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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李資謙)은 중서령 자연(子淵)의 손자요 경원백(慶源伯) 호(顥)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아가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여동생이 순종(順宗)의 왕비였는데, 순종이 죽은 후 궁노(宮奴)와 간통을 하였다. 이자겸이 이에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예종(睿宗)이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비로 들이면서 급속도로 출세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주국(柱國)에 이르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어 수태위(守大尉)를 더하고 익성공신(翼聖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 김(金)씨는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으로 처 최(崔)씨는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같은 날 세 번의 칙서가 그 집에 내렸다.
거듭하여 동덕추성좌리공신(同德推誠佐理功臣),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이 보태지고 식읍(食邑) 2천 3백 호 식실봉(食實封) 3백호를 받았으며 여러 아들들도 작위를 올렸다.
왕의 죽고 태자가 어려 왕의 여러 아우들이 왕위를 엿보았는데 이자겸이 태자를 받들어 즉위케 하니 이가 인종(仁宗)이다.
인종은 이자겸을 협모안사공신(恊謀安社功臣)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 소성후(邵城侯)로 올리고 식읍 오천 호 식실봉(食實封) 7백 호를 주었다.
왕이 조서를 내려 이자겸에 대한 예우를 (다른 신하와) 다르게 하려 하니, 뭇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신하라고 칭하지 말며 연회 때 백관과 함께 뜰에서 하례하지 않아도 되게’ 청하였다. 특제(待制) 김부식(金富軾)이 반대하여 그 뜻을 따랐다.
이어 한양공(漢陽公)에 책봉되었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평장사(平章事) 김정준(廷俊)의 딸로 성품이 탐욕스러워 시장 사람에게 물건을 사고도 그 값을 주지 않거나 노비를 시켜 횡포한 짓을 하였으므로 시장 사람들의 그의 죽음을 기뻐하였다.
王이 추밀원사(樞密院使) 박승중(朴昇中)을 보내 이자겸에게 조서를 내렸다.
“임금이 신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음은 대개 공덕을 표창하고 친현(親賢)을 우대함이다. 성왕(成王)이 주공(周公) 단(旦)에게 한 것과 (한의) 장제(章帝)가 동평왕(東平王)에게 한 것을 역대 임금이 고사로 삼은 것이다.
하물며 공은 선왕이 부탁한 사람이요 어린 내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책임이 크고 깊으며 공덕이 높고 무겁다. 다른 신하들처럼 부를 수가 없으니 이제부터 내리는 조서에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경(卿)이라고 부르지도 않겠다. 이것이 비록 특별히 남다른 예우이나 역시 옛 법에 따른 것이다. 빨리 상복을 벗고 조정에 나오라.”
의복과 띠, 말안장, 금은, 폐백을 함께 많이 내리니 이 자겸이 글을 올려 사양하고 상을 끝마칠 수 있도록 청하였다.
왕이 또 사신을 보내어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중서령(中書令)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 판이병부(判吏兵部)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책봉하고 식읍 8천호 식실봉(食實封) 2천호를 주었다.
부호(府號)를 숭덕부(崇德府)라 하고 관료를 두게 하였으며 궁호는 이친궁(懿親宮이)이라 하였다. 숭덕은 본래 역신(逆臣) 김치양(金致陽)의 서택(西宅) 호칭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자겸의 처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하고 아들 지미(之美)는 비서감(秘書監)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공의(公儀)는 상서형부시랑(尙書刑部侍郞)으로, 지언(之彦)은 상서공부랑중(尙書工部郞中) 겸 어사잡단(御史雜端)으로 지보(之甫)는 상서호부랑중(尙書戶部郞中) 지공방사(知恭房事)로, 지윤(之允)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지원(之元)은 합문지후(閤門祗候)의 벼슬을 주고 중이 된 아들 의장(義莊)은 수좌(首座)의 법계를 주었다.
