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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여행4 - 우에다성을 보고 기차를 타고 나가노에 도착해 사찰 젠코지에 가다!
2019년 4월 13일 쿠사츠온센 草津溫泉(초진온천) 에서 가루이자와 かるいざわ 軽井沢
(경정택) 에 도착해 구가루이자와 (旧軽井沢) 를 구경하고 신칸센으로 나가노현
우에다(上田) 시에 도착해서는... 광장에서 사나다(真田 진전) 3대 가문의 상징인
육문전 (六文銭) 과 사나다가문 최대의 맹장인 유키무라(真田幸村) 의 동상 을 봅니다!
걸어서 1.1km 거리에 우에다성 으로 가다가 옛날 우에다번주 저택 (上田藩主居館跡)
을 보고는 계속 걸어서 옛날에 해자로 사용된 강 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는...
우에다조 上田城(상전성) 에 들어서니 벚꽃이 만발한데... 사나다 가문 의 시조
사나다 유키타카 와 3남 마사유키 그리고 장남 노부뉴키 와 차남 유키무라 를 봅니다.
사나다(真田 진전) 가문 은 여기 우에다성 을 쌓고는 도쿠가와씨의 두차례의 공격 을
격퇴했으니... 1차는 1585년 사나다 마사유키와 장남 노부유키는 1,200명으로
도리이 모도타다등이 지휘한 7천명 도쿠가와군을 격파 했으며, 2차 전투는 1600년
마사유키와 차남 유키무라는 3,500명으로 3만 8천명 도쿠카와 히데타다군 을 물리쳤습니다.
우에다성 에서 사나다 가문 3대 를 구경하고는 다시 우에다역 上田駅 으로 돌아와서는
15시 41분에 신칸센 아사마 新幹線 あさま 호를 타고는 북쪽으로 달려서
불과 12분만인 15시 53분에 나가노 長野(장야) 현의 주도인 나가노시 에 도착합니다.
나가노 長野(장야)역 코인로까에 배낭 을 넣고는 인포메이션센타 로 가서는 시내지도 를
얻은후 교통편을 물어 보는데, 역 맞은편에 알피코 교통(アルピコ交通) 총합안내소
에서 1400엔 짜리 젠코지・마츠시로 1day 패스 (善光寺・松代1dayパス) 를 구입
해서 10. 11. 16. 17 번 버스를 타고는 북쪽으로 젠코지 (善光寺 선광사) 로 갈 수 있습니다.
나가노시 長野市(장야시)는 젠코지(善光寺 선광사) 절의 문전(門前) 도시 로 발달했으나
메이지유신 시기인 1871년에 나가노현의 현청소재지 가 되었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세기 말 부터 잠사업 이 활발하였고 철도가 일찍 부터 개통되었습니다.
1998년 나가노 에서 열린 제18회 동계올림픽 경기대회를 계기로 신칸센(新幹線) 이 개통
되었으며 일찍부터 인쇄공업이 발달하여 출판사가 많은 것이 특색이고, 서쪽은
히다(飛忝)· 기소(木曾)· 아카이시(赤石) 등 '일본의 알프스' 라는 세 산맥이 남북
으로 뻗어 있으며 신슈(信州) "사과의 특산지" 로 일대에 사과 과수원 이 많습니다.
이 지역이 "사과의 산지" 라는 생각에 문득 미술평론가 이은화 씨가 D 일보
‘이은화의 미술시간‘ 에 쓴 “세잔의 사과”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세상을 변화시킨 유명한 사과들이 있다. 아담의 사과, 윌리엄 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애플 까지. 여기에 하나 더해 세잔의 사과 가 있다. "
"폴 세잔은 정물, 풍경, 인물 등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사과를 그린 정물화 로 가장
유명하다. 무려 40년 동안 사과를 그렸다. 왜 사과 였을까? 세잔은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파리로 왔지만 살롱전에서 작품이 계속 거부당하자.....
자신을 실패한 화가 로 여겼다. 스스로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세잔 은 자신의 부족함 을 오래 관찰하는 노력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가 사과
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건 구하기 쉽고, 잘 썩지 않아 오래 관찰할 수
있고,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도 말 한마디 없는 완벽한 모델 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상화 를 그릴 때도 모델들에게... 사과 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를 요구했다."
"세잔은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며 사과 그림에 평생 매달렸다. 말년 대표작인 이
그림을 보면 한 화면 안에 다양한 시점이 존재 한다. 가운데 높이 솟은 과일 그릇과 쏟아
질 것 같은 왼쪽 접시의 사과들, 오른쪽 물병 주변의 과일들은 모두 바라본 시점이 다르다."
