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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오월)의 牧場(목장)으로 /전상렬
아직 바다로 가기에는 이릅니다
이 골목을 나서 이윽고 걸으면
밤나무 숲 사이로 언듯 어듯 푸른 강물이 보이고
길게 뻗은 금모래 위를 한참만 걸으면
우리들을 무척 기다리는 나룻배가 놓였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곧 내가 애써 닦아둔
푸른 향기 한 없이 밀려오는 草原(초원)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언덕으로
나의 牧場(목장)으로 같이 가지 않으렵니까
그곳 五月(5월)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綠色(녹색) 침대에 누워
아무런 마음 캥 길 일 없이 그저
오고 가는 산마루의 흰 구름을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도 좋지 않습니까
행여 햇볕이 따갑게 우릴 깨우면
가만히 일어나 나무 그늘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새로 돋은 잎사귀 사이로 왔다 가는
작은 새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아쉬울 건 하나도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름답고 상냥한 당신을 닮은
마음씨 하이얀 羊(양)의 젖을 먹지요
목을 촉촉이 축일 샘물은 없는 줄 아십니까
그저 좀 심심하다면
人形(인형)이 없다는 게지요
그렇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 심심하다면
나와 함께 춤이라도 추시지오
牧童(목동)이가 피리를 불어주기 않겠습니까
뭐 바다의 진주가 꼭 탐나십니까
진주보다 고운 꽃들이 얼마든지 피어있지 암ㅎ습니까
당신이 원하신다면 꽃다발도 만들 수 있고
당신의 가슴에 길이 피어날 꽃씨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 어떻습니까
신록의 향기 한없이 밀려오는
그 싱푸른 목장의 숲으로 가지 않으렵니까
거기서 해가 저물어도 좋지 않습니까
羊(양)떼도 목동이도 다 돌아가 버린 황혼 속에
죄 많고 괴롭던 그날들을 묻어 버리지 않으렵니까
다시 우리들의 영광을 찬미해 주는 달님이 오실 때까지
그대와 나는
<전상렬 시화작품, 시제는 '오월의 목장으로'>
<해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이며, 1956년 시집 [백의제(白衣祭)]에 수록되어있다.
시집 [백의제(白衣祭)]의 대표적인 시 <五月의 牧場으로>등은 서정시인으로 진면목을 나타낸 장시(長詩)이다. 그는 이 [백의제]의 출간을 계기로 우리시단에 밝은 세계관을 보여 주었고 암울했던 전쟁 후의 시대에 빛을 던져주었다. 버트란드 럿셀이 행복을 저해하는 첫째 원인으로 꼽았던 어두움의 인생관은 이 시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맑고 아름다운 감정이 五月만큼이나 청신한 느낌을 주는 詩다. 마치 알퐁스 도오데의 별'을 연상시키는 인상적인 데가 있다. 이는 詩人의 순수한 마음에서 갈망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詩人은 누구보다 진실해야 한다. 全尙烈詩人은 <나의 自專>에서도 밝혔듯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시인이다. 티없이 밝고 고운 마음씨도 진실에서 기인되고 있다.
鄕土에 대한 애착을 가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현실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牧人이 향토에 애착을 가진 것은 初期詩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중단되지 않고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향토에의 경사는 단지 자연으로만 귀착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고 반드시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하는데 있다. <五月의 牧場으로>는 初期에 해당되는 詩들이다. (송영목/문학평론가)
<전상렬(全相烈) 1923 - 2000 >
* 1923년 경북 대구(大邱) 출생. 호는 목인(牧人).
* 1945년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을 졸업하고
* 1945년 경산 와촌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육계에 투신, 대구제3중 · 대구여중 · 경북중 · 칠곡중 · 대구동중 · 가창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달서실업기술학교 · 구지중 · 흥해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 1950년 처녀시집 [피리소리]를 내고,
* 1955년 조선일보(朝鮮日報) 신춘문예에 시 <5월의 목장(牧場)으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 시집으로 [피리소리](1950), [백의제(白衣祭)](1956), [하오 한시(下午一時)](1959), [생성(生成)의 의미](1965), [신록서정(新綠抒情)](1969), [불로동(不老童)](1971), [낙동강](1971), [생선가게](1977), [수묵화 연습(水墨畵演習)](1982), [세월의 징검다리](1986), [시절단장(時節斷章)](1990), [보이지 않는 힘](1995), [아직도 나는](1999)이 있으며, 수필집 [바람 부는 마을](1966), 산문집 《동해엽신(東海葉信) · 기타》(1972) 등의 작품집을 출판하였다. [전상렬문학선집](1983년)을 출간하였다.
* 경산문학회회장(1979년), 한국문인협의회 대구시 지부장(1988), 대구노인문학회 회장(1991년) 등을 역임했으며, 경북문화상(慶北文化賞)(1960년)을 받았다.
* 목인 전상렬 시인의 문학인생
그는 시(詩).서(書).예(藝) '삼절(三絶)'에 능했던 보기 드문 '현대판 선비'였다.
좋은 시 한 편을 위해 숲을 거닐고, 술을 마셨고,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타계하기 한 해 전까지 시집을 발간하는 등 그의 시 인생에는 '쉼표'가 없었다.
