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북위 왕조가 5세기 세계미술의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조형예술인 운강석굴을 짧게는 35년 만에 길게는 70년만에 조성했다. 254개 동굴에 5만 1천여 존의 불상을 조각할 수 있었다. 그 것은 북위의 재정지원으로 몰려든 석공예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남북방 사람들이고 상당수가 고구려인이었다.
제19굴의 주존좌불과 석굴암 본존불 규모가 아니라 예술성 기하학적인 구도의 완성미 건축술 사암과 화강암의 재질의 차이를 비교하면 석굴암이 무상의 순결한 초연함을 드러내고 있고 훨씬 세련되었다.
단시간에 이루어진 운강석굴조성사업은 동아시아문명세계에 혁명적인 변화, 문명의 3대 요소 중의 하나인 아름다움의 창조적 상향의 폭발적 기원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반가좌사유상이 출현하여 동아시아 전반의 흐름을 주도한 새로운 양식으로 정형화된 것이다. 그 최초의 작품이 운강석굴 제6동의 불본행고사를 조각한 것이다. 싯달타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괴고 왼손으로 오른발을 잡아올리고 야소다라 침대에 앉아 출가를 고민하고 있다.
싯달타 반가좌사유상은 정형화되며 미륵사상과 결합된다. 미륵이 도솔천에서 의좌상으로 설법하는 모습이 반가좌사유상이 된다.
미륵하생의 혁명적 사회변화를 신앙하는 젊은 무사들의 단체가 화랑이었고 화랑의 이데아적 모습이 반가좌사유의 싯달타와 결합하는 묘한 예술적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국보78호는 1912년 후찌가미사다스케로가 수집해 총독부에 기증하였다. 고구려작품으로 단언한다. 얼굴과 눈매가 북방무사적 기질을 보이고 미륵의 이미지가 강화되어 운강 용문의 북위 예술의 영향을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고구려예술의 장쾌한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쿄오토오 광륭사 소장 반가좌사유상은 조각부문 일본국보1호이다. 신라왕이 성덕태자가 훌륭한 정치를 행한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선물한 것으로 일본에 없던 적송으로 조각한 것이다. 북위에서 시작해 고구려를 거치면서 순화된 싯달타의 고뇌하는 순결한 모습이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예술로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고구려에서 경주로 가는 조령루트는 한강하류 여주 충주 조령 문경 함창 상주 선산 경주로 이어지고 죽령루트는 충주 단양 죽령 영주 봉화 안동 의성 군위 대구 영천 경주로 이어진다. 이 루트에 석탑 석굴 마애불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승려들이 부여로 가기 전에 서산지역에 정착했다.백제서산마애불의 반가좌사유상은 코믹하다. 세계불교사에 유례가 없는 독자적인 불교 이해의 산물이다.
국보83호 금동반가좌사유상은 광륭사 사유상의 조형이다. 얼굴표현이 광륭사 목조 사유상에 비해 훨씬 더 양식적이고 코와 입모양이 품격이 떨어진다. 금동미륵보살반가좌상이라 이름하지만 이것은 순결한 청년 싯달타의 고뇌하는 모습이다. 역사적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미륵적인 요소를 없앤 것이다.
운강석굴 제5굴 누각상층 동측감실의 좌불로 고구려 신라 반가좌사유상의 조형을 이루는 걸작으로 운강석굴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정묘한 작품이다. 콧등의 날카로운 깎임에서 눈썹으로 연결되는 율동을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하였고 입술라인이 국보83호 삼산사유상처럼 틔어나오지 않고 광륭사 사유상처럼 매우 여유롭고 길게 표현되었다. 인중이 입술보다 틔어나오면 품위를 잃는다. 눈을 내리감았지만 세상을 굽어보는 눈망울은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동경 마루키사진관의 문하생으로서 나라에 아스키엔을 설립한 오가와 세이요오가 촬영한 광륭사 목조 사유상의 사진은 그의 모든 사진작품 중 최고작품이다. 일본고미술 연구의 활성화 동기를 제공한 1925년 작품이다. 신라의 향기를 흠향할 수 있다. 운강에서 우즈마사에 이르는 인류사 최정상의 두 작품을 연결하는 것은 고구려패러다임이었다. -도올의 중국일기 3
이 책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저자의 자유분방한 통찰과 혜안이 사진과 글과 현장답사를 통해 흥미롭게 펼쳐진다.
모두 6권으로 된 저자의 중국일기는 우리시대 인문학의 경이로운 꽃이다. 다른 분들에게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