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연습
김 국 자
옆집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노부부가 살았다.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하던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 할아버지는 조석(朝夕) 때만 되면 아들네 집으로 식사하러 다녔다.
어둠이 깃든 어느 날, 어깨를 축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힘없이 걸어오셨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셨어요?” 여쭈었더니 “밥을 주는 놈이 있어야 먹지요” 하며 한숨지었다. 딸네와 아들네가 지척에 있지만, 딸과 며느리 모두 직장생활을 한다. 딸은 K대학병원에 근무하고 며느리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한다.
그 댁 할머니는 후리후리한 키에 얼굴도 예쁜 미인이었다. 외출 할 땐 고급스런 의상에 머리손질까지 신경 쓰는 멋쟁이였다. 그 댁 문갑 위에는 항상 약봉지가 수북했다. “나~사실은 빛 좋은 개살구야.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것 같지?”하며 할머니는 속옷을 걷어 올리고 뱃살을 보였다. 하얀 뱃살에 주사바늘 자국이 선명했다. 날마다 인슐린주사를 맞아야하는 당뇨환자였다. 언제나 단정하고 표정이 밝아 건강한 줄만 알았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당뇨합병증으로 입원을 했다. 서너 달 후 할머니가 퇴원 했는데, 산소 호흡기를 연결한 채 집안일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그런 몸으로 퇴원하시면 어떡해요?” 했더니 “영감 조석 때문에 안 그러나” 하시며 반찬을 만들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밥도 할 줄 모르고 세탁기 사용할 줄 모르는 영감 때문에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할머니 계실 땐 자주 드나들던 자식들 발길도 뜸해졌다. “할아버지! 이제 아들네 그만 가세요.” “그럼 굶어죽으라고요?” “굶긴 왜 굶어요. 쌀 씻어서 전기밥솥에 안쳐놓으면 저절로 밥이 되는데 무얼 걱정하세요.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이 나이에 살림 배우란 말이요?” 하며 역정 내셨다.
우리나라 풍습에 버려야 할 관습이 있다. 남정네가 부엌에 드나들면 체신이 떨어진다는 잘못된 관습으로 대부분의 남자들이 부엌출입을 꺼렸다. 말기 암 환자인 아내를 도울 생각은커녕, 삼시 세 때 꼬박꼬박 밥상을 대령했다는 할아버지가 노령에 고생길에 들어섰다.
옆집할아버지를 보며 우리부부 홀로서기 연습을 하기로 했다. 세상을 떠나는 일은 순서가 없다. 하늘에서 누구를 먼저 부를지 아무도 모른다. 당뇨 약을 복용하는 내가 먼저 떠날 경우, 옆집할아버지처럼 아무것도 못할까봐 남편에게 밥물 맞추는 것이며 반찬 만드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차근차근 배운 우리 남편 살림 실력이 점점 늘었다. 밥도 잘 짓고 색깔 있는 빨래와 색깔 없는 빨래를 구분하여 세탁하고 다림질까지 잘했다. 어쩌다 내가 외출에서 늦을 땐 밥을 고실하게 지어놓고 기다렸다. 마실 물이 떨어질 것 같으면 보리차를 미리 끓여놓고, 굵은 소금으로 물병 소독도 말끔하게 했다.
쉬는 날이면 마누라 들으라고 ‘바쁘다~ 바빠~~ 돈 벌어와야지~~~ 청소해야지~~ 빨래해야지~’ 하며 궁시랑 거렸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나는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자유를 누렸다.
콩국수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콩 삶는 방법이며 콩국 거르는 과정을 가르쳐주고 국수 삶는 요령도 가르쳐주었다. 물이 펄펄 끓을 때 국수를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찬물을 두어 번 끼얹어야 쫄깃하다고 했다. 남편은 콩국수를 직접 만들 정도로 숙달되었다. 주방 근처에 얼씬도 안한다는 시동생이 어느 날 우리 집에 다니러왔다가 국수를 삶고 있는 남편을 보고 “우리형님, 별걸 다 하시네!” 하며 흉을 보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전등 교체하는 방법, 벽시계 건전지 교체하는 방법, 현관문 건전지 교체하는 방법, 보일러 작동하는 걸 배웠다. 주방 일을 돕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두 아들 역시 주방 일을 돕는다. 제 아내 입덧할 때 바지락 수제비를 만들어 주고 설거지도 도맡았다. 능숙한 솜씨로 아기목욕 씻기고 기저귀도 척척 갈아주었다.
여자만 집안일을 하라는 법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의식주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아야한다. 남자라는 이유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바쁘게 생활하는 자식들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