왕이 건덕전乾德殿) 문밖에 나가 친히 조서를 전하니 백관이 전에 나아가 뜰에서 하례한 뒤 이자겸의 집으로 가서 하례하였다.
이자겸이 상복을 벗고 자리에 앉으니 중서성(中書省) 재추(宰樞)와 문무(文武) 상참(常參) 이상은 뜰위에서, 7품이하는 뜰 아래에서 줄지어 하례를 올렸다.
이날 큰 비가 내려 번개와 천둥이 치고 길거리에 물이 일 장이나 찼다.
이 자겸은 다른 성씨가 왕비가 되면 권세와 총애가 나눠질까 두려워하여 셋째 딸을 왕비로 받아주도록 강요하니 왕이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 이 날 큰 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리고 나무를 뽑았다. 뒤에 또 넷째 딸을 왕비로 들이니 또 크게 비바람이 몰아쳤다.
욍이 이자겸을 책봉하면서 은혜를 베풀어 두 가지 죄 이하는 사면토록 하였으며 그 날 도성과 지방에서 바친 물품은 모두 이자겸의 집으로 보냈다.
해당 관청에 명하여 이자겸의 조상때부터 살던 집인 개명택(開明宅)을 수리하게 하고 일이 끝난 뒤 집 이름을 중흥택(重興宅)이라 고쳐 이자겸이 거처하게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수동(李壽同)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허재(許載)를 보내어 조서를 내리고 의대, 금과 비단, 말안장, 토지,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어 왕이 그 집으로 행차하여 술자리를 만들고 집안사람의 예로 어울리다가 밤늦게 돌아와서는 지미를 예부상서(禮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공의를 위위경(衛尉卿)으로 삼았다. 다른 자제와 친척들에게도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다.
이자겸이 제멋대로 자기 부(府)의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 송나라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특산물을 바치며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자칭하였다.
이자겸은 권세와 총애가 날로 성해지자 자신에게 붙지 않은 사람은 온갖 계책으로 헐뜯고 모함하였다. 왕의 아우 대방공(帶方公) 보(俌)를 경산부(京山府)에 귀양보냈고 평장사(平章事) 한안인(韓安仁)을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곧 죽였다. 또 최홍재(崔弘幸), 문공미(文公美), 이영(李永), 정극영(鄭克永) 등 오십여 명을 귀양보냈다.
그 족속을 요직에 깔아놓고 관직을 팔아 그 일당을 많이 심어놓고는 스스로 국공(國公)이 되어 예우를 왕태자와 같이 하였다.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로, 안팎에서 온 축하글을 전(箋)이라 칭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어 제택(第宅)을 일으키니 그 집들이 연이어 세력이 더욱 성하니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고 썩은 고기가 항상 수만근이었다. 다른 사람의 토지를 강탈하며 종을 놓아 수레를 빼앗아 자기의 물건을 실어드리니 백성들이 다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팔아치우니 도로가 소란하였다.
또 군국사무를 처리할 때는 왕을 청해 그 집에 행차하도록 하여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시일을 무리하게 정하니 비록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왕이 매우 싫어하였다.
내시(內侍)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麟)이 항상 왕의 옆에서 모시며 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 동지추밀(同知樞密) 지록연(智祿延)과 더불어 이자겸을 잡아 멀리 내치려고 하였다.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오탁(吳卓),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을 불러 이를 도모하였다. 그 때 지원의 장인 척준경(拓俊京)이 그 아우 준신(俊臣)과 함께 자못 권세를 부렸는데 최탁 등은 준신이 자신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다가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발탁되어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약속을 미리 정해 초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서 먼저 척준신 및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純)과 지후(祗候) 김정분(金鼎芬) 녹사(錄事) 전기상(田其上), 최영(崔英)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던졌다.
내직 기두(內直旗頭) 학문(學文)이 성을 넘어 중랑장(中郞將) 지호(池顥)를 통해 이자겸에게 알리니 이자겸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낭중(郞中) 왕의(王毅)가 또 성을 넘어와 급히 상세한 보고를 하니 이자겸이 척준경과 지미 등과 더불어 서로 쳐다보며 벌벌 떨었다.