"복잡한 문양의 소파, 주름진 흰 천, 하얀 접시와 꽃무늬 물병 등은 화가가 의도적으로 배치
한 것이다. 한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원근법 에 따라 그리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이렇게 복수 시점으로 그린 그림 은 이해는 커녕 조롱의 대상 이었다. 하지만 세잔의
독특한 그림 양식은 입체파나 초현실주의 등 이후 전개되는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랜 관찰을 통해 자신만의 눈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재해석 했던 세잔은 누구보다 예리한
눈을 가진 화가였다.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입체파의
선구자 파블로 피카소 가 한 말이다. 40년을 매달린 사과 그림으로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연 세잔. 스스로는 실패한 화가로 여겼지만, 미술사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나가노역 長野駅 에서 10. 11. 16. 17 번 버스를 타거나 아님 나가노전철 長野 電铁
을 타고 3정거장을 가서 젠코지시타 (善光寺下 선광사하) 역에 내려 걸어서
중견세통리 를 지나 방생지 연꽃 을 보고는...... 선광사 산문 을 들어서면
선광사 본당 이 나오는데 그 외에 탑인 파고다 와 일본충영전 전각 이 볼만 합니다.
나가노시 중앙에 자리한 일본 3대사찰 젠코지 (善光寺 선광사) 절은 일본 최고의 불상인
잇코 삼존 아미타여래 를 본존으로 모시는 아주 오래된 절로.... 옛날부터 서민
신앙의 절 이었는지라 불교 종파를 불문하고 전국으로 부터 참재자 들로 사시사철 붐빕니다.
일본 3대 사찰이라고 하면 교토 히에이잔 엔랴쿠지 (比叡山 延曆寺) 와 비와호수
오쓰시의 칸논지 (大津 觀音寺) 그리고 여기 나가노시에 하코시미즈 젠코지
(箱淸水 善光寺 선광사) 를 일컫는데.... 젠코지(선광사) 는 642년에 창건된
사찰이나 117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에도 시대인 1703년에 재건 했다고 합니다.
1,400년의 역사 를 자랑하는 젠코지 는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참배객 이 찾아오는,
일본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절 이니 본당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 이
안치되어 있으며... 종파를 불문하고 누구나가 참배할 수 있는 사원 이라고 합니다.
17세기 초에 지어진 본당은 일본의 국보 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하로 내려 가는
10m 폭의 통로에는 아미타여래 삼존불상 이 보관된 밀실 성지 가 있으니
지하 밀실로 연결되는 문은 열쇠로 잠겨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순례자들이
이 밀실 문고리를 만지고 나서 지하 통로 밖으로 나오면 극락왕생 한다고 합니다.
백제 성왕 이 보내온 아미타여래 삼존불상 은 지금까지 누구도 직접 본 적이 없는 비불
(秘佛) 로 이를 모방해 제작한 것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마에다치혼존 (前立本尊)
인데... 7년마다 한번씩 일반에 공개 하면 수백만명이 몰리며 본당으로 이어지는
참배길에 7,777장의 돌층계 는 아들을 잃은 거상이 젠코지에 공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광사 (善光寺 젠코지)의 "선광(善光)" 은 곧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 왕자의 이름
이니, 선광(善光) 은 631년에 형인 부여풍(扶餘豊) 과 왜국에 보내졌는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하고 부여성과 웅진성에 거주하던 의자왕등 왕족과 귀족 1만 3천명 이
당나라에 잡혀가자.... 형인 풍은 사이메이여왕과 나카노에 왕자에게서 5천 왜군 을 받아
백제로 나와 왕위에 오르고 2만 7천 왜군이 더 왔으나 663년 당나라 수군의 화공으로 패합니다.
“백제의 주류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했다. 이에 국인(國人)들이 말했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묘 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으로 가서 일본 장수들과
만나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 그리고 침복기성 (枕服岐城· 전남 강진) 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663년 9월 7일)
“일본의 수군 과 함께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와 국민들이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4일)
“이튿날 비로소 배가 출항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5일)
"일본서기" 가 전하는 백제 마지막 모습 인데 백제의 부흥 운동은 이듬해 지수신이 사수한
임존성이 무너질 때 까지 지속되지만, 3만 2천의 대병을 보냈던 왜국 은 지원을 포기합니다.
“백제왕 선광왕(善光王) 등을 난파 (難波· 나니하, 오오사카) 에 살게 했다. 별이 수도의
북쪽에 떨어졌다.” (『일본서기』 663년) 백제 왕위에 올랐던 부여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동생 부여용(선광 善光) 은 패주하는 왜군을 따라 다시 왜국으로 건너가는데
일본은 백제 유민 2000명에게 땅도 주는등 선진 기술 이용하려 호의적인 대접 을 합니다.
반면에 고구려인 들은 나라가 망하니 "80% 이상이 중국땅으로 잡혀가 노예" 가 되어 소멸합니다.
