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총기 난사
이미나
어렵고 힘없는 사람을 더욱더 구석으로 모는 야박한 세상에서 따뜻하고 친절한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 다정한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손 뻗어 내밀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어둠이 드리워 진지 오래인 밤, 이 시간이면 노트북의 전원을 커 놓고 커피 한잔을 머금는다. 오늘도 윈도우 화면이 뜨고 수업에 들어가는 서두에 교수님이 학우들에게 더욱 힘내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학사편입을 하며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사회가 너는 나라는 식의 개인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는 듯하다. 여러 가지 사건 중 가슴에 빼내지 못한 가시처럼 찌르는 진하게 아픈 소식들이 있었음을 회상해 본다.
그것은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한국인 1.5세 교포 조승희가 오전 첫 수업을 하던 교수 한 분과 31명의 학생에게 총을 난사하였다. 그들은 고스란히 희생자가 됐다. 노리스 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마치 의식을 행하듯 마지막으로 자신도 자살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조승희는 평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거의 외톨이었다고 한다. 본래 비열한 인간이란 법과 도덕이라는 굴레가 있어야만 그럴듯한 대로 사람 구실을 하는 법, 그 기제(機制)가 없다면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강한 자 앞에서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약자 앞에서는 고개를 뻔뻔히 들고 냉소를 머금은 범죄자로 둔갑하는 것이 전형적인 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고교 시절 그런 그를 놀리고 때리는 손쉬운 표적이 되기도 했다고 회상하기도 하였다. 세상에 혼자 있다는 분노는 조승희의 가슴 속에 보이지 않게 23년 동안 차곡차곡 싸이게 된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분노는 이른 아침 캠퍼스에서 성난 권총의 파열음으로 변하게 되고야 만 것이다.
누구 한 사람 따뜻하게 말 걸어 주는 이 없이 어두운 터널을 길게 걸어온 그는 살인마가 되기로 한 날 섬뜩한 눈빛으로 카메라 앞에서 사랑 없는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섬세함이 없고 무책임한 세상 사람들은 그저 그를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극악무도한 망나니로만 취급하겠지만, 손가락질하는 그들 역시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다. 두꺼운 마음의 벽을 쌓고 그 폐쇄적인 공간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지.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를 투명인간 취급한 것 같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그가 강의실에서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거나 교정을 우두커니 거니는 모습을 봤다거나 컴퓨터로 음악을 듣는 것이 다였다고 말한다. 그의 처량한 어깨를 두드리며 “승희야 얼마나 힘드니, 나와 친구 하자” 해 주는 사람은 없었는지. 친구가 될 때까지 지속적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려 준 사람은 없었던 것인지 안타까운 일이다.
방에 갇혀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한 번 문을 잘못 잠가 잠시 동안 갇힌 적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어서 영영 갇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내리치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못 느끼는지 자기들 일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다행히도 다시 문의 고리 잠갔다 풀었다 조작하니 겨우 풀어져서 나올 수 있었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때의 그 공포는 실로 컸다. 그 뒤로는 트라우마가 생겨 어떤 경우 문을 잡고 일을 보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조승희도 그런 방에서 하염없이 문을 사람들을 향하여 두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방에 갇힌 이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며 그 문을 열렸는지 닫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폐소 공포증에 걸린 그의 분노의 틈과 역치(易置)도 비례해 가도 있음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우선은 일차적 책임은 그의 부모이고 그리고 그의 교사 이차적인 책임은 사랑 없었던 사회가 아니었던 가 싶다.
2005년 11월과 12월에 조승희가 두 여학생을 스토킹하고 기숙사에 방화하는 혐의로 경찰 조사까지 받자 정신감정을 받았고 학교 내 상담 센터로 후송되었지만, 학교 당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심각한 상태까지 이르렀지만,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이 가슴을 칠 일이다. 동영상으로 세상에 퍼부었던 저주들은 반어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애절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조승희의 사연을 헤아려서인지 사흘 뒤 어떤 여학생이 처음 편지를 놓고 가면서 꽃 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사랑 없는 미국사회가 불러온 일이지만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하는 왕따 괴롭힘 문제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야멸차게 팔짱이나 끼고 있는 시선들이 많다. 남들 문제에서는 눈곱만큼이나마 연민이나 동정을 느끼고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이 부모나 교사의 손길이 소홀하다면 사회복지사의 손길 또한 필요하며 사회 모든 사람의 치유가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닫힌 사람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숙제를 껴안은 듯하였다. 이번 학기 사회복지현장실습자격증도 발급되고 나의 꿈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듯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사건이다. 나는 잠시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 마우스를 클릭하여 7년 전 사이버 공간에 이미 세상 사람들의 각박한 인심 속에 화석처럼 파묻혀진 조승희 사건에 애도의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다시는 이런 참극이 생기지 않기를 절실히 바란다고. 그리고 32명의 희생자와 1명의 가해자라기보다는 32명의 희생자와 1명의 가해자이자 희생자임을 말해 본다, 떠나간 그들에게 한없는 애도를 표하며,
첫댓글 힘들 때 내밀어주는 손 만큼 고마운 것은 없지요.
백 번의 손길을 주어 백번 도움을 받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요즘 같은 각박한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미나샘! 오랫동안 기다리던글 드디어 나왔군요. 샘의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외로웠던안큼 큰 사랑을 할것을 믿습니다. 미나샘한테서 그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아팠던 과거가 방에 갇혔던 트라우마가 어쩌면 사랑을 간절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의 글을 기다려 주시다니 영광이고요. 격려와 칭찬 감사합니다~~
이나님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지도교수님 칭찬이 대단하셨지요
나도 참 잘 썼다고 생각했지요
뭘 모르지만...
자꾸 써서 보답하세요
좋은 자질 살리셔야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헤스티아 선생님.늘 격려와 칭찬의 영양분으로 제가 자라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