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강 천 수 경(千 手 經)
우리나라 각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며 기도를 시작할 때 필수적으로 독송하는 경전이 하나 있다. 부처님께 마지(摩旨)를 올릴 때도 반드시 독송하는 이 경은 의례 의식용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천수경(千手經)이다. 이 경은 불교신앙의 주술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밀교경전에 속한다. <다라니>를 수지 독송케 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밀교특유의 수행법을 제시해 놓은 경이지만 세속적인 원을 이루게 하는 데도 이 경을 상용해 왔다. 이 경의 본래 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다. 1권으로 되어 있는 이 경은 당나라 때 가범달마(伽梵達磨)가 번역했으며, 이 밖에도 비슷한 이름으로 역자가 다른 3가지가 더 있다. 불공(不空)이 번역한 것과 보리류지(菩提流志), 그리고 지통(智通)이 번역한 것이 있는데 모두 대정 신수대장경 20권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경은 손이 천 개 눈이 천 개인 관세음보살의 광대한 대비심에 의해 중생들의 소망이 성취되어 구경의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이다. 밀교에 속해 있는 경전들은 대개가 다라니를 설해 놓고 있다. 다라니(dharani)란 불․ 보살에 대한 염원 등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의 어구․ 구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어원의 뜻을 밝혀보면 모든 것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는 뜻이 있다. 비유하여 말하면 깨지지 않은 그릇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서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역된 말로 총지(摠持) 혹은 능지(能持)라 하며 또 능차(能遮)라 한다. 능차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준다는 뜻이다. 이 다라니는 주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원래 다라니는 경전의 독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경전에 설해진 내용을 짧은 구절에 축약하면서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론이나 논리로 설명하는 사변적인 말이 아닌 주술적인 능력이 내포되게 된 것이다. 『천수경』에는 대다라니인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중심이 되며 그 오에 소다라니가 8개 설해져 있다. ‘정구업진언’에서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법장진언’, ‘참회진언’, ‘정법계진언’, ‘호신진언’,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그리고 ‘준제진언’이다. 이들 진언은 각기의 성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술적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중 천수경 전체의 내용이 관음신앙과 관계된 것이므로 소진언 거운데서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이 중요한 진언이다. 줄여서 ‘육자대명왕진언’이라 하는데 밀교수행자들이 지송하는 대표적인 진언으로 여섯 글자가 육도 윤회를 벗어나 생사해탈을 성취하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천수경』에는 불교신행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진언과 찬게(讚偈)로 이루어진 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귀의와 찬탄, 참회 발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체의 대의를 파악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일체 부처님께 귀의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심을 발하여 부처님을 찬탄하며 자리이타의 공덕을 찬탄한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세로부터 지은 10악을 비롯한 모든 업을 참회한다. 이 참회는 대승의 참회로 업의 성품이 공함을 통달해야 진정한 참회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은 발원으로 이에는 보살의 이타정신이 악도에 가 악도중생의 고통을 소멸케 하는 6향(六向)과 10원(十願) 등이 설해져 있다. 아울러 이 발원은 대승의 회향정신으로 필경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중생회향으로 귀착된다. 『천수경』의 이 네 가지 뜻은 불교 신앙정서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수경』이 널리 유통된 것은 중국 송나라 때 사명존자(四明尊者)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이후에 널리 유통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많은 판본을 남기면서 크게 수지 독송되기 시작하였다. 『천수경』이 기도용 경전이라고 불린다 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거나 기도를 할 때 반드시 『천수경』을 독송하는 것이 관습화 되어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중심이 되어 밀교의 주술력을 통해하는 기도는 세속적 이익의 5가지 법으로 그 내용이 설명된다. 첫째, 식재법(息災法)으로 재앙과 고난을 제거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 속에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있어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복되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손해를 끼치고 화를 입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제반의 경우에 있어서 복을 맞이하고 재액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심리다. 이른바 영복축액(迎福逐厄)이 인간이 바라는 원초적인 소망이다. 현실의 안전이 유지 보장되기를 바라면서 재앙이 오지 않기를 일차적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증익법(增益法)으로 행복과 건강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이익과 복락을 누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더 좋은 방향으로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 역시 미래지향적인 인간의 꿈인 것이다. 셋째, 경애법(敬愛法)으로 사람의 마음에 공경과 사랑이 생겨 사람사이가 화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화합을 이루는 것은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중요한 것이다. 정신적 환경이 화합이 있을 때 좋아지는 것이다. 불화가 야기되면 서로의 행복에 침해가 일어나 삶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넷째, 조복법(調伏法)으로 악인의 나쁜 마음을 조복하고 악귀 따위를 조복 추방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악을 물리치기 위한 힘을 얻어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이기듯이 악을 퇴치하는 것이 기도를 통한 종교의 윤리적 자세가 된다. 다섯째, 구소법(鉤召法)으로 구소란 갈구리를 가지고 무엇을 건져 올려 원하는 자리에 놓아둔다는 뜻이다. 자기가 희망하는 바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법을 통달하여 특정한 수행의 지위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구소법이다. 이상의 5가지 법은 기도의 성격상에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의지에 실린 감정이나 정서적인 차이를 두고 기도의 내용을 구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풀이∴
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삼보께 머리를 조아리옵나이다)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성스러운 관자재께 머리를 조아리옵나이다)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보살님과 대보살님께 머리를 조아리옵나이다)
마하가로 니가야 (대자대비하신 분께 머리를 조아리옵나이다)
옴(옴)
살바 바예수 (모든 위난 가운데에서)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지키어 기르시고 의지가 되시는 분이시여, 바로 당신께)
나막 가리다바 (머리를 조아리옵고)
이맘 알약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이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성관자재시여! 성청경이시여! 내 이제 마음을 되새기어, 머리 조아리어 당신의 심진언을 읊나니 )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이 심진언은 일체소망의 성취요, 이 심진언은 행복이요, 이 심진언은 무적이요, 이 심진언은 일체존재가 존재하는 세계와 길을 청정케 하는 것이옵나니)
단냐타 (이 심진언은 이러하오니)
옴(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 하례 (다른 세상빛이여! 다른 세상빛 지혜여! 세상을 초월하는 분이여! 아, 다른 세상의 끊임없는 빛줄기여, 이리로, 이리로, 이리로 오시옵소서!)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 구로 갈마 (대보살이시여, 아! 마음으로 헤아리옵소서, 마음으로 헤아리옵소서, 심진언이여! 마땅히 행해야할 바를 행하시옵소서, 행하시옵소서!)
사다야 사다야 도로 도로 미연제 마하 미연제 다라다라 (바램을 이루게 하옵소서, 바램을 이루게 하옵소서! 아, 불꽃이여, 아! 불꽃이여! 아, 허공에 노니는 분이시여, 아, 허공에 노니는 위대한 분이시여! 도와 주시옵소서, 도와 주시옵소서!)