신라가 취한건 고구려 10분지 1인 황해도 뿐이니 우리 성씨에 고구려 후손은 진주강씨 정도라?
일본은 백제 왕자 부여용(扶餘勇 선광) 에게‘백제왕’이라는 성씨 를 주니... 그를
백제계 도래인의 지도자 로 인정한 것인데, 당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
의 도독으로 임명한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 에 맞세우려는 의도 가 엿보이는
대목으로..... 바로 그 무렵에 융이 백제부흥군의 잔존세력을 최종 진압한 까닭인가 합니다.
“3월에 백제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해 반란 을 일으키자, 웅진도독 이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4년 664), 망국의 왕자 풍과 용은 고구려와 왜에서 연락을 주고받으니 10월
대방주자사 유인궤 가 형제의 소통을 우려 하는 상표문을 당 고종 에게 바치니 융의 마음은 좌불안석
이었을 것인데 이듬해 8월 융이 당의 칙사 앞에서 신라의 각간 김인문과 맺은 맹약문 을 보면 더합니다.
“지난날 백제 임금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해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해 함께 잔인함과
포악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해 마을과 성을 도륙하니 평안한 해가 없었다." "부여융을 웅진도독
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 를 지내고 그 옛터를 보전 하게 하니 신라에 의지해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화친 하며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길이 번방(蕃邦) 이 될 일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5년)
이 글은 웅진도독부 7주중 한 주인 대방주(전남 나주)의 자사 유인궤가 쓴 것이니 상관인
웅진도독 부여융 에게 내밀 맹약문이 아니지만.... 망국의 왕자가 어찌 불만을
토로할수 있었을까. 유인궤 는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념 했고 융 역시 맹약을
맺은 뒤 당의 칙사가 돌아가자 신라가 두려워 당으로 달아난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흔히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 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켰다는
것은 현재의 시각 이니....“민족”이란 개념은 19세기에 유럽에서 만들어져서
아시아로 수입된 개념 으로, 당시 신라에서 볼때는 백제나 고구려 왜국에 당나라
모두 다 같은 외국이자 적국 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백제로서도 신라 보다는 일본이 더 가까운 혈맹 이었으며 신라와는 1세기가 넘도록
적대 관계 를 유지해온데다 가야 멸망후 수많은 한반도 도래인, 특히 백제
출신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있는 왜국 땅이 더욱 친근했을 수 있으며, 백제
귀족들이 귀족신분 을 유지하는데도 신라 땅 보다는 일본 열도가 더욱 유리 했습니다!
“이 달에 백제국 관직의 품계를 검토했다. 좌평 복신의 공적에 의해 귀실집사에게 소금하
(小錦下)를 주었다. (이전 관위 달솔) 또 백제 남녀 4백여인을 근강국 (近江國 비와호수
오미국) 의 신전군 (神前郡· 카무사키노코호리) 에 살게 했다.” (『일본서기』 665년 2월)
복신 은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나 풍 왕자와 갈등 을 빚어 살해당한 인물인데 그는
백제 멸망후 왜국에 사신을 보내는등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 했으니 귀실집사는
그의 아들 이라 보는데... 달솔은 백제 16관등중 2위 자리고, 소금하는 왜의 26개
관위 중 12위였으니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그 아들을 대접하는 데는 낮지 않아 보입니다.
“춘추지(春秋智· 김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해 멸망 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 했다. 왕비가 요사스럽고 무도해 국정을 좌우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했기 때문에 화를 자초했다.” (『일본서기』 660년 7월)
“이 달에 신전군(近江國 神前郡)의 백제인에게 밭을 지급했다.”(『일본서기』 665년 3월)
근강(近江)은 비와호수 시가현인데 왜국 조정은 이듬해 근강으로 천도할 계획 을 갖고
있었으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데 백제인들의 선진 기술 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 해 겨울에 도읍(飛鳥 비조, 아스카) 의 쥐들이 근강으로 옮겨갔다. 백제
남녀 2000여명을 동국에 살게 했다. 승속을 불문하고 계해(癸亥) 의 해
부터 3세에 이르기 까지 관에서 식품을 공급했다.” (『일본서기』 666년 겨울)
“쥐들이 옮겨갔다”는 것은 『일본서기』 에서 지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 천도
를 얘기할때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앞서 654년 12월 8일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날에 황태자는 황모모존을 모시고 왜의 하변행궁으로
옮겨 거주했다. 노인이 ‘쥐가 옮겨간 것은 도읍을 옮기는 전조였다’고 말했다.”
