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최용현(수필가)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스리랑카 출신의 캐나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의 동명소설을 각색하여 영국 출신의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1996년에 연출한 영국과 미국의 합작영화이다. 밍겔라 감독은 2008년 편도선수술의 후유증인 과다출혈로 54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한창 능력을 펼칠 나이이고 거장으로 우뚝 설 재목이라는 점에서 참 아쉽고 안타깝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온몸의 극심한 화상으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환자가 야전병원을 전전하다가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실려 온다. 국적도 신분도 이름도 잃은 채 그냥 영국인 환자(The English Patient)로 불리던 그는 간호사 한나(줄리엣 비노슈 扮)가 책을 읽어주는 등 헌신적으로 보살펴주자, 자신의 비밀스러운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헝가리 태생의 지리학자이며 탐험가인 알마시 백작(랄프 파인즈 扮)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지리학회의 일원으로 카이로 사막에서 항공지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동료의 부인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扮)과 가깝게 지내면서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녀 역시 알마시에게 끌리면서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불륜의 늪에 빠진다.
두 사람의 밀회를 알고 노심초사하던 캐서린의 남편(콜린 퍼스 扮)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긴 채 캐서린을 쌍엽기에 태우고 사고를 위장하여 알마시를 죽이려고 저공비행을 하다가 알마시의 텐트 바로 앞에서 쌍엽기와 함께 곤두박질친다. 남편은 즉사하고 캐서린은 갈비뼈와 팔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데, 알마시는 간발의 차이로 화를 면한다.
알마시는 캐서린을 안고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동굴로 가서 바닥에 누이고 그 옆에 모닥불을 피운다. 그리고 책 한권과 손전등, 먹을 것과 물을 남기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해.’ 하면서 구조를 요청하러 떠난다. ‘꼭 돌아온다고 약속해줘요.’ 하고 말하는 캐서린에게 알마시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시간이 흐르고 모닥불이 꺼지자, 캐서린은 어두운 동굴에서 온몸을 마구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견뎌내며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추위에 떨면서 연인을 기다린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상체를 일으킨 캐서린은 희미한 손전등 아래에서 편지를 쓴다.
그 시간, 알마시는 사흘밤낮을 걸어서 한 부대에 도착하지만 스파이로 몰려 호송 중에 탈출을 하고, 또 자신이 만든 북아프리카 항공지도를 독일군에게 파는 등 천신만고 끝에 쌍엽기를 조종하여 동굴로 돌아온다. 그러나 캐서린은 한 장의 편지를 남기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죽은 캐서린을 좌석에 앉히고 사막 위를 날아가던 쌍엽기는 적군의 총탄에 맞아 기체에 불이 붙은 채 추락한다. 수도원에 실려 온 알마시는 중화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매일 모르핀 주사로 버텨내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한나에게 자신을 안락사 시켜달라고 부탁한다. 한나는 울면서 남은 모르핀을 한꺼번에 주사하고 ‘My darling, I’m waiting for you.’로 시작되는 캐서린의 편지를 읽어주면서 영화가 끝난다.
내 사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둠 속에 있던 게 하루인가요, 일주일인가요?
이제 불도 꺼지고, 그래서 너무 추워요.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거기엔 해가 비추고 있을 텐데….
그림들을 보다가 이 편지를 쓰느라 전등을 너무 허비했나 봐요.
우린 죽어요. 죽어가요. 많은 연인들과 사람들이,
우리가 맛본 쾌락들이, 우리가 들어가 강물처럼 유영했던 육체들이,
이 비참한 동굴처럼 우리가 숨었던 두려움이,
이 모든 자취가 내 몸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권력자들의 이름으로 그어진 국경선이 아닌, 우리가 진정한 국가예요.
당신이 돌아와 날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나가겠죠.
지도가 없는 땅에서 당신과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예요.
전등도 꺼지고,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1997년도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라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포함한 9개 부문을 수상하여 단숨에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는 알마시와 캐서린의 과거 러브스토리를 중심 라인에 두고, 간호사 한나와 인도인 지뢰제거전문가 킵 중위의 사랑과 이별을 현재진행형으로 다루고 있다. 러닝 타임 2시간 42분 동안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넘나들며 두 커플의 로맨스를 액자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상을 입은 캐서린을 안고 동굴로 걸어갈 때 캐서린이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고 고백하자 알마시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조국을 배신하면서까지 적군에게 정보를 팔며 수백km 사막을 내달려온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배우들의 명연기는 감동을 더해준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랄프 파인즈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사랑의 여운이 먹먹하게 남아있었고,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줄리엣 비노슈 못지않게 불륜의 사랑에 빠져드는 여주인공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열연은 인상적이었다. 또 알마시를 죽이러 온 윌렘 데포와 앳된 얼굴의 콜린 퍼스의 연기도 좋았고, 알마시의 동료로 나오는 ‘쉘부르의 우산’(1964년)의 남자주인공 니노 카스텔누오보도 무척 반가웠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불후의 명작은 ‘닥터 지바고’(1965년)나 이 영화처럼 불륜이 중요한 모티프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 이별이나 죽음으로 끝난다. 불륜으로도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는 있으나, 불륜이 해피 엔드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영화를 PC가 아닌 대형 화면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보고 싶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월산 처사 님!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도
공들여 올려주신 덕분에
디테일 까지 생생하게 살아나네요
킵 중위가 촛불을 켜서 구애 장소까지
길을 안내하는 장면도 있었지요?
비록 불륜이지만 ,
통렬한 보복의 재앙을 당한 연인들은 아랑곳 없이
무심하게 아름다운 사막 풍경의 대비가
예리하게 가슴을 찌르던 영화였어요
볼 때 마다 많이 울었어요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네, 동감입니다.
이 영화는 알마시 백작과 캐서린,
그리고 간호사 한나와 킵 중위의 러브스토리가
투 트랙으로 펼쳐지는데,
주 스토리인 알마시와 캐서린의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보조 스토리인 한나의 러브스토리를 좀 등한시한 점이 있었어요.
이 영화는 여러가지 정황상 '닥터 지바고'와 비교가 되는데,
모든 면에서 '닥터 지바고'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설사 불륜일 지언정 인생을 건 이런 러브스토리가 없는 세상같아서
더욱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불륜을 미화한 작품들이 히트를 치는 것 이해할 수가 없음, 불륜은 나쁜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ㅎㅎ
정상적인 사랑은 그저 당연한 것이고,
불륜이라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넘감동이였습디다
동감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