재추(宰樞)와 조정 관리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모아놓고 지미를 시켜 왕복하며 의견을 물으니 모두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척준경이 “일이 급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라고 말하며 시랑(侍郞) 최식(崔湜), 지후(祗候) 이후진(李候進), 녹사(錄事) 윤한(尹翰) 등과 함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주성문(朱省門)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에 윤한을 시켜 성을 넘어 자물쇠를 부수고 빗장을 열어 들어갔다.
신봉문(神鳳門) 밖에 이르러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지록연과 최탁 등은 바깥의 병사가 크게 모였다고 생각하고 낙담하여 나오지 못하였다. 이자겸이 사람을 시켜 최탁, 오탁, 권수, 고석 등의 집을 불사르고 그 처자와 노복을 잡아 가두었다.
다음날 아침 척준경이 척준신 등의 시체를 보고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지보, 최식, 이후진, 윤한, 김정황(金鼎黃), 조순거(曹舜擧), 문중경(文仲經) 등과 함께 군졸을 불러 모아 군기고의 무기를 주고는 승평문(昇平門)을 에워쌌다. 또 (이자겸의 아들인) 의장이 현화사에서 승려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밖에 이르니 궁 안에 있던 자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고 활로 성문 위에서 수비만 할 뿐이었다.
왕이 신봉문(神鳳門)에 거둥하여 황색 양산을 펼치니 척준경의 군졸들이 이를 보고 절을 올리며 기뻐 만세를 불렀다.
왕이 “너희들이 어찌하여 무기를 가지고 왔느냐”하고 물으니, 이들은 “적이 궁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사직을 지키기 위할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적은 없고 짐도 역시 무사하니 너희들은 갑옷을 벗고 물러가라.”하고 내탕고(內帑庫)의 은과 비단을 줄에 매달아 군졸에게 내려주는 한편 시위사(侍御史) 이중( 李仲)과 기거사인(起居舍人) 호종단(胡宗旦)을 시켜 군사를 달래 무장을 해제시켜려고 하였다.
이에 척준경이 노해 칼을 뽑아들고 이중 등을 쫓으며 군졸들로 하여금 다시 무장을 갖추고 크게 소리를 지르게 하였다. 이 때 화살이 어전에까지 날아들어 방패로 가렸다. 의장의 무리가 도끼로 신봉문의 기둥을 쪼개다가 문루 위에서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자겸이 합문지후 최학란(崔學鸞)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을 시켜 궁문에 이르러 아뢰었다. “청컨대 궁중에서 난을 일으킨 자를 내보내소서. 그렇지 않으면 궁중을 경동케 할까 두렵습니다.”
그 말이 매우 불손하니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척준경이 소억을 이자겸에게 보내 말하였다. “‘이제 날이 저물어 가는데 적이 밤을 틈타 몰래 나올까 두렵습니다. 그들이 나오기 전에 미리 궁문을 불태우고 잡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자겸이 지의를 시켜 평장사 이수(李壽) 등에게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궁궐 건물이 서로 잇달아 있어 불이 붙으면 끌 수가 없으니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부감(少府監)의 황회목(黃灰木)과 장작감(將作監)의 나무를 가져다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바람과 불꽃이 성하여 잠깐 사이에 불길이 왕의 침전에까지 미치니 궁인이 모두 놀라 달아났다.
오후에 척준경과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군사 백여명을 거느리고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니 문을 지키던 내시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척준경이 왼쪽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전(前) 금위별감(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들고 쫓아오니 척준경이 물러났다. 척준경이 사람을 시켜 모든 문을 지키게 하고 ‘안으로부터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죽여라」고 하였다
밤에 왕이 걸어서 산호정(山呼亭)에 이르니 시종이 모두 흩어지고 오직 근신 임경청(任景淸) 등 10여 명만 남아있었다. 왕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선위( 禪位)하겠다고 청하였다.