다린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제왕자재(帝王自在)시여! 움직이시옵소서, 움직이시옵소서)
마라미마라 아마라 몰제 에혜혜 (본원청정이시여! 청정본체이시여! 오시옵소서! 아, 나 바라옵나니)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사미 사미 나사야 모하 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 호로 마라 호로 하례 (아, 세상의 주인이시여! 애착의 독을 사라지게 하옵소서, 증오의 독을 사라지게 하옵소서, 견고한 어리석음의 독을 사라지게 하옵소서, 가져가시옵소서, 가져가시옵소서, 더러움을 가져가시옵소서, 가져가시는 분이시여!)
바나마 나바 사라 사라 시리 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불연화(佛蓮花)시여! 아, 다가 오소서, 다가 오소서! 연꽃이여, 연꽃이여! 나타나시옵소서, 나타나시옵소서! 참된 지혜로, 참된 지혜로, 피어나게 하소서, 피어나게 하소서!)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 하라 나야 마낙 사바하 (죽음에서 구하소서! 청경관음이시여! 보살핌 바라 내 온 마음 바치나니, 바라는 모두 나타나 큰 기쁨 얻게 하소서!)
싣다야 사바하 마하 싣다야 사바하 싣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성취하신 분께 사뢰옵나니, 크게 성취하신 분께 사뢰옵나니, 요가를 성취하여 자재하신 분께 사뢰옵나니, 목이 푸른 분께 사뢰옵나니.)
바라하 목카 싱하 목카야 사바하 (멧돼지 얼굴을 하신분, 사자얼굴을 하신 분께 사뢰옵나니)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손에 연꽃을 드신 분께 사뢰옵나니, 원반(圓盤)을 지니신 분께 사뢰옵나니,)
샹카 셥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법라(法螺)소리로 일깨워 주시기를 사뢰옵나니)
마하라 구타 다라야 사바하 (큰 방망이를 가지신 분께 사뢰옵나니)
바마 사간타 이사 시체다 가릿나 아나야 사바하 (왼쪽 어깨에 흑사슴 털가죽을 걸치신 분께 사뢰옵나니)
마가라 잘마 이바 사나야 사바하 (호랑이 가죽옷을 입으신 분께 사뢰옵나니)
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삼보께 머리를 조아리옵나니)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성스러운 관자재께 머리를 조아리옵나니)
사바하 (사뢰는 모두 이루어 주옵소서!)
제 6 강 금 강 경(金剛經)
금강경(金剛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경으로 대장경 가운데 반야부(般若部)에 속해 있는 경이다. 대반야(大般若) 600부 가운데 577권에 해당되는 경인데 본 이름《금강반야파라밀다(金剛般若波羅蜜多)》를 약칭 금강경(金剛經) 혹은 반야경(般若經)이라 부른다. 범어(梵語)로 된 원 이름은《바즈라쳇디카 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a Paramita Sutra)》이다. 지금까지 범본이 남아 전한다.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능히 일체번뇌를 끊어 없애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옛날부터 중국에서 이 경을 판석(判釋)하여 대승시교(大乘始敎)의 경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이 경이 대승의 법을 설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아함부(阿含部)와 방등부(方等部)의 경을 설한 후 반야부(般若部)를 설했다 하여 부처님의 일대시교(一大時敎) 가운데 시기적으로 중기에 설했다고 믿어 온 경이다. 불입문자(不立文字)로 표방하는 선가(禪家)에서도 중요시 여겨 온 경으로 선(禪)수행에 많은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중국 선종의 5조 홍인(弘忍)스님과 6조(六祖) 혜능(惠能)스님 이래 선종에서도 필독서로 여겨져 왔다. 육조스님은 이 경을 듣고 발심하여 출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선종의 법맥을 계승한 조계종에서는 유독 이 경의 이름 하나만 종헌에 넣어 소의경전으로 지목해 놓았다. 이 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초기였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불경 가운데서 가장 많이 독송되어 온 경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경의 독송을 널리 권장(勸獎)해 온 이후로 특히 많이 유통되었다. 이 경이 한역(漢譯)된 것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 보리유지(菩提流支), 진제(眞諦 499~569), 급다(笈多 ?~619), 현장(玄奘602~664), 의정(義淨 635~713)스님이 각각 번역하였다. 이 중 진나라 때(A.D402년) 구마라집이 번역한 본이 널리 유통되었다. 이 경이 중국에 들어와 한역되고부터 이 경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많이 이루어졌다. 이 경에 대한 주소(註疏)를 한 것이 옛날에 이미 800여에 달했다고 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주(註)와 소(疎)의 서명은 한, 중, 일 3국에서 모두 200여 가지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전해 오는 목판의 판본만도 20본이 넘는다. 현대에 와서도 금강경에 대한 많은 연구서들이 속속 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양에도 이미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불교학이 일어나면서 불경이 영역(英譯)되어 왔는데 금강경의 영역본으로는 막스 뮐러(Max Muller)가 번역한 것과 에드워드 콘제(Edward Conze)가 번역한 것이 유명하다. 모두 Diamond Stura 라고 제명하였다. 한역의 주소 가운데 여러 사람의 것을 합하여 엮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가 단연 백미이다. 이 오가해설의는 조선 초기 함허(涵虛 1376~1433)스님이 금강경오가해에 대해 주석을 붙이면서 설의라고 명명한 것이다. 원래 오가해는 연대순으로 말하면 양나라때 부대사(傅大士이름은 흡(翕) 497~569)이 지은 찬(贊)과 당(唐)의 육조 혜능(惠能 638~713)스님의 해의(解義 일명 구결), 규봉(圭峰 780~841)의 찬요(簒要), 송대(宋代)의 야보(冶父 생몰연대 미상)의 송(頌), 그리고 종경(宗經 생몰연대 미상)의 제강(提綱)을 합해 말하는 것인데 이에 함허가 합본에 주석을 보탠 것이다. 이 오가해 중 가장 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규봉(圭峰)의 찬요(簒要)인데 이는 인도 유식학파(唯識學派)에 속한 무착(無着 Asanga)의 18주(住)설과 세친(世親 혹은 天親이라고도 함 Vasubandhu)의 27단의설(斷疑)설을 계승하여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주석을 하였다. 종밀은 중국 화엄 5조(祖)로 화엄학에 밝았는데 선에도 조예(造詣)가 있어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찬요는 금강경에 대해 인도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을 받아들여 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대사(傅大士)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러한 시대의 배경 탔인지 그는 금강경에 깔려 있는 공사상(空思想)을 노장학(老莊學)의 입장에서 해석한 경향이 있다. 그의 찬(贊)은 선의 풍조를 풍기고 있으며, 따라서 선의 측면에서 금강경을 해석하였다. 야보의 송도 모두 선시(禪詩)라 할 수 있는 송들이다. 부대사의 찬과 마찬가지로 교학적인 냄새가 나지 않고 선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야보의 송은 대부분 착어(着語)를 먼저 붙이고 송을 읊어 때로는 격외(格外)의 선지(禪旨)를 드날리기도 하였다. 육조(六祖)의 구결(口訣)은 매우 간결(簡潔)한 구어체로 현학적(衒學的)인 수식(修飾)이 전혀 없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실천적인 면이 나타나 있다. 인간의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 행위를 모두 자비에 바탕을 두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육조 자신이 오조로부터 법을 전해 받을 때 금강경 강의를 직접 설해 받기도 했다.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은 경의 대의를 파악(把握)해 중요한 요점을 끌어냈다고 해서 제강(提綱)이라 했는데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나눈 32분에 의거하여 요지를 드러낸 반야(般若)의 묘리를 선양했다. 제강(提綱) 역시 교의적(敎義的)인 이론을 떠나 선적(禪的)인 입장에서 경의 대의를 드러내려 했다. 이상의 오가해 들은 규봉의 찬요를 제외하고 모두 선(禪) 의 입장에서 경문을 해석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 오가해는 언제 어디서 편집되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송대 이후에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다만 함허의 서설(序說)과 설의(說誼)가 부가되어 현재의 오가해설의 본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나라 이조 초엽이다. 그리고 이조 성종(成宗) 때에는 금강경삼가해를 엮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오가해 중 야보(冶父)의 송(頌)과 종경의 제강(提綱) 그리고 함허의 설의를 한데 묶은 것이다. 