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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 취나드는 이미 ‘전설 속의 인물’이다.
우리 세대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바위질(!)을 하러다니던 ‘중딩’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나의 아버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낡은 배낭의 브랜드가 ‘취나드’였다.
. “주한미군이었대. 어느날, 한국 최고의 바위꾼 선우중옥 선배를 찾아와 함께 바위를 하자고 그랬다는데,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이 ‘당대 최고의 바위 천재’들이 이 길을 개척할 때 며칠이나 걸렸을 거 같애? 딱 하루야.
온사이트(아무런 정보도 없이 처음 접한 바위벽을 오르는 것)로 한방에 끝내버렸다구.”
맙소사, 이십대의 팔팔한 청춘인 내가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온몸으로 진땀을 흘리며
거의 죽기살기로 올라온 이 길을 온사이트로 올랐다구? 그것도 장비도 변변치 못했던
1963년에? 바위에 미쳐 사는 청춘의 가슴 속에서라면 이제 그 ‘전설 속의 인물’은 이미 신(神)의 경지에 올라서기 마련이다.
나이 들어서 알게 되는 이본 취나드라는 인물은 더욱 더 매력적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등반의류 브랜드는 ‘파타고니아’이다.
전세계에서 공히 최고의 브랜드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 파타고니아의 창립자이며 현재의 회장이 바로 이본 취나드란다.
매출액 규모로 봐도 이미 억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선 사람인데,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방식은 더 없이 소박하기만 하여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본 취나드는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그는 아직도 1960년대에 만들어진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주워온 조개들로 끓이는 조개탕이다.
나를 가장 매료시킨 것은 등반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이본 취나드는 부탄 히말라야의 6,000m급 산을 초등했다.
하지만 그는 등반 직후 자신이 작성한 루트 개념도를 찢어버리고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다음에 오는 사람도 초등자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이 점에서 그는 “네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말라”던 게리 헤밍과 상통한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세계적인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가난하고 자유로운 히피로 남아있는 셈이다.
이본 취나드의 삶을 들여다보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민자이다.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전까지 프랑스어를 더듬거렸을 뿐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덕분에 미국의 초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는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특수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그는 정규교육에서 어떠한 흥미로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그는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고 만다.
그가 원했던 일이란 물론 클라이밍이다.
해외의 경제 전문지들은 때때로 그를 가리켜 “가장 크게 성공한 고교 중퇴자”라는 식의 인터뷰를 싣곤 하는데,
정작 이본 취나드는 매우 담담하게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학교에서는 그것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둔 것뿐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아까웠던 시간은 학교에서 수학공식을 외우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뜻에서 홈스쿨링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의 아이들 역시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집에서 저 홀로 공부하며 컸다고 한다.
이본 취나드라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니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일년치 연재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왜 그를 가장 매력적인 산악인이자 존경할만한 인간이라고 여기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본 취나드는 자연인이다.
“클라이밍하는 농부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들은 클라이밍할 필요를 못느낍니다. 대지에 뿌리박고 있으니까요.”
그는 세간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그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사람이다.
“저는 바위나 설산과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테니스를 즐기지만 누구와도 시합은 안 합니다.
대신 저의 장비와 등반기술 그리고 라켓 휘두르는 법에 집중할 뿐이지요.”
그가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첫댓글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받았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취나드나 로우, 밀레, 가리모아 배낭을 메면 그시절엔 뭐~~~목에 힘좀 주고 다녔다고 볼수도...^^
로우 LOWE 배낭은○ [ 로우 알파인 태초 배낭 ] •• 볼 수있는 기회가 잘 없네요 ㅡ 2011 년에 지리산 산행길에 로우 배낭메고 산행하시는 분은 봤습니다 만 ^^*
퍼런 취나드 드레곤 어텍, 로우 빨갱이색 맹꽁이, 헤질때까지 메고.
제일먼저 자크가 고장나고 터지면 허연 나일론실로 꿰메고 다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이글들이 예전에 산에대한 철학이 이러하지 않았을까ㅇ...
