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도 않는 진보(進步)라는 허상에 대한 본인의 소견
(Hegel vs. Schopenhauer)
글쓴이: 본 카페지기(이재원), 2025.03.12.(수)
진보(進步, progress, Fortschritt)라는 것은 인간의식의 전개에 대한 무지한 자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더욱이 진보로 먹고사는 기계론적 좌파와도 완전 무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진보라는 명칭에 기생하여 평생 밥을 먹고 숨을 쉬고, 돈을 벌기 위해 정치선전도구로 악용하면서 메가폰 시위로 밤과 낮, 꿈에서도 시끄럽게 살아간다. 한 마리의 영웅의 안위를 위하여 많은 군생들이 첩첩히 떨어져 나가도 맹종으로 레밍처럼 그냥 그대로 일렬로만 나아간다.
그래도 개개인의 자유의식을 생명으로 하는 우파도 있듯이 세상이 변화하면서 일면(一面) 편리해지는 면이 있어 보여, 나름 진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진보는 아니다. 꼭 있다면 변화에 의하여 오로지 유사한 발전이나 동일한 전개만 추상적 반복으로 연이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식세계에서부터도 진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도 있다면 자기 반성적 나아감과 나이와 경험에 따른 번민과 성숙만으로 삶의 고뇌에 더불어, 생명을 붙여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발전하는 사회 변화에서 영감(靈感)을 구한 독일프러시아 철학자 헤겔은 이를 인류들의 역사적 진보로 착각하여 아주 거대하게 그만의 논리학으로 새로이 변증하면서 난해한 말들로 길게 전개하여 나아갔다. 마음먹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유를 일종의 기괴한 연극용 시나리오로 꾸며 명칭을 변증법으로 붙여 교묘하게 자기만의 암호세계를 철학적 전매특허로 꾸며 사용했다. 그런데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 등등 폭풍이 쉼 없이 휘몰아치는 유럽의 혁명적 분위기에 맞게 너무나 매우 그럴싸하여 많은 유럽의 생생한 철학도들이 그대로 속여 나가, 어마무시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철학의 제왕(帝王)이니 하면서 세계유수의 대부분의 대학철학 강단에서 그의 변증논리를 교수나 강사들이 난해한 말로 헤겔 철학을 강독으로 주석하면서 힘차게 전달하고 있다. 학생들은 도무지 뭔지도 이해를 못해 안달하면서도 철학적으로 전무후무한 세계적 유명세 하나만을 믿고 무조건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문학처럼 아는 척 듣고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독일의 영리한 대학생들도 원전 이해를 크게 못해 독어보다 영어로 번역된 그의 철학책으로 학습하고 있다. 이에 이런 교묘한 사기성(詐欺性)을 동시대의 쇼펜하우어가 당시에 일찍이 바로 간파하여 삶에 대한 ‘생의 의지’로 대처했지만 무참히 공개 참패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그의 말년에 겨우 몇몇 독일인문천재들이 그의 철학적 예지(叡智)를 알아보았고, 출판에서도 나름의 작은 성공을 거두어 조금은 기쁘게, 독신(獨身)으로 종명했다. 생업에 부단한 인간의 삶에서 목적론적 진보란 명제는 어불성설이다. 오로지 여타의 동물처럼 동일한 재료에서 생로병사하면서 변화와 발전과 전개만으로 보이지도 않는 신(神,God)을 복잡하게 논하면서 또 하나의 동물처럼 추상적으로만 길게, 안 망하고 종족보존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발전이란 편리성을 구하는 것으로, 발전하든 말든 그래도 진보는 아니다. 헤겔의 후예로 좌파들의 금과옥조인 맑스(Marx)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용어부터 형용모순의 큰 덩어리이다. 명칭은 물론 내용도 그렇다. 유물(唯物)에 무슨 변증법(辨證法)이 있단 말인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170.8.27.~1831.11.14.)은 그의 마지막까지 자기의 이성적 정신철학에 대하여 올바르게 아는 이가 거의 없다며 독일프러시아시민들의 무지를 탓하면서 나이 예순하나로 독일 프러시아 명문도시 베를린에서 콜레라로 하루 만에 급하게 병사했다. 그즈음 저 멀리 말레이시아에서는 대학 하숙생 때 주인아줌마 사이에서 얻은 그의 혼전장남이 사회적응에 실패하는 등 돈이 없어 화란(和蘭,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용병으로 갔다가 원주민들의 화살에 맞아 해변의 정글에서 고통을 안고 전사했다.
결론적으로 정신이성이란 높은 꿈의 성벽에서 그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콜레라로 하루 만에 병사하고, 그의 장남은 몇 푼의 돈을 벌려고 배를 타다가 이역만리에서 말레이시아 원주민의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그의 정신 논리적 진보를 위하여 그는 스스로 무지한 이성적(理性的) 소리를 겹쳐 하다가 생로병사의 틀 속에서 명멸로 사라졌다. 밤하늘의 별과 도덕적 격률로 살았더라도 이는 목적론적 진보는 아니다.
하늘을 보지 못하는 짐승들과 달리 이미 모든 인간은 태고적부터 그렇게 살아 왔다. 그기에 무슨 모순이 있고 이를 극복해가는 진보가 있는가? 오로지 동일률과 이를 인정하는 모순율과 배중률만이 충족이유(充足理由)를 인연(因緣)으로 하면서 셈본의 사칙과 더불어 번성하고 발전하고 변화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가 태어난 곳에서 명(命)을 다해 쓰러질 것이다.
힘이 다해 쫓겨난 아프리카 초원의 수사자처럼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가죽에 여러 구멍이 생겨 그가 영광으로 누린 지나간 그의 삶의 공동체 앞에서 홀로 물도 마시지 못하고 ‘생의 의지’마저 빼앗겨 그 모두를 포기하면서 네다리의 관절마디가 동시에 꺾여 그 자리에서 그의 지나간 무수한 선배들 마냥 신음하나로 쓰러질 것이다. 결국엔 헤겔보다는 쇼펜하우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쓰러진 그 자리엔 흙먼지만 쌓이고 또 우기를 맞아 새로운 풀들이 초원의 나무들과 함께 무럭무럭 크고도 넓게 큰 평원을 채우며 앞전과 동일하게 그대로 자랄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자기 세대 이전에 그 누가 그 땅에서 숨을 쉬며 무엇으로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알 턱이 없다. ‘생의 의지’마저도 공멸(空滅)로 사라질 뿐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변화 속에 목적이 있다는 것은 신(神,God)을 모독하는 말이고, 인간을 신(神) 이상으로 과대평가한 오류이다. 창세기 낙원의 아담과 이브나 중국 당나라의 양귀비나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나 미국의 여우(女優) 마릴린 먼로나 프랑스의 국민배우 알랭들롱이나 다 똑같이 신(神)처럼 아름답고 하나도 다르게 변한 것이 없다. 만약 정신이나 몸이 다르게 변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진보(進步)가 인간을 정신적 기형으로 만들고 있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여 결국엔 자신을 불안하게하고 자신의 몸을 부당(不當)한 정신으로 협박하면서 해치고 있다. 동일한 모습으로 변화와 발전, 전개만이 있다. 정신과 영혼은 당연하고 역사는 물론 과학도 그렇다. 심지어 의복도 모양이 동일할 뿐이다. 다만 우리 모두가 정확히 알듯이 장식과 재료만이 계절에 맞게 조금씩 반복하면서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