구마라집의 역문에 송(頌)과 제강(提綱)을 맞추어 쓰고 설의(說誼)를 붙여 국문으로 번역을 하였다. 이는 오가해 중 설의를 가장 자세히 한 야부(冶父)의 송(頌)과 종종(宗鏡)의 제강(提綱)을 별도로 간추려 엮은 것이라 내용은 모두 오가해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금강경의 경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소명태자의 32분 분류대로 전문을 나누었다. 법화인유분(法華因由分)에서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형식의 대화로 전개되는데 1분에서 16분까지가 전반이 되고 17분부터 32분까지가 후반이 된다. 이렇게 전후반을 나누는 것은 수보리의 질문에 전반에 나온 것이 후반에 다시 나오므로 편의상 전후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32분 중 경의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는 분을 간추린다면 제 3ㆍ5ㆍ7ㆍ10ㆍ18ㆍ23ㆍ26ㆍ32분의 아홉 분이다.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서는 앞 분 제 2분 선현기청분(善現祈請分)에서 수보리가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샴막삼보리심을 발했을 적에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중생의 망심)을 항복시켜야 하는가 하고 묻자 부처님은 답한다. 첫째 주수(住修)의 물음 ‘어디에 머무를까?’ ‘어떻게 수행할까?’ 에 대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 하려는 원력을 세워 네 가지 마음 곧 광대심(廣大心), 제일심(第一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 에 머물러 육바라밀을 닦아 행하라 하였다. 다음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는가에 대하여서는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되 내가 저들을 제도하였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하면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衆生相)이 있는 자는 보살이 아니다 하였다. 오가해 중 육조의 구결에도 “중생의 불성은 그 근본에 있어서 부처와 다름이 없지만 사상(四相)을 가짐애 따라 무여열반에 들지 못한다. 사상(四相) 이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四相)이 없으면 부처다.” 하였다.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는 32상을 갖춘 부처의 육신이 참 진리의 몸 법신이 아님을 밝히고 참된 불신은 모양이 없다고 설한 뒤 금강경 4구게라는 게송이 나온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제 7 <무득무설분(無得無設分)>에서는 부처님이 정각을 얻은 바도 없고 설한 바 법도 없다 하였다. 제 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서는 청정한 마음으로 외적인 대상에 집착함이 없이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가르친다.(應無所住 而生其心) 제 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서는 부처가 중생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음과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의 마음을 모두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제 23의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에서는 진여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며 그것이 깨달음이고 여래의 선법임을 밝혔다. 제 26의 <법신비상분(法身래非를相分형)>에서는 여래를 형체에 의지하여 보지 말라 하고 “ 만약 형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면 이 사람은 사도를 해하는 것이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하는 4구게가 설해진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부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제 32 <웅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서는 일체의 유위법이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과 같다는 여섯 가지의 비유를 설하여 거짓된 모습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다시 설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금강경과 공사상(空思想)
1) 공(sunya, 空)의 의미 공은 범어 순야(舜若 sunya)를 번역한 말이다. 모든 존재는 고립 독존하는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자아가 없다는 무아설에서 공이란 개념이 성립되었다. 일반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설명되는 말이지만 존재의 본질을 밝힐 때 쓰는 용어이다. 일체 법은 인연 곧 존재하기 위한 조건에 의해서 있기 때문에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성품이 없다(無自性)는 뜻이다. 이는 삼법인(三法印)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무아설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일정한 존재형태의 항존성이 없다는 무상과 연결되어 나온 말이다. 『대품반야경』에 “무상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무상이다.”(無常卽是空 空卽是無常)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공을 잘못 이해하면 허무나 단견(斷見)에 빠지는 병을 얻는 수가 있다. 곧 없다는 무(無)의 뜻으로만 이해하면 무기공(無記空), 편공(偏空),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져 참된 공의 이치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공병(空病)이라 한다. 이 공병은 공하다는 관념에 묶여 공에 집착된 경우를 두고 말한다. 이리하여 공하다는 것도 공한다는 공공(空空)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공도 또한 공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론』의 글에 “모든 것은 공한 것이며, 공한 것 또한 공하다고 보아야 한다.”(普觀諸法皆空 空亦復空) 는 말이 설해져 있다. 공하다는 관념에 빠져 거기에 집착된 것을 다시 파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공은 현상에 집착하는 폐단을 불식시키기고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설하는 것인데, 이 공하다는 생각이 또 하나이 집착이 되어버린다면 공이 도리어 집착의 원인이 되어 애초에 제시한 공의 참뜻이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진공묘유설 (眞空妙有設)이 등장한다. 진공묘유란 참으로 공해진 그 속에 미묘한 진리가 내재하여 공이 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이치를 설파한 말이다 『금강경』 4구게를 두고 다시 말하면 앞의 2구인 “무릇 있는바 형상은 모두 허망하다.”(凡小有相 皆是虛妄)는 말은 진공을 말한 것이요, 뒤의 2구인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한말은 묘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제법을 공으로 볼 때, 공 아닌 본체의 참 진리가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2) 공・가・중 삼관과 入不中道 제법의 이치를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게 하는 관법으로 삼관설이 있다. 천태학 에서는 삼제삼관(三蹄三觀)이라 하는데, 공은 인연으로 생긴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음을 관하는 것이며, 가는 비록 자성이 없는 공한 것이기는 하지만 연기의 차별된 세계는 임시로 나타나 존재하는 이상 공으로만 보지 말고 현상의 경계를 그대로 인정 수용하는 것이다. 중은 공과 가의 양단에 치우치지 않고 공과 가를 회통시키는 것이다. 이 공⋅가⋅중의 개념은 용수보살의 『중론』에 의하여 성립된 개념으로 삼론종이나 천태종 등에서 중요한 이론의 근거를 삼았다. 공관은 만유현상을 거울에 나타난 허상처럼 보는 것이고, 가관은 거울에 나타난 허상이 비록 실물이 아니나 보는 이의 시각에 들어와 차별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 허상이 허상대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별의 허상을 그대로 인지하는 것이다. 중관은 공관과 가관을 종합하여 융통시켜 보는 것이므로, 공관이나 가관의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관이다.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여덟 가지 부정을 통해 공의 이치와 중도를 설하는 팔불설을 세웠다. 이는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상(不常), 부단(不斷),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거(不去), 불래(不來)로 공을 설명하면서 상대적 양변을 모두 여읜 중도를 나타낸 설이다.