이자겸이 양부(兩府)의 의논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자 이수(李壽)가 자리에서 소리쳐 말하기를 “임금님의 조서가 있다고 하나 이 공이 어찌 감히 이같이 할 수 있느냐?” 하니 이자겸의 뜻이 드디어 막혔다. 이에 눈물을 흘리며 조서를 돌려주며 말하기를, “신에게 두 마음이 없으니 살펴 헤아려주소서” 하였다.
홍립공(洪立功)은 장군 유한경(劉漢卿) 휘하의 중랑장(中郞將)이었는데, 이자겸이 유한경을 궁중에 들여보내면서 홍립공을 임시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척준경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척준경이 홍립공에게 군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땔나무를 지고 도성 남쪽길에 이르게 하였다. 홍립공이 몰래 군사들에게 “나와 너희들은 모두 왕의 신하인데 섶을 지고 궁을 태움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라고 말하자 이들이 짊어지고 있던 것을 놓고는 선의문(宣義門)의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왕앞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왕이 놀라 ‘너희들이 누구냐’고 묻자 홍립공이 왕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술과 음식을 내렸다. 이들은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하였다.
다음날 새벽 왕은 불길이 거세가 몰려오므로 나가 이자겸을 만나고자 승선(承宣) 김향(金珦)을 보내어 남궁(南宮)으로 출어(出御)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경령전(景靈殿)까지 걸어가 내시 백사청(白思淸)에게 명하여 역대 왕의 어진을 내제석원(內帝釋院)의 마른 우물 속에 넣게 하고 곧 화서문(西華門)으로 나가 말을 타고 연덕궁(延德宮)에 이르렀다.
오탁이 길을 인도하였는데, 척준경이 낭장(郞將) 장성(張成)을 시켜 칼을 뽑아들고 뛰어들어 오탁을 베어 죽였다. 또 좌복야(左僕射) 홍관(洪灌)을 죽였으며 사람을 나눠 보내 최탁, 권수, 고석, 이작, 안보린, 송행충, 대장군 윤성(尹成), 한경(韓景), 장군 박영(朴英), 송인(宋仁), 사유정(史惟挺), 오정신(吳挺臣), 한경(漢卿), 낭장 이유(李儒), 내시 최잠(崔箴), 원외랑( 員外郞) 박원실(朴元實) 등을 잡아 죽였다. 그밖에 군사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시봉어(內侍奉御) 왕관(王觀), 대장군 윤선(尹先), 랑장 정총진(丁寵珍), 별장(別將) 장성호(張成好)가 왕을 쫓아 남궁에 있었는데 이자겸이 이들을 내놓으라고 거듭 청하였다. 왕이 부득이 이를 받아들이고 사람을 시켜 죽이지 말도록 청하였으나 이지보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자겸이 척준경이 함께 의논하여 난이 일어나던 날에 숙직하던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이자고 하였으나 이수가 끝까지 반대하여 그만 두었다.
장군 이록천(李祿千), 김단(金旦), 김언(金彦)은 도망하여 화를 면하였다. 뒤에 김언이 스스로 나오니 남쪽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날 궁궐이 모두 타고 오직 산호정과 상춘정, 상화정 3개의 정자와 내제석원의 행랑 수십 칸만 겨우 남았으며, 백관들은 허둥대며 달아났다.
이자겸이 지록연과 오탁의 아들 오자승, 고석의 아우 보준을 죽이고 김찬을 멀리 유배보냈다. 지록연과 김찬의 처와 자식은 적몰하여 노비를 삼았는데 김찬은 뒤에 김안(安)으로 고쳤다
이자겸이 왕에게 중흥택(重興宅) 서원(西院)에 행차할 것을 청하므로 왕이 의장도 갖추지 않고 샛길로 갔다. 대경(大經) 김의원(金義元), 최자성(崔滋盛)이 중흥택의 집사로서 나와 맞이하였다.