그의 문학인생은 1950년 4월 처녀시집 '피리소리'에서 시작된다. 자비로 출판한 이 시집에는 모두 28편의 동심어린 시가 담겨있지만 아쉽게도 6.25 전쟁통에 잃어버려 원본은 볼 수 없다.
목인은 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오월의 목장으로'가 당선, 문단에 나왔다.
그의 문학혼은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을 맞이하면서 10여년간 크게 변모한다. 이때 비로소 '역사와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그 고민의 결과는 제3시집 '하오 한 시'(1959년)와 제4시집'생성의 의미'(1965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지훈 시인도 "아주 소박하고 건전한 서정시를 쓰는 기대해도 좋은 시인" 이라고 일찍부터 그의 시재를 인정해주었다.
그의 시를 시기별로 구분한다면 제3. 제4시집을 분수령으로 전반. 후반기문학으로 양분된다는 것이 평단의 일반적 분석이다.
작고한 김윤식 시인은 "초기시 시풍은 천진난만하고 목가적이었고, 60년대 잠시 참여성향을 띠었을 뿐 평생 노자의 무위자연과 도연명의 자연귀의의 영향아래 세월과 자연, 인생을 삼위일체로 다신교적 토속성의 세계를 품었다"고 그의 시풍을 설명했다.
목인 문학은 철저하게 불교와 노장, 그리고 유교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공수래 공수거' '안빈낙도' '허무'가 그의 시적 기조정신이었던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시집(13집)의 표제 연작시 ‘아직도 나는’에 그의 詩 정신이 잘 집결돼 있다.
사실 시인 전상렬 이전에 '풍류인 전상렬'의 풍모에 더 매료된 문인들이 많다. 빈소에서도 "시처럼 살다 간 사람", "술 복 하나는 타고 난 어른"이란 말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다. 아무리 늦은 시간, 먼 곳에서 전화가 와도 '술 먹자'란 제의만 있으면 그는 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석으로 달려갔다.
함께 술자리를 오래한 소설가 윤장근씨는 "목인을 생각하면 시보다 술이 먼저 떠 올라요.
한번은 그에게 '오늘도 술을 먹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뜸 '아니, 오늘도 밥먹느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소' 라고 반문하더라구요. 그가 얼마나 술을 애지중지했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지요"라고 애주가 목인을 그리워했다.
그의 인품 역시 문단의 화제였다. 이민영 시인은 목인의 성품을 논하면서 "강하면서도 유하고, 격하면서도 약하고, 귀족적이면서도 소박. 담백하고 처세에 둔하면서도 대인에 솔직하다"고 말했다. 다시말해 그는 외유내강의 품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 군부시절 수배당한 문인들이 밤늦게 봉덕동 판자촌 집에 오면 술과 고기를 대접했고 도피자금까지 건넬 정도로 정이 많았다고 주변 문인들은 증언한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동양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1981년 한국현대미술대상전, 신라미술대상전, 대구시미술대상전에 동시 입선,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만촌동 그의 서재에는 당시 입선된 동양화 한 점이 방 한 구석에 세워져 있지만 그는 애써 자신의 작품이라고 자랑한 적이 없었다.
그도 시가 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교사생활을 시작했다.1945년 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난 다음해 경산 와촌초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첫 발을 딛고 1976년 경북 흥해중학교 교장으로 교직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30여년간 교단을 지켰다.
그는 늘 술자리에서 "시인은 거지같은 생활 속에서도 정신은 고고한 귀족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직업과 창작생활사이의 갈등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88년부터 91년까지 문인들의 만장일치 추천으로 한국문협대구시지회장이 됐고, 91년에는 65세 이상의 지역 문인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구노인문학회를 결성해 원로문인들의 입지를 넓혀주었다.
"원도 한도 없이 살다간 사람"이란 금동식 시인의 말마따나 고인은 이승에 별 미련이 없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안의 평안을 위해 10년 동안 백팔기도를 올리다 사흘을 못 다 채우고, 그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에 대한 슬픔에는 초연하지 못했다. 비록 몸은 없다지만 전인적으로 살다간 그의 시혼만은 이 황량한 도시 위에 별처럼 빛날 것 같다. (여성생활에서 발췌)
<공모전 입선작>
<공모전 입선작>
<수류촌>
◈ 피리소리/전상렬
벗이여 일어나 나의 피리 소리를 들어라
우주의 리듬
인생의 멜로디를
은은한 종소리 저문 절간에
그윽한 생각에 잠긴 僧侶(승려)들의
苦行(고행)
내 이 피리를 불어 樂(낙)을 찾으리
흰 구름이 뜬 산꼭대기 修道院(수도원)
아름다운 마리아像(상)앞에 선 修女(수녀)들의
祈禱(기도)
내 이 피리를 불어 사랑을 찾으리
집도 많은 집도 많은 市街(시가)옆에 쌓은 벽돌담
시멘트 장판 위에 고개 숙인 囚人(수인)들의
슬픔
내 이 피리를 불어 빛을 찾으리
物慾(물욕)의 소리 소란한 市場(시장)골목
營利(영리)의 信仰者(신앙자) 謨利輩(모리배)들의
돈
내 이 피리를 불어 福(복)을 찾으리
勝利(승리)의 歡呼(환호) 소리 드높은 곳에
오늘도 計算器(계산기)로 싸우는 科學者(과학자)들의 손에
水素彈(수소탄)
먼지 나는 일터에서 고요한 책상머리에서
人生(인생)을 위한 者(자)들의
땀
내 이 피리를 불어 安息(안식)을 찾으리
벗이여 일어나 나의 피리 소리를 들어라
宇宙(우주)의 리듬
人生(인생)의 멜로디를
내 이 피리를 불어 平和(평화)를 찾으리
<해설> 1950년 시집 [피리소리] 표제시이다.