3) 아공 법공 구공의 삼공 (破二執 現三空) 아공은 중생이 개체적 존재의 실체를 부정하는 말로 인무아(人無我)가 달리 표현된 말이다.인간의 경우 곧 오온의 화합물인 것을 나라고 집착하는 그릇된 소견을 파하는 말로써 주관적 상태의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법공은 개관적 상황의 실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법무아(法無我)를 달리 표현한 말로 주관에 인식되어지는 대상 자체가 공하다는 것을 설하여 경계에 집착하는 그릇된 소견을 파한다. 구공은 아공이나 법공에 집착하는 소견을 금기하여 아공도 공하고 법공도 공하가고 둘을 다시 부정하여 공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이 역시 중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4) 석공(析空)과 체공(體空) 석공은 연기하여 일어난 현상은 어떠한 것도 다른 것을 의지해 일어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불과하므로 개아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공이다. 다시 말해 인연에 의하여 나타난 가상(假相)이므로 결국 그 가상을 분석해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중론(中論)에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設卽是空),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라는 게송이 설해져 있다. “인연에 의해 생긴 법은 나는 공한 것이라 말하며 또한 거짓 이름에 불과한 것이며, 또한 중도의 뜻이라고 말한다.” 체공은 모든 존재는 실상에 자리에서 볼 때는 아예 있는 것이 아닌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가유의 현상마저도 부정하여 가상의 존재 의미마저 빼앗아 버리는 공이다. 가령 사람이 어떤 사물의 물체를 볼 적에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나 색깔 따위가 사람의 눈에만 그렇게 보여 질뿐 다른 짐승들의 눈에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여 지지 않는다면 그 사물의 물체가 어떤 고정된 모양이나 색깔이 없다는 것이다.
제 7 강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논서(論書)이다. 대승경전에 설해져 있는 모든 사상을 종합적으로 회통하여 체계적인 논리를 세워 대승의 본질을 밝혀 놓았다. 불교의 전적(典籍)들이 대부분 번거로운 문체에 지루한 설명들이 많아 핵심 대의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경향이 있으나 대승기신론은 그렇지 않다. 간결하면서도 논리 정연하게 전개해 나가는 문답식 내용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며, 불법의 심오함을 마음 깊이 느끼게 한다. 저자 마명(馬鳴)은 범어 이름이 아스바고오사(Asvaghosa)로 생몰연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나 대체로 불멸 후 600년경에 출현한 사람이라 한다. 그는 원래 브라만의 대학자로 그 총명이 널리 알려졌던 사람인데 당시 인도의 학문 중심지였던 마가다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불교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끝에 지고 나서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그가 대승기신론을 지은 것은 불교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며, 이로 인해 대승사상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아직 범어 원전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한역본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제(眞諦Pramartha:499~569A.D)가 번역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실차난타(實叉難陀Siksananda: 652~710A.D)가 번역한 본이 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논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일심을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또한 일심이 가진 특성을 체(體), 상(相), 용(用)의 삼대의 이론을 전개하여 궁극적으로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게 하며 나아가 실천적 행(行)을 닦도록 한 것이 중요 내용이다. 특히 일심의 설명은 기신론 특유의 독창적인 논리를 전개하면서 명쾌한 분석을 가하고 있다.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귀경술의(歸敬述意)의 게송이 서두에 설해지고 다음 본론에 해당되는 정입론체(正立論體)의 대목이 있으며 마지막에 총결회향(總結廻向)의 부분으로 전문이 구성되어 있다. 정입론체의 대목이 다시 논을 지은 이유를 밝히는 인연분(因緣分)과 논의 주제를 제시하는 입의분(立義分), 제시된 주제를 자세히 풀이하는 해석분(解釋分), 어떻게 마음을 내어 수행할 것인가를 밝힌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그리고 수행을 권하고 그 이익을 말하는 권수이익분(勸受利益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논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심오하면서도 포괄적이다. 불교사상의 양대 조류라 할 수 있는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이 포함되어 있고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까지 조화되어 있다. 논이란 대개의 경우 특정 경전에 대한 논술이라는 일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기신론의 경우에는 어느 특정한 경전에 국한시켜 논해 놓은 내용이 아니고 대승의 요지를 두루 포괄적으로 논했다 할 수 있다. 물론 『능가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여 『능가경』의 별신서(別伸書)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승의 대의를 독특한 논리를 전개하여 종합적으로 논했다는 것이다. 일심을 의지하여 두 문을 열어 대승의 법(法)과 의(義)를 설명한 것이 『기신론』의 대의이다. 예로부터 이것을 의일심 개이문(依一心 開二門)이라 표현해 왔다. 고래로 이 논서에 대한 주석서가 많이 나와 무려 190여 종에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의 삼국에서 역대로 수많은 주소가(註疏家)들이 나왔던 것인데 이 중 일본에서 나온 주석서가 150여 종에 달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가장 많이 읽혀온 주석서는 우리나라 신라 때 원효스님이 쓴 기신론소(起信論疏 일명 海東疏)와 중국의 현수법장(賢首法藏) 스님이 저술한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와 역시 중국의 정영혜원(淨影慧遠) 스님이 쓴 기신론소(起信論疏)가 있다. 이를 3대소라 한다. 또 서양에 소개된 영역본도 있는데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쯔의 영역본과 하케다의 여역본 『The awakening of faith』가 있다.
기신론의 주제는 대승(大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승은 범어로 마하야나(mahayana)라 하는데 음사하여 마하연(摩訶衍)으로 표기한다. 이 마하연을 법(法)과 의(義)로 설명해가면서 이 마하연을 바로 알게 하고 이 마하연을 바르게 믿게 하는 것이 기신론의 내용이다. 저자 자명은 서두에 마하연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일으키게 하는 법이 있어 이를 소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이 마하연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중생의 마음이라고 선언한다. 인연분 첫머리에 「論曰 有法能起摩訶衍信根일새 是故 應說이니라.」라는 본문의 구절이 있고 또 입의분의 본문에 법과 의를 다음과 같이 밝혀 설명하였다.
소언법자 위중생심 시심 즉섭일체세간출세간법 의어차심 「所言法者는 謂衆生心이니 是心이 卽攝一切世間出世間法이라 依於此心하야
현시마가연의 하이고 시심진여상 즉시마가연체고 顯示摩訶衍義하나니 何以故오 是心眞如相이 卽是摩訶衍體故며
시심생멸인연상 능시마가연 자체상용고 是心生滅因緣相이 能是摩訶衍의 自體相用故니라
소언의자 칙유삼종 운하위삼 일자 체대 위일체법 所言義者는 則有三種하니 云何爲三고 一者는 體大니 謂一切法이
진여평등 부증감고 이자 상대 위여래장 구족무량성공덕고 眞如平等하야 不增減故요 二者는 相大니 謂如來藏이 具足無量性功德故요
삼자 용대 능생일체세간출세간선인과고 일체제불 본소승고 三者는 用大니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라 一切諸佛이 本所乘故며
일체보살 개승차법 도여래지고 一切菩薩이 皆乘此法하야 到如來地故니라.