낭장 지석숭(池錫崇), 산원(散員) 권정균(權正均), 대정(隊正) 오함(吳含)은 산호정에서 남궁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때 지석숭 등이 왕을 부축하여 북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이 이들을 죽이려고 낭장(郎將) 이적선(李積善)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지석숭이 임금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하므로 왕이 이적선을 꾸짖으며 가슴에 발길질을 하였다. 그래도 놓지 않아 왕의 옷이 찢어지고 관모가 문중방에 부딪쳐 파손되었다. 이지미와 이지보는 문에서 바라보고만 있었고 왕은 뜰에 내리지 않았다.
최식(崔湜)이 홀로 나가 왕에게 절을 하고 이적선을 꾸짖었다. “임금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이같이 하느냐”
이적선이 드디어 놓아주었으나 지석숭 등은 오히려 두려워하며 나가지를 못하였다.
그 때 환관 조령(趙寧)이 이자겸에게 아첨하여 섬기므로 왕이 최식과 조령을 불러 말하였다. “ 석숭 등 세 사람은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그 밖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청컨대 죽이지 말게 하라 」척준경이 이를 받아들여 먼 곳으로 내쳤다.
왕이 집안에 오르자 이자겸이 그 처와 함께 손뼉을 치고 땅을 치며 크게 울며 말하였다.
“황후가 입궁한 뒤로 태자(太子) 낳기를 기원하다가 성인(聖人:仁宗)이 탄생하니 하늘에 폐하의 장수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천지의 귀신이 우리의 지극 정성을 알 터인데 오늘에 이르러 불충한 신하의 말만 믿고 골육을 해치려 하십니까?”
왕이 낯빛을 붉히고 아무 말이 없었다.
왕이 서원(西院)에 기거한 후로는 좌우가 모두 이자겸의 도당이라 국사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행동과 음식이 모두 자유롭지 못하였다. 백관들은 가까운 관청으로 옮겨 있으면서 머리수만 채울 뿐이었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성하여 그 하는 바를 감히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척준신에게는 수사공(守司空)을 김정분(鼎芬)과 척순(純)에게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전기상(田其上), 최영(崔英)에게는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추증하고 후하게 조의금을 내렸다. 이자겸의 뜻을 따른 것이다. 또 자겸이 미워하는 내시 이십오 명을 내쳤다.
이로부터는 외가(外家)가 더욱 횡포하매 재상 박승중(朴昇中), 허재(許載) 이하 모두 이자겸에게 아첨하며 붙었다. 그 위세와 포악이 가히 두려웠다.
왕이 몰래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과 함께 모의하여 척준경을 달래 왕실에 힘을 쓰게 하였다. 척준경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왕이 척준경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짐이 밝지 못한 까닭에 흉악한 무리들이 일을 저지르고 대신들로 하여금 걱정하며 수고하게 하였다. 모두 과인의 죄이다. 이로써 몸을 살피고 허물을 뉘우쳐 하늘을 가리키며 마음에 맹세하여 신하, 백성과 더불어 오직 그 덕을 새롭게 할 것을 바란다. 경이 힘써 마음을 다해 나를 도와 후환이 없게 하라.
때마침 지언의 종이 준경의 종을 꾸짖었다.
“너의 주인이 임금이 계신 곳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다. 너희들도 모두 적몰되어 관노가 될 것이니 어찌 나를 욕하리요”
척준경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자겸의 집으로 달려가 의관을 벗어던지고 말하였다.
“내 죄가 큽니다. 마땅히 소사(所司: 관청?)에 나아가 스스로 변명하겠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니 말려도 듣지 않았다. 자기 집에 드러누웠다.
이자겸이 지의와 공의를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지만 척준경이 “전일의 난은 다 너희들이 한 바이어늘 어찌 홀로 나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느냐?”라고 꾸짖으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을 보내어 속히 나와 일을 보게 하고 말안장을 하사하였다.