황태자는 선왕인 효덕(孝德) 왕을 나니와(오사카) 에 남겨두고 관료들을 이끌고 그전의
도읍인 비조(나라현 아스카) 로 천도한 천지 (天智, 백제에 3만 2찬 대병을 파병한
나카노에 왕자) 일왕을 말하니... 홀로 남은 효덕은 이듬해 쓸쓸히 사망하는데 그
천지가 신라와 당나라의 보복 침공을 염려해 다시 근강(近江)으로 천도 를 했던 것입니다.
근강(近江 오미) 인근의 나가노현(시나노) 은 일찍이 백제 도래인들이 자리잡고 살던
곳으로 이곳에 일본 3대 사찰인 선광사(善光寺) 라는 절이 있는데, 다름 아닌
부여용 왕자의 이름인 선광(善光) 이니 실제로 이 절은 과거 백제사 로 불렸으며
여기에는 본당 지하에 꽁꽁 숨겨졌다가 7년 마다 한번씩 공개되는 보물 이 있습니다.
백제 성왕 이 흠명(欽明)왕(천황) 에게 보낸 아미타 삼존불 로 이 불상이 공개되는
개장 축제 때에는 수백만명이 선광사를 찾아 절 안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니...... 경내에 본존불과 줄로 이어진 기둥 이 세워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기둥을 만져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부여용 선광(善光) 의 증손자인 경복(慶福) 은 동북지방 무쓰노쿠니(아모모리) 에서
"금" 을 채취해 조정에 진상 하니..... 743년 11월 5일 쇼무왕(천황)이
나라 동대사 절에 세계제일 엄청난 크기의 청동 대불 을 지을 때, 황금 900냥
을 대불 도색용 으로 바친 자는 바로 백제계 선광 왕자의 후손인 경복(慶福) 입니다.
그는 의자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동생) 이자 백제 부흥군에 의해 왕에 추대되었던 풍왕
의 동생인 선광(善光) 의 증손자 로 오사카 북동쪽에 히라가타 枚方(매방)시 를
건설한 백제인 인데, 당시 일본에서는 금이 생산되지 않았는데 백제인 채굴 기술자
들은 멀리 동북 무쓰 陸奧(육오) 지방 아오모리 에서 드디어 사금 을 채취 했던 것입니다.
1145년에 편찬된 한국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 425년이 빠른 720년에 간행된 일본서기 에는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에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미국 간자키군 에
거주하도록 했으며 또 백제인 2,000여명에게 3년간 관식(官食) 을 급여했다고 나옵니다.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장안까지 조리돌림 당한후 농노 로 된데 비하면 행운 이라?
선광(禪廣) 은 지토왕(천황)으로 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 百濟王”라는 성씨(姓氏)
를 하사받고 망명한 백제인들을 이끌고 히라가타 枚方(매방) 시를 건설 했으며
선광의 손자인 양우(良虞)의 셋째 아들 경복 이 육오수(陸奧守) 라는 관직을 맡고
있을 때에 "아오모리에서 채취한 금" 을 일본 왕실에 헌납해 두각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백제 무령왕 10세손 야마토노 오토츠구(和乙継)의 딸 인 다카노노니이가사 (高野新笠)는
고닌왕(光仁天皇 광인천황)의 황후 로 "간무왕(桓武天皇 환무천황)의 어머니"
인데, 그녀 는 며느리를 고를때 백제계 도래인인 저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의 후손
“구다라노 고니키시 百濟王”씨 가문에서 맞아들이니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바 있습니다.
젠코지 (善光寺 선광사) 는 일본 불교도들의 성지순례지 로 나카센도(중산도)로 부터
갈라져 나온 도로 이름이 젠코지 가도 로 불렸는데 큰 절은 그 자체로 권력 이라
1천석 영지 를 갖고 있었으며 본당은 불당의 전면에 장대한 예당을 배치한 당목조로
불리는 구조를 가진 동(東)일본 최대 규모 로 에도 중기 불교건축의 걸작 이라고 합니다.
연간 무려 600만명의 사람들이 젠코지를 방문 한다고 하는데... 1998년 2월에
행해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개회식 에서는, 선광사 범종 이
세계 평화의 소원을 담아서 전 세계를 향해 울렸던 것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나가노시 남쪽에 자리한 사나다(真田 진전) 가문 의 혼을 이어받은 성 이라는 마츠시로성
松代城(송대성) 으로 가기 위해 역광장으로 내려가서는 3번 승강장 에서 16시 15분에
30번 버스 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니 시내를 벗어나자 말자 끝없는 농촌 들판이 이어집니다.
센고쿠 시대에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이 맞붙었던 가와나카지마 川中島古戰場
(천중도고전장) 을 지나 35분 만인 16시 50분에 마츠시로 松代(송대) 마을에
도착하니 버스 요금은 650엔이 나오는데..... 버스 정류소 바로 앞에 있는 목조로
된 오래된 건물은 옛 마츠시로 기차역 이며 그 뒤로 "마츠시로성(松代城)" 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