위의 본문에서 삼대를 설명하였다.
심진여자 즉시일법계대총상법문체 소위심성 불생불멸 心眞如者는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니 所謂心性은 不生不滅이니라.
일체제법 유의망념 이유차별 약이심념 一切諸法이 唯依妄念하야 而有差別이니 若離心念하면
칙무일체경계지상 則無一切境界之相이니라.
시고 일체법 종본이래 이언설상 이명자상 이심연상 是故로 一切法이 從本以來로 離言說相하며 離名子相하며 離心緣相하야
필경평등 무유변이 불가파괴 유시일심 고명진여 畢竟平等하야 無有變異하며 不可破壞라 唯是一心일새 故名眞如니라.
위의 본문에서는 진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 이 진여를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의언진여(依言眞如)로 설명하고 있고 의언진여를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로 설명한다. 심생멸(心生滅)을 설명하면서 아려야식을 이야기 한다.
심생멸자 의여래장고 유생멸심 소위불생불멸 여생멸 心生滅者는 依如來藏故로 有生滅心하니 所謂不生不滅이 與生滅로
화합 비일비이 명위아려야식 和合하야 非一非異를 名爲阿黎耶識이니라.
아려야식에 각(覺)과 불각(不覺)이 들어있고 각의 정의를 마음에 망념이 떠나간 것(心體離念)이라 하고 이것이 바로 여래의 평등법신이며 본각(本覺)이라 한다 하였다. 이 본각을 수행을 통해 회복해 가는 과정을 시각(始覺)이라 하며 이 시각에 4위(四位)가 있어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을 설한다. 마음에 망념이 떠나간 자리를 무념(無念)이라 하고 『능가경』의 말을 인용 무념을 관하는 자는 부처님 지혜로 향하는 것이 된다 하였다.(若有衆生 能觀無念 卽爲向佛智故) 중생이 비록 오염된 환경에 처하고 있지만 누구나 본각을 갖추어 있으며 이 본각을 수염본각(隨染本覺)이라 하고 여기에 지정상(智淨相)과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의 두 뜻이 있다 하였다. 또 본래의 깨끗한 성품 그대로의 각을 성정본각(性淨本覺)이라 하는데 이것을 네 가지 거울의 모습으로 설명하여 여실공경(如實空鏡), 인훈습경(因薰習鏡), 법출리경(法出離鏡), 연훈습경(緣薰習鏡)이 있음을 밝힌다. 깨닫지 못한 상태 곧 불각을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나누어 설명하고 근본불각 곧 무명(無明)을 정의하여 여실히 진여법이하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상태의 마음이 이어나는 것이라 하였다.(不如實知眞如法一故 不覺心起而有其念) 지말불각의 설명에는 세 가지 미세한 상태와 여섯 가지 거친 상태의 업의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이 있다. 이를 삼세 육추(三細六麤)라 하며 혹은 구상차제(九相次第)라 한다. 삼세는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이며 육추는 지상(智相), 상속(相續), 집취(執取), 계명(計名) 조업(造業), 수보(受報)이다. 다음 여섯 가지 물든 마음(六染心)의 이야기가 나온다. 맑고 깨끗한 진여의 마음이 무명에 의하여 흔들리어 오염의 양상을 띠는 것을 상응하는 모습과 상응하지 않는 모습으로 설명한다. 이에 여섯 단계가 있어 미세한 상태에서부터 점점 거칠어 가는 과정의 물든 마음이 있는데 이것들이 어떤 수행의 지위에서 끊어지는가 하는 것을 밝힌다. 물든 마음이란 물든 생각으로 망념이 일어난 원초적인 상태에서 사팽적인 생각이 되어 그 농도가 짙어가는 것을 여섯 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삼세(三細) 육추(六麤)의 구상차제(九相次第)에서 기업상(起業相)과 업계고상(業繫苦相)을 제외한 칠상(七相)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다. 육염의 불상응염은 삼세의 업상, 전상, 현상에 해당하고 상응염은 지상상, 상속상, 집취, 계명자상에 해당한다. 다만 게명자상과 집취상은 두 상이 집상응념을 이루는 것이다. 상응염은 주객이 나누어진 이후의 거친 모습으로 나타나는 파생적인 생각이라면 불상응염은 미세한 원초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이 상응하는 지위(信相應地)란 보살의 수행단계 중 10주의 지위를 말하고 마음이 깨끗해진 지위(淨心地)는 10지의 초지 환희지(歡喜地)를 말한다. 수행의 지위가 높아갈수록 물든 생각이 거친 파생적인 것에서 미세한 원초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떨어져 나간다 한다. 상응이란 생각하는 주체인 마음(이를 심왕(心王)이라 한다.)과 생각되어지는 대상인 객체(이를 심소(心所)라 한다.) 가 동일성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불상응이란 그렇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신론』중생의 마음이 훈습되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훈습을 나누어 이야기 하고 있지만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고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경우를 설명한다. 그 중 망심훈습에 두 가지가 있고 진여훈습에 두 가지가 있다. 망심훈습의 분별사식훈습은 상황을 분별하는 식이 훈습하는 것으로 범부나 성문, 연각의 수행자들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능력 따라 점차 도에 나가는 것과 또 의훈습이 있는데 이는 보살들이 용먕스럽게 발심해서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진여 훈습도 둘이 있는데 자체상훈습과 용훈습이다. 자체에서 훈습되는 것이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소모되지 않는 법을 갖추어 불가사의한 활동력을 발휘, 경계를 만드는 성질이 있다. 진여의 작용에 의해 훈습된다는 것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 발휘되는 응력인데 이에 차별연과 평등연이 있다. 대승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으로 설명하는데 세 가지 발심을 이야기 한다.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과 해행발심(解行發心) 그리고 증발심(證發心)이다. 신성취발심은 진여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직심(直心)과 일체 선행을 모으기를 좋아하는 심심(深心) 그리고 일체 중생의 고통을 뽑아주려는 대비심(大悲心)을 발하는 것이요, 해행발심은 신성취발심이 더욱 나아져 진여의 법이 바르게 이해되고 수행에 상을 여의어 육바라밀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단계의 발심이다. 또 증발심은 정심지 곧 보살수행위의 초지 환희지부터 마지막 지위 법운지에 있는 법신보살들이 법신을 증득하는 단계의 발심을 말한다. 이 보살들이 발심한 상태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양상이 있다. 참된 마음으로 분별이 없어지고(眞心) 자연스럽게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방편심과 미세한 업식심이다. 이러한 발심을 통해 네 가지 믿음을 일으켜 수행해 나간다. 이를 4신 5행이라 한다. 네 가지 믿음은 진여를 즐겨 생각하는 것이 근본이 된다 하여 근본 곧 진여를 믿는 것을 먼저 말하고 다음 부처님은 한량없는 공덕을 있다는 것을 믿고 항상 친근 공양하여 선근을 일으켜서 일체 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또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고 항상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신 법보며, 수행자가 바른 수행을 해서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함을 믿는 것이다. 육바라밀을 『기신론』에서는 5행으로 말한다. 선정과 지혜를 지관(止觀)으로 묶어 이의 수행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자(六字) 공부를 제시하여 정토왕생이 가능하다는 나무아미타불 염불문을 제시하면서 수행의 방편을 설해 마친다. 또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10선(十善)을 행하게 하드라도 밥 한끼 먹는 사이 이 논의 대승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제불심심광대의 아금수분총지설 회차공덕여법성 諸佛深心廣大義을 我今隨分總持說하였나니 廻此功德如法性하야
보리이익일체중생계 普利利益一切衆生界하야지이다.
