해 보상받으려 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월등히 우월한 사실을 비롯해서 일본 문명이 전적으로 한국에 의존해 발달돼 온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 일본이 한국을 무력 통치하던 때는 더 심화됐다.
최태영 선생과 코벨 박사는 일본이 처음으로 중앙 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여족의 통치에 의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부여족으로 가야를 거쳐 일본에 건너온 유민, 즉 일본에서 390년 태어난 오진(應神)이 왜를 세운 실존인물로 왜왕 1대가 된다.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는 부여족이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연대를 369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에 따르면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506년 까지이며, 이는 15대 오진왕(應神王)대부터 26대 게이타이(繼体)왕 이전에 이르는 것이다.
일본인도 일본역사 불신한다
이 당시 일본은 바다 건너 먼 섬이라 대륙문화와 접촉치 못 함으로 문화가 원시시대 그대로였다. 때문에 일본에는 지금도 신이 800만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신화를 믿는 신국(神國)으로 타락돼 있다. 이들은 해중 섬으로 인해 타민족의 침략을 받지 않아 자존 오만한 속성이 육성됐다. 이러한 신화와 오만한 속성이 합작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역사를 위조하고 진무덴노(神武天皇)라는 가공의 천황을 조작,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왕조역사를 14대까지 조작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가짜역사가 진짜역사인양 위조하고 근대에 와서 명치유신 시대에는 독일을 흉내 내기도 했다. 자신들의 볼품없는 역사를 위대한 역사로 위조해 국민의 용기를 북돋는 흉내다. 지금 일본의 역사는 터무니없는 위조사다.
우리 역사를 왜곡하며 제멋대로의 만든 역사인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주(註)에 백제기는 백제 인이 저술한 역사지만 후대에 보존치 못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제기를 인용했지만 조작해 인용했다. 이는 본래의 백제기를 말살하고 백제가 일본에 예속돼 일본을 종주국으로 만들었다고 조작한 것이었다.
중국인도 동방강국이라 칭한 백제
일본의 사학자들도 이를 부정하고 있다. 정상광정(井上光貞)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자가 백제기의 원형을 왜곡해 기록한 것도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일본국가의 기원. P96) 일본인 자신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를 더 든다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일본 천황 33대 스이코 덴노(推古天皇) 26년 추팔월조(秋八月條)에 고구려가 공방물(貢方物)하고 수양제(隋煬帝)의 30만군을 격파한 사실을 언급했다고 한다.
공방물(貢方物)은 하국(下國)이 상국(上國)에 토산물을 헌납하고 조공(朝貢)한다는 뜻이다. 동양의 대국인 수를 격파한 세계초강국인 고구려가 해중소국(海中小國)인 일본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조공(朝貢)했다 함은 사자가 여우를 두려워 해 상전(上典)으로 받들었다 함과 같은 한심한 위조다.
이같이 일본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역사다. 학자들도 이를 시인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이을형 박사(전 숭실대법대교수, 본지 고문)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시사타임즈 2013.06.10 14:03 입력 | 2013.06.10 14:02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