이자겸이 왕을 따라 안화사(安和寺) 에 갈 때 백관이 말 앞에서 절하였지만 이자겸은 이것을 보기를 태연히 하였다. 얼마 후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이어(移御)하니 이자겸이 궁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고 집의 북쪽 담을 뚫어 궁궐안과 통하게 하고 군기고(軍器庫)의 무기를 가져다 집에 보관하였다.
왕이 홀로 북쪽 담에 가서 하늘을 우러르며 오랫동안 통곡하였다
이자겸은 十八子(李字)가 왕이 된다는 비기를 믿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려고 독을 떡 속에 넣어 올렸다. 왕비가 몰래 왕께 사뢰고 떡을 까마귀에게 던지니 까마귀가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어 왕비를 시켜 왕께 드리게 하였는데 비가 사발을 받들고 거짓으로 미끌어져 이를 엎질렀다. 이 왕비는 곧 자겸의 넷째 딸이었다.
준경이 이미 이자겸과는 틈이 생겼고 또 최사전이 사이를 타서 달래니 척준경이 곧 방책을 결정하고 사람을 “지금부터 힘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척준경에게 이르기를 “국공(國公:이자겸)이 비록 분수에 넘는 난동을 하지만 반역의 형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 만약 짐이 먼저 거사하면 친척을 사랑하는 뜻에 어떠하겠는가. 천천히 기다려 응하여도 늦지 않다.” 하고 중인으로 하여금 이를 엿보게 하였다
하루는 척준경이 병부(兵部)에서 무신을 추천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왕이 손수 쪽지에 글을 써서 비밀히 환관 조월을 보내 준경에게 보였다.
“오늘 숭덕부(崇德府)의 군인이 병기를 가지고 대궐북쪽으로 와서 침전 문으로 들어올 듯하다. 짐이 만약 해를 입어도 나의 부덕의 소치이다.
애통한 바는 태조가 창업하시고 역대 성왕이 서로 이어 나에게 이르렀는데 만약 다른 성으로 바뀌어지면 짐의 죄일뿐 아니라 실로 대신들도 깊이 부끄러울 바이다. 그대는 도모하라.”
척준경이 곧 어필을 상서(尙書) 김향(金珦)에게 보이니 향이 꿇어앉아 하늘을 부르고 울며 말하였다. “임금님의 뜻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죽기를 각오하고 하여야 할 것이어늘 공은 편안히 있을 것인가?”
준경이 향과 함께 장군 일곱과 아전, 노복 2십여 명을 거느리고 북문을 나왔으나 서두르다 보니 가진 무기가 없어 목책을 뽑아 몽둥이로 삼고 금오위(金吾衛) 남쪽다리로 궁에 들어갔다. 조의(趙毅)가 불러 들이면서 “일이 급하니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드디어 광화문(廣華門)을 닫았는데 이공수(李公壽)가 따라 온지라 왕이 명하여 한 쪽 문만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공수(公壽)는 곧 이수(壽)이다
순검도령(巡檢都領) 정유황(鄭惟晃)이 백여 명을 거느리고 군기감(軍器監)에 들어가 갑옷과 병기를 나누어 주고 연경궁(延慶宮)으로 향하다 길에서 이자겸의 무리인 소경(少卿) 류원식(柳元湜_을 만났는데 그 말이 불순하므로 죽였다.
척준경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급히 입궁하니 왕이 천복전(天福殿)의 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니 자겸의 무리가 활을 쏘았다. 준경이 칼을 빼어들고 호통을 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왕이 군기감으로 입어(入御)하고 호위를 엄히 하였다. 준경이 승선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자겸을 부르니 자겸이 흰옷을 입고 왔다.