제 8 강 아 미 타 경(阿 彌 陀 經) 『아미타경』은 정토신앙의 근본경전이다. 물론 『아미타경』외에도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을 합하여 정토삼부경이라 하여 정토종의 소의경전을 삼는다. 이 경은 극락세계에 대하여 설해 놓은 경으로 아미타불 염불에 의하여 누구든지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고 설해 놓았다. 이 경의 한역이 3가지가 있었으나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이 널리 유통되어 많이 읽히고 있다. 현장이 번역한 『칭찬정토불섭수경』과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불설소무량수경』의 3역이 있었으나 『불설소무량수경』은 이름만 남아 있고 역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내용이 길지 않아 모두 1권으로 되어 있다. 『아미타경』은 『무량수경』내용을 간략히 줄여 놓은 경으로 범어명은 똑같이 수카바티 뷰하 나모 마하야나 수트라(Sukyavati vyuha namo mahayana sutra)이다. 이다, 무량수경을 대경(大經)이라 하고 아미타경을 소경(小經)이라 한다. 이 경은 부처님이 제자들의 질문이나 청에 의해서 설한 경이 아니고 스스로 자진하여 설한 경이라 해서 12부경의 분류에서는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라 한다. 부처님이 극락세계에 대하여 스스로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아미타경』에는 극락세계가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 있으며 그곳에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면서 항상 설법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극락에는 일체의 고통이 없으며, 자유롭고 안락하여 무한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하여 극락이라 하며 이 극락을 때로는 안락국으로 표기하고 정토, 낙장(樂邦) 또는 안양(安養)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음사할 때는 소가마제(須呵摩提), 수마제(須摩提)라고 한다. 원래 불교의 정토설에는 3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미륵보살이 게시는 도솔천을 정토로 보는 설과 아촉불이 계시는 묘희국(妙喜國)을 정토로 보는 설과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를 정토로 보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 가운데 후대에 와서 정토신앙으로 정착되어 염불 수행자를 많이 배출시킨 것은 극락정토 신앙이다. 인도에서는 묘희국 정토신앙이 한때 왕성한 적이 있었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선 아미타불 신앙에 의한 극락정토 사상이 주를 이루었다. 이 극락정토는 불교의 신앙적 이상세계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내세위주의 신앙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경에서는 사람이 임종시에 아미타불 염불을 열 번만 하여도 극락왕생이 가능하다 하였다. 아미타란 영원한 생명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무량수(無量壽) 혹은 무량광(無量光)이라 번역한다. 삼신불 설명에서는 보신불이지만 일반적으로 극락 교주라 하여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라 한다. 이 『아미타경』도 19세기 이래 서양에도 소개되어 연구가 많이 되었으며, 막스․ 뮐러(Max Muller)와 일본의 오기하라․ 운라이 등은 교정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극락을 서방정토라고 하는 『아미타경』의 말은 죽은 후의 내세를 의미하는 뜻에서 서방이라 한다. 해가 뜨는 동쪽을 태어나는 곳으로 보고 해가 지는 서쪽을 죽는 곳으로 본다는 당대 도작(道綽)이 지은 『안락집』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미타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사리불, 목건련, 가섭, 가전연, 구치라, 이바다, 주리반타가, 난타, 아난타, 나후라, 교범바제, 빈두로파라타, 가류타이, 겁빈나, 박구라, 아누루타 등 16제자 (이를 미타 16라한 이라 한다)와 문수보살, 아일다보살, 건타하제보살, 상정진보살 등 보살들이 있는 가운데서 아미타 부처님과 극락세계에 대해 설명을 한다. 부처님이 설한 극락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1. 서방으로 십만억 불토를 지나서 극락세계가 있으며 이 세계에 아미타 부처님이 현재에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 2. 그 세계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고 온갖 즐거움만 누린다. 3. 극락세계에는 7보의 못과 8공덕의 물이 있다. (물의 8공덕은 고요하고, 깨끗하고, 차고, 맑고, 달고, 부드럽고, 윤택하고, 편안한 것을 말한다.) 4. 극락세계에는 황금으로 땅이 되어 있고 항상 천상의 음악이 들리며, 7보로 된 나무가 가득하며 미묘한 소리를 내 듣는 이로 하여금 불․ 법․ 승 삼보를 생각하게 한다. 5. 천상사람들이 주야 육시로 만다라화 등으로 공양한다. 6. 백학 공작 가릉빈가 등 온갖 새들이 법을 설한다.
7. 아미타불의 수명은 영원하고 광명은 무량하며 성불한지가 10겁이 지났다. 8. 극락국토에 태어난 중생은 모두 물러나지 않는 신심을 일으키는 아비발치며 일생보처이다. 9. 극락국토에는 누구든지 1일이나 7일간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가서 태어날 수 있다. 10.『아미타경』은 일체 제불이 호념(護念)하는 경이다.