대개 훌륭한 서정시를 쓴 시인들을 보면 동시풍(童詩風)에서 출발한 시인들이 많다. 그 좋은 예가 朴木月 시인이다. 全尙烈 시인도 처녀시집인 《피리소리》를 보면 동시풍의 시들이 대부분이다. (김원중/시인)
<대수시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 전상렬 시인의 시비, 시제는 '고목과 강물'>
◈ 古木(고목)과 강물/전상렬
강 따라 물이 흐르고
물 따라 강이 흐른다
물 흐르듯 흐르는 세월 기슭에
저만치 古木(고목)이 서 있고
바람 따라 세월이 가고
세월 따라 바람이 흐른다
넘어치는 강바람에
잎은 물나부리로 출렁거렸고
세월에 발돋움했지마는
애 말라 속이 썩은 둥치
원으로 겹겹 波汶(파문)져 가는 나이에
안으로 묵묵 忍苦(인고)가 그대로 긴 사연이고
하늘은 온갖 모양으로 바뀌어도
바다로 가는 마음 그대로 그것 아닌가
안개와 구름과 하늘 빛 물색
강물은 저렇게 흐르는 것이고
古木(고목)은 저만치 서서만 있고
바람 따라 세월이 가고
세월 따라 바람이 흐른다
<전상렬 시화작품, 시제는 '고목과 강물'>
* 1965년 시집 [生成의 意味]에 수록되어있다.
1960년대 중반에 나온 시집 [生成의 意味]는 이 시인의 인생과 생명의식이 짙게 풍긴다. 그리고 계절과 시간을 나타내는 시어(詩語)가 많아졌으며 조금 감상적인 경향으로 흘러간 것도 40을 넘어선 연륜 탓이 아닐까 한다. (김원중/시인)
◈ 바닷가 風景(풍경) /전상렬
아침 바다는
青葡萄(청포도) 빛이더니
한나절 바다는
잉크를 쏟아 놓았네.
모래 볶는 作業(작업)
살갗 태우는 그 밖에
바람이 솜뭉치로
물결을 부수고
化粧(화장)한 人魚(인어) 떼가
꼬리치는
바다.
<해설> 1977년 시집 [생선가게]에 수록되어있다.
시집 [생선가게]는 이 시인이 동해 근처 중학교 교장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바닷가 마을에서 느꼈던 일상적인 삶과 고향에의 그리움 같은 것이 물씬 젖어 있다. <바닷가에서>, <바닷가 風景>, <바닷가 素描>, <봄바다>, <여름바다>, <겨울바다>, <가을바다> 등 바다를 제재로 한 시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김원중/시인)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범어공원 전상렬 시인 시비, 시제는 '들국화'>
◈ 들국화/전상렬
도시의 변두리 빈터에
들국이 피어
바람에 한들거린다
꿈 많은 시절의 보랏빛이
잔잔한 꽃 물살 되어 흐른다
며칠째 서리가 내리고
시나브로 지는 목숨을
땅 주인은 따로 있겠지만
오늘은 내가 이 꽃의 임자다
아무도 손대지 말라
그냥 바람에 출렁거리게 하라
<해설> 1995년 시집 [보이지 않는 힘]에 수록되어있다.
시집의 서두에 시인이 말한다.
'자 서(自 序): 스무살 그 무렵에 끼적거리기 시작한 시를 일흔이 넘도록 버리지 못하고 열두 번째의 시집을 엮는다.
「시는 뜻을 말로 나타낸 것」(詩言志, 書經) 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깊은 뜻을 쉬운 말로 나타내려고 애를 쓴다. 깊은 뜻은 사물의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실재이기 때문에 행간(行間)에 감추어 두고 쉬운 말은 꾸미지 않고 수수하면서도 격조가 높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정서적 감흥으로 시를 쓰는데 내시가 잘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서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의 통일과 적확(適確)한 말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마는 내 영혼의 울림(響)을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하다.
시는 정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서를 달리하는 수많은 시인들이 오늘도 시를 찾아 헤매고 자기 나름대로의 시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말처럼 도시의 정원이 아닌 변두리나 산등성이에서 '그냥 바람에 출렁거리'는 들국화와 같은 시인이다.
♣ 꽃밭에서/정훈희
첫댓글 필자의 중학교시절 국어선생님 전상렬 시인을 추모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