준경이 이공수와 의논하여 자겸과 그의 처자를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장군 강호(康好), 고진수(高珍守) 등을 베었는데, 모두 이자겸이 부리던 자들이었다.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이자겸의 무리들을 잡아들이고 왕이 광화문(廣華門)으로 나와 뭇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화가 내부에서 일어나 대역부도(大逆不道)하였지만 충신 의사의 의거로 해를 제거하였다.” 뭇사람이 다 만세를 부르고 기뻐 손뼉을 쳤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지미가 변을 듣고 백여명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배회하다가 돌아가 이자덕(李資德), 김인규(金仁揆)와 함께 병부(兵部)에 들어갔다. 자겸이 잡힌 줄을 모르고 있다가 오후에 순검(巡檢)이 병부에 이르러 지미를 잡아 검점소(檢點所)에 가두니 이자덕 등은 놀라 흩어졌다.
왕이 연경궁으로 돌아갔다. 측근 내시들이 먼저 들어가 궁궐을 청소하다가 의장이 내침에 숨어 있는 것을 잡아 팔관보로 보냈다.
자겸과 그의 처 최씨와 아들 지윤을 영광(靈光)으로, 지미를 합주(陜州: 지금의 합천)로, 공의를 진도(珍島)로, 지언을 거제(巨濟)로, 지보를 삼척(三陟)으로 의장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로 지원을 함종(咸從: 지금의 평안남도 강서)로 귀양 보냈다.
합문지후 박표(朴彪), 문중경(文仲經), 직장(直長) 박영(朴永), 태사령(太史令) 양린(梁麟), 동정관(冬官正) 양해(梁獬), 이숙신(李叔晨), 이분(李芬), 대장군 김호(金好), 장군 지호(池顥), 지복신(池福臣), 낭장 최사염(崔思琰), 별장(別將) 위호(位好), 산원(散員) 송용중(宋用中) 등 3십여 명과 관노, 사노 90여 명을 먼 곳으로 나눠 유배를 보냈다.
박표가 가장 간사하여 자겸에게 아첨하여 자겸의 침실까지 드나들며 백성들을 수탈하고 재산을 긁어모으는 것은 모두 그가 한 짓이라 이익을 취하고 벼슬을 구하는 자는 다투어 그에게 뇌물을 주니 큰 부자가 되었다. 조정에서 그를 더욱 미워하여 귀양가는 길에 죽여서 물에 던졌다.
또 신봉문(神鳳門)에 활을 쏜 자 1명과 지언의 가신인 대악승(大樂丞) 김충(金冲)을 잡아다 사흘동안 저자에서 칼을 씌었다가 먼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 친당(親黨)인 이자덕(資德), 김인규, 김의원(義元), 왕의(王毅), 예빈경(禮賓卿) 이자원(李資元), 전중소감(殿中少監) 박효렴(朴孝廉), 지후(祗候) 이존(李存)은 지방의 수령으로 내쳤다. 박승중(朴昇中) 울진으로 귀양보냈다.
자겸이 곧 영광에서 죽으니 삼년 뒤에 그 처를 소환하였다.
오랜 뒤에 임금이 조서를 내렸다.
“옛날 정(鄭)의 장공(莊公)이 강씨를 성영(城穎에 유치하고 맹세하기를 황천에 가기 전에는 서로 보지 않겠다. 하였다가 얼마후에 이를 뉘우쳐 다시 모자가 처음 같이 되었다. 진시황은 진황(秦皇)에 옮겨두었던 어머니를 옹(雍에서 맞이하여 함양으로 들어와 다시 감천(甘泉)에서 살게 하였다.
이 두 임금은 어머니의 옛 잘못을 잊어버리고 자식으로서 효의 뜻을 이루었으니 짐이 이를 크게 사모하노라.
장인(外舅)이 비록 죽었지만 마땅히 가까이 해야 할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야 하는 도리는 잊을 수 없다. 검교태사(檢校太師) 한양공(漢陽公)에 추증하고 처 최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봉한다. “
고려사 권 127. 열전 40 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