이상의 『아미타경』의 요약된 내용은 정토부 경전에서 거의 비슷하게 설해져 있다. 정토신앙의 특징은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는 타력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선종이 공안 타파나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통하여 견성하여 성불하는 자력수행이라면 염불로 왕생을 염원하는 정토는 타력신앙이라고 말해왔다. 대승경전의 전체 양이 650여부에 이르는데 이중 정토경전이 약 200부에 달한다. 이는 정토가 대승불교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찍이 당의 도작이(道綽)이 불교의 수행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나누어 정토문을 주장하면서 염불을 닦아 정토에 왕생하기를 권하면서 이를 쉽게 가는 길 곧 이행도(易行道)라 하였다. 이 이행도가 난행도보다 수행을 빨리 성취하는 지름길이라 하였다. 이 정토사상의 연원은 인도의 용수(龍樹)와 세친(世親)에서 비롯된다. 용수는 『십주비바사론』에서 일체 교설을 의지한 자력수행을 난행도(難行道)라 하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 염불수행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이행도라 하였다. 세친은 『정토론』을 지어 예배․ 찬탄․ 발원․ 관찰․ 회향의 염불문을 닦아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한다 하였다. 중국에서는 강승개(康僧鎧)가 『무량수경』을 번역한 것이 효시가 되어 정토경전이 번역 소개되기 시작하여 정토경전의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중 선도(善導)대사의 <관경소>가 유명하다. 혜원(慧遠)이나 자민(慈愍) 같은 정토의 거봉들이 있었으나 정토사상을 완성한 인물을 후대에 와서 선도로 꼽는다. 선도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염불삼매를 닦았다 하며 이 선도의 정토법맥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토의 새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 정토종을 개창한 법연(法然)은 오로지 선도의 법을 절대적으로 신앙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원효, 경흥, 현일, 의적, 태현, 신방 등에 의하여 정토불교가 전개되었다. 특히 신라 경덕왕 때의 발징(發徵) 화상은 원각사(지금의 건봉사)에서 미타만일회를 결성 지성으로 염불수행을 하다가 원성왕 때 같이 정진하던 도반 31명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요즈음도 법문을 하다가 설법주가 게송을 읊고 대중이 나무아미타불을 따라 합창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이 발징 스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 정토사상은 말법시대의 중생의 근기가 하열해졌을 때 자력수행의 어려움을 절감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찾다가 고안되어 나온 특별수행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선도는 염불수행에 있어서 자신이 말세에 태어난 죄악중생임을 믿고 염불하여야 한다고 <관무량수경소>에서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중생이 어떤 극한상황에 처하여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어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업장이 두껍다는 것을 의식하고 출발하는 대승의 새로운 수행법이다. 또 왕생이란 예토에서 정토로 간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은 다음의 사후의 일을 정토왕생을 이룸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승의 반야사상에서 볼 때는 일체가 모두 공하여 갈 데도 없다는 주장을 할 수가 있다. 정토와 예토가 모두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유심정토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 바로 반야사상과 정토사상을 회통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다. 정토는 바로 삼신불 가운데 보신이 머무는 보토(報土)이므로 시공을 초원하여 있다. 따라서 정토와 예토가 동일한 공간 속에서 주관적인 심식의 차이로 느껴지는 것으로 본다. 이러므로 정토 속에도 중도의 이치가 천명되며 담란이 주장한 것처럼 가지 않으면서 가고 태어나지 않으면서 태어나는 불가사의한 왕생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란 마음에서 일체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세계를 상징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제 9 강 육 조 단 경(六 祖 壇 經)
1 『육조단경』은 중국 선종의 6대조사 대감혜능(大鑑慧能638~713)선사의 법문을 수록해 놓은 책이다. 제자 법해에 의해 집록된 이 책은 중국 선종사에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는 선서(禪書)로 5가 7종의 법이 모두 단경으로부터 나왔음은 물론 후대의 선불교를 지배하는 이념적 근원이 되는 책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인긴 하나 실제적인 선의 정착은 육조 혜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남긴 이 단경이 선법을 펴는 지침이 되었으며, 아울러 선불교를 확장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단경은 육조 혜능대사가 대범사의 강당에서 소주자사 위거(韋璩)등 청중을 위하여 설한 법문이다. 마치 육성이 울려 대중을 감동시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박진감 있는 설법이 담겨져 있다. 경(經)이란 본래 부처님 말씀으로 선의 상대적인 교(敎)에 해당되는 말이다. 일체 경전이 바로 교인데 이 교 밖에 있는, 경 아닌 경이 단경이다. 왜 ‘경’자를 붙였느냐에 대해서도 이설이 있지만 어떤 교가의 경전보다 후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불교가 주류를 이루어 온 중국불교사에 있어서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단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은 것이다. 참고로 1989년에 중국 무한(武漢) 대학교 출판부에서 기획 출판한『중국을 움직인 30권의 책』원명『影響中國歷史的三十本書』이 있는데 5 ․ 4 운동 7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책 중 30권(실제33권)의 고전 및 명저를 뽑아 그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 되었으며,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불교관계의 서적은 오직『육조단경』만 들어갔을 뿐이다. 우리나라보다 무려 300여년 앞서 200년 가까운 불교역사 속에서 불경이 아닌 선어록에 해당하는 『육조단경』만이 유독 학자들의 선택에 의해 뽑혔다는 사실도 단경의 위치를 말해 주는 한 예가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의 주요 내용은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설해 주는 것이다. 단(壇)은 바로 계를 설하는 단상을 뜻한다. 그리고『경(經)』은 반야바라밀경의 경자를 차용한 것이다. 곧 단경에 설해져 있는 법문은 반야바라밀경의 법문이고 무상계라고 말한 대승의 보살계 법문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단경은 다섯 가지 이본(異本)이 있다. 종보본(宗寶本)과 덕이본(德異本)은 모두 『육조대사법보단경』이라 제목이 되어 있으며, 대승사본(大乘寺本)은『소주조계산육조사단경』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흥성사본(興聖寺本)은 그냥『육조단경』이라 하였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돈황본(敦煌本)은『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시법단경(南宗頓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密經六祖慧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이라는 긴 이름으로 되어 있다. 돈황본은 10세기 경에 쓰여진 필사본이다. 그리고 가장 뒤에 이루어진 본이 종보본이다. 지금까지 종보본이 가장 많이 유통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덕이본이 고려시대부터 많이 유통되었다. 근래에 와서 다시 돈황본에 의한 육조단경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돈황본의 제목을 풀이해 보면 ‘남종의 돈교인 가장 으뜸가는 반야바라밀경(법), 육조혜능대사가 소주 대범사에서 법의 단을 베푼 경’ 으로 이중 이름이 겹쳐져 있는 이름이다. 이는 단경의 두 가지 내용을 나타내는 말이다. 앞의 말은 반야바라밀법을 가리킨 것이고 뒤의 말은 무상계(無相戒)를 뜻한다. 이 돈황본의 제목은 단경의 성격을 잘 규정해 놓았다. 먼저 남종을 천명하고 돈교를 천명한 것은 육조의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놓은 말이다. 점수를 돈오의 종지를 무엇보다도 강조하기 위하여 남종돈교라 한 것이다. 물론 돈교라는 말은 교가에서 교상판석을 할 때 쓰는 용어다. 그러나 육조의 돈교는 교상판석의 돈교가 아니다. 돈황본에서 타본과 다르게 표현된 구절 가운데 “오직 돈교의 법을 전해서 세상에 나와 그릇된 종을 부순다.” 다른 본에는 돈교법을 견성법(見性法)이라 하였다. 결국 돈교법이 견성법인데 ‘돈(頓)’자를 쓴 것은 견성을 돈오를 통해 하므로 견성돈오교법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이 돈오 돈법이 단경의 지침이요 대의라 할 수 있다.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만 쓰면 바로 부처가 된다. (菩提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 단경의 4구게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에서도 돈오의 종지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는 말이 생겼듯이 점수를 배격하는 돈오의 종지를 남종(南宗)이라 하여 돈황본 제명에서는 이를 먼저 천명해 놓은 것이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돈황본 단경을 편역 해석한 성철스님의 강의본에는 단경의 지침을 7가지로 요약해 놓았다. 첫째 식심견성(識心見性)이라 하여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는 것을 단경의 첫 번째 지침이라 하였고 두 번째가 내외명철(內外明徹)로 안팎이 사무쳐 밝아야 참된 견성의 경계라 하였다. 