제가 예전에 가지고 싶었던 배낭입니다, 구하고 싶었을때는 이미 없어진 후라서 사진만 보았습니다.
한 몇리터나 되나요. 혹시 수도권이면 한번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옆 주머니 빼고 45 - 50 리터 정도 됩니다..^^* 현재 서울에서 거주 하며 시간 되시면 연락처 남겨 주시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옆 주머니는 탈 부착 입니다..^^
감사합니다.
취나드배낭이 80년대에 국내에서는 자칼에서 라이센스 생산하고 일본에서도 생산하였는데 착용감은 그닥 좋지않았습니다 추억의 물건이네요 ^^
취나드 드래곤 배낭도 미국 원산으로 하단에 침낭주머니가 분리되어 있는 100리터급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찾아보기 힘드네요.
안나프루나에서 산업장비 및 암벽장비 판매 하면서 파타고니아 제품도 같은 매장에서 판매 하였다가 안나프루나와 파타고니아 매장이 나뉘어 운영하였다가 현재는 파타고니아만 운영되고 안나프루나 매장은 없어져서 아쉬움이 있슴
검정고무신님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독일산 수통 분양받은 씨리얼이라 합니다. 볼수록 넘 좋아서 실사용할까 아님 한켠에 고이 모셔놓을까 고민중에 있습니다.
직접 만나뵈니 너무 인자하신 모습과 산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스틱 분양받으신분과 이야기하면서 많은것을 배우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글을 읽으면서도 제가 태어나기전에 있었던 주옥같은 이야기에 푹 빠졌습니다.
나도 낸중에 울 자식이나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아니 들려주고 싶습니다. 커피한잔을 마시며 달 하늘 아래서....
우연히 취나드 배낭을 보게 되었네요ㅎ 저는 이 배낭 카피품 자칼 배낭 빨강 매고 다닙니다ㅎ 여전히 현역으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저도 지금까지 취나드 배낭 하나 소유하고 있습니다.
제것은 색상이 노란색입니다. 80년대 한창 시절에 이배낭가지고 정말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시절 기억이 아쉬워서 파타고니아 40리터 배낭과 함께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산행을 하다보면 옛 배낭들을 자주 목격 합니다.. ^^
로우 . 취나드 드래곤 . 밀레 발토르. 쎄레또레 . 레드 페이스 . 가리모아 [ 군용색깔 ] . 모단. 빅팩 ... 등등 ...
아직도 대형 배낭을 메고 다니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 참 오래되었는데 ^^
의류 중에서도 .. 로얄 로빈슨 의류를 아직 입고 계시는 분들도 있고요 ..^^
제가 좋아하는 파타고니아의 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산양 배낭과 로우 배낭이 최초였네요...^^
제가 가져있는 로우 배낭은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습니다.. ^^
님께서도 가져 계신다면 다시금 등에 업고 다니심이 좋을 듯 싶네요.>^^
님덕분에 어린시절로 여행을 떠나봄니다 그떼군용 배낭에 워카짤라 신고 인수를 마닐라삼로푸에 us카라비나 벗삼아 오르던 그시절이 왼지.......
저는 로우배낭과 시몽피켈이 이사다니다 보니 없어져 이제는 옛것이 하나도 없네요 님들이 엄청 부럽고요
이렇케나마 옛것을 접할수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림니다.......
혹시 옛날에 쓰던 기스링배낭 소장하고 계신분 계시면 한번 구경 하고 싶네요
오늘밤엔 강촌구곡포에서 얼음찍고 폭포밑 가게서 오뎅국 끌여 악우들과 함께 즐기던 꿈이나 꾸렴니다
벌써 30년이 넘어 저도 50후반이 되고보니 ㅎ ㅎ ㅎ 지금은 관광뻐스 타고 다니고 있지만
그떼 버스나 기차 타고 다니던 시절이 외 ~~ 자꾸 그리워 지는지?
글이 너무 좋아 무단 복사해서 가져갑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