세 번째 지침은 유전돈법(唯傳頓法)으로 점수를 배격 오직 돈오법만 전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무념위종(無念爲宗)으로 무념의 상태가 되어야 올바른 종(宗)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다섯째는 정혜일체(定慧一體)로 정과 혜가 한 몸이라는 것이다. 여섯째는 무생서방(無生西方)으로 태어남이 없는 것이 극락이라 하였고 일곱 번째는 불오염수(不汚染修)로 물듦이 없이 닦는 것이 진정한 닦음이라 하였다. 이는 단경의 대의를 개괄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2 단경의 주요법문은 반야바라밀법이다. 그런데 이 반야바라밀의 법상(法相)은 상(相)이 없는 무상(無相)이다. 반야바라밀의 법이란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수정주의적인(修定主義的)인 정적(靜的)인 입장에 치우친 종래의 선관을 탈피 좀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선 본래의 취지를 동적인 방향으로 선양하기 위하여 차용된 말이다. 물론 반야부 경전에 누누이 설해져 나오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을 육조의 선관에 새롭게 도입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좌선만 능사로 하는 선의 방법에 대한 비판도 함께 들어 있다. 또 반야는 일반적으로 지혜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주객이 나눠진 경계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깨달음의 본성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며 동시에 수행의 완성된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함허(涵虛)스님의『금강경오가해설의』에는『임제록』의 글귀를 인용 반야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째서 지혜라 하는가? 허공은 법을 설할 줄도 모르고 들을 줄도 모르고 사대(四大)도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알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훤히 홀로 밝아 아무 모양 조각이 없는 것이 능히 법을 설하고 법을 듣는다. 이 설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한 조각 홀로 밝은 것이 천지를 비추고 고금에 빛나니 이제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어느 때 어디서든지 훤히 신령스럽게 막힘없이 항상 알아차리니 이렇기 때문에 반야라 한다.” (何名爲智慧 虛空不解說法聽法 四大不解說法聽法 只今目前歷歷孤明 勿形段者 能說法聽法也 此說聽底一段孤明 輝天鑒地曜古騰今 行住坐臥語黙動靜 一切時一切處 昭昭靈靈 了然常知 此所以得名爲般若也) 하였다. 이는 바로 심체(心體)의 각성(覺性)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반야를 경전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능엄경』에서는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원각경』에서는 원각(圓覺).『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眞法界) 등으로 부른다.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니 하는 것도 바로 반야 그 자체를 달리 부르는 말일 뿐이다. 단경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반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선지식들이여,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견성을 해야 한다. 선지식을 만나 깨달으면 지혜를 이루게 되느니라.” (善知識 菩提般若之智 世人本自有之 卽緣心米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示導見性 善知識遇悟卽成智) 그런데 이 반야를 다시 논해 감에 있어서 먼저 정․혜를 논하고 무념을 논하고 좌선을 논해 가면서 무상의 이치를 가지고 내용을 말해 나간다. 따라서 무상이 들어가지 않으면 반야가 설명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므로 반야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상이며, 반야바라밀 법문이 곧 무상법문인 것이다. 성철스님의 편역본의 제 8 무념장(無念章)에 보면 “선지식들이여. 나 자신의 법문은 예로부터 모두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로 근본을 삼느니라. 무엇을 무상이라 하는가? 무상이란 상(相)에서 상을 떠난 것이다. 무념이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지만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일체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인다 하고 일체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물지 아니하면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선지식들이여, 밖으로 일체 상을 여의는 것이 상없는 것이다. 다만 상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상이 없는 것으로 바탕을 삼느니라. 일체 경계 위에 물들지 않는 것이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자기의 생각(주관) 위에서 경계(객관)을 떠나고 법(객관) 위에서 생각이 나지(주관) 않는 것이니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으면 다른 데서 남을 받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들은 마음을 써서 법의 뜻(경계를 통해 일어나는 생각)을 쉬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있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이상은 반야의 내용을 설명한 것으로 무념과 무상과 무주로써 반야바라밀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금강경의 내용과 상통하는 것으로『단경』의 법문이 금강경의 대의를 차용한 법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지식의 인용차원에서 따온 것은 아니다.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로 알려진 “무릇 있는 바 모양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모양을 모양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말과 “무상이라는 것은 상에서 상을 여의는 것”(無相者於相而離相)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다. 또 육조스님의『금강경해의』서문에 보면 “무릇 금강경은 무상으로 종(宗)을 삼고 무주로 체(體)를 삼고 묘유로 용(用)을 삼으니 달마가 서쪽에서 오고부터 이 경을 뜻을 전해 사람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달아 성품을 보게 하였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성품을 보지 못하므로 견성하는 법을 세우나 만약 세상 사람들이 진여의 본체를 보아버리면 법을 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라 하였다. 물론『단경』에서는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 하고『해의』서문에서는 무상으로 종을 삼고 무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 하여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실은 무념 ․ 무상 ․ 무주가 서로 같은 개념의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는 말인 점에서 볼 때 이 역시 서로 상통하는 말인 것이다. 이 무념 ․ 무상 ․ 무주의 무자(無字) 법문이 결국 무소득(無所得) 법문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대승법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조 혜능의 사상도 바로 이 무념 ․ 무상 ․ 무주로 요약되며, 이것이 합쳐져서 돈오종지를 이룬 것이다. 말하자면 돈오(頓悟)하기 위해서는 무(無)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오를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의『돈오입도요문론』에서는 이렇게 정의해 놓았다. “돈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애는 것이요, 오란 얻은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頓者頓除妄念 悟者悟無所得) 이 말에서 무소득을 깨닫는다 한 것이 바로 무념 ․ 무상 ․ 무주의 대의이고 바꾸어 말하면 교학에서 말하는 무자성(無自性)의 이치 혹은 공(空)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대의를 “두 가지 집착을 깨뜨리고 세 가지 공을 나타낸다.” (破二執現三空)고 표현해 왔는데 두 가지 집착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며 세 가지 공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그리고 공했다는 것 마저 공해진 구공(俱空)을 말한다. 또『화엄경』의 게송에 “일체의 법이 자체 성품이 없는 줄 알아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아버리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말들이 대승의 무소득의 대의를 함축하고 있다. 『단경』의 반야바라밀법문이 법 그 자체로서는『금강경』의 반야바라밀 법문이다. 이 반야바라밀 법문을 깨닫는 순간에 주안점을 두어 선리적(禪理的) 색채로 나타낸 것이 돈오법문이다. 일찍이 출가 전의 혜능이 나무를 팔고 객주점에서『금강경』독송을 듣다가 “응당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 (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에서 마음이 열려 발심출가 했다는 고사나 신수(神秀)의 게송을 반박하는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다” (菩提本無樹)라고 별도의 게송을 지었다는 설화 등이 무자(無字)를 차용한 돈오종지의 법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무상계로 설해진『단경』의 법수행상(法數行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