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서원
서원 가는 길 못둑에 피어난 엉겅퀴
초야에 묻힌 무하옹(無何翁)
임진왜란 7년 전쟁에 의병으로, 수군으로 종군했던 박인로는 경주시 산내면 노계(대현리)의 초야에 묻혔다.
야생의 꽃밭에 묻혀 지내며 강산과 청풍 명월을 백년 동안 탐하고 흥취를 노래한 노계
뻐꾹채. 애국충정에 피끓던 젊은 날의 노계 모습을 닮았다.
굵은 뿌리가 땅 속 깊이 뻗어 내려간다. 줄기는 높이 40~70cm 정도로 곧게 자라며 가지가 갈라지지 않고 전체에 흰색의 거미줄 같은 털이 덮인다. 뿌리잎은 꽃이 필 때까지 남는다. 밑부분의 잎은 피침상의 장타원형으로 잎몸이 6~8쌍으로 우상으로 완전히 갈라진다. 갈래조각은 장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어긋나게 달리는 줄기잎은 우상으로 갈라지고 위로 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6~8월 줄기 끝에 대롱꽃 만으로 된 머리 모양의 홍자색 꽃이 위로 곧추 선다. 총포는 반구형이고 포조각은 6줄로 배열한다. 타원형의 열매는 수과이며 관모는 여러 줄이 있다.
산기슭의 건조한 풀밭에서 자라는 숙근성 다년초로 관화식물이다. 원산지는 한국으로 중국, 몽골 등지에 분포하며 건조에 잘 견디고 노지에서 월동 생육한다.
명종16년 1561년 6월 21일 영천 도천리에서 태어남
13세에 후투티 노래(대승음)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낮잠을 자다가 자주 놀라 깨게 하는 후투티 울음 소리,
午睡頻驚戴勝吟
어이하여 농사짓는 들 사람들만 재촉하나
如何偏促野人心
저 낙양 서울 대감집 모퉁이에서 울어서
啼彼洛陽華屋角
서울 사람들 밭갈이 권하는 새 있는 것을 알게 하려므나.
令人知有勸耕禽
1592년에 임진전쟁 중 제일 먼저 수복한 영천성 수복전에 호수 정세아 선생(아드님은 경주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시신을 찾지 못해 애사를 관에 넣고 장사지낸 무덤 詩塚, 백암 정의번)이 의병장이었고,
32세의 노계가 별시위(참모장교)로 참여하였다. 7년 전쟁이 끝나는 시점, 부산진에 몰려 있는 왜군을 쳐부수는 전쟁에
38세의 노계는 수군절도사 성윤문의 참모로 참전하였다(태평사). 전쟁이 끝나고 공을 다투지 않고 초야 노계-노주에 엄자릉처럼종적을 감추고 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몽견주공기-논어를 읽다가 공자가 꿈 에 주공을 만나지 못한다는 구절을 보고 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창 아래서 잠이 들고, 주공을 만나고 주공이 붓으로 써 준
誠敬忠孝 4자를 받고, 꿈을 깬다.).
이웃 사람이 노계가 개간한 밭을 침범하여 농사 짓자, 시비하지 않고 그 농토를 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
이 때 최진사 기남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시를 주었다.
不貴人所貴 남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不貪人所貪 남이 탐하는 바를 탐하지 않는다
江山風與月 강산과 청풍, 명월
是我百年貪 이것이 내가 백년 탐하는 것이라네
41세에 광주 이씨 영의정 한음 이덕형을 종유하였다(조홍시가),
45세에 통주사(제독)를 제수받아 부산에 부임하였다(선상탄)
51세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
남한강변 이덕형을 찾아가 그곳의 풍경을 노래한 사제곡, 이덕형이 산중 생활을 묻자 자신의 삶을 노래한 누항사,
52세에 도산서원 참례
59세 한강 정구를 만나 울산 초정에서 목욕하고 욕우울산초정가,
안강 자옥산 독락당을 방문하여 회재 이언적을 추모하며 가사 독락당을 지음,
69세 여헌 장현광을 입암으로 찾아가 종유하고, 입암가 시조 22수를 지어 입암28경을 노래,
75세 경상도 관찰사 이명의 선정을 기리며 영남가, 이명이 노계를 독립특행지사(인품과 행실이 우뚝 선 선비)라고
인조 임금에게 보고 올렸고, 임금은 복호(조세를 감면해주는 집)하고 자손에게 음직(명예직)을 내리고 특별히 미육(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76세 노계의 풍경을 노래한 노계가
82세 1642년 인조20년 12월 6일, 졸하였다. 영천 남쪽 고향 도천리 여기 大朗山 선영하에 장사 지냈다.
숙종 1704년 사당 도계사가 세워지고
1707년 정규양이 행장을 짓고
1831년 문집 노계집이 간행됨. 서문 김유헌, 발문 정하원, 최옥(수운 최제우 선생의 부친)
백선꽃
꿀풀. 아직 꿀맛을 볼 수 없었다.
흰고들빼기꽃
으아리꽃
어화 아해들아 후리치고 가자스라
田園이 뷔엇거니 엇지 아니 가로소냐
道川 上 명월 청풍이 날 기다린기 오래니라
-蘆洲幽居
산내면 노계(노주)에서 칩거하다가 고향 마을 도천의 전원으로 가자고 하고 있다.
현장에서 설명할 때 노주를 도천이라고 하였는데, 노주와 노계가 같은 곳을 표현한 다른 말이고,
노계(노주)는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로 산내 의곡에서 가지산으로 넘어가는 계곡을 말하고,
임란 후에 노계가 이 산중에 오래 칩거하다가
노년에 다시 고향마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로 옵니다.
솜방망이꽃
노계 박선생지묘
이정병이 찬한 묘갈문
가사 노계가 문학비
도계서원
사당 옆의 찔레꽃 덩굴, 향기가 그윽했다.
조홍시가
2구의 유자가 우리가 차로 만들어 먹는 그 유자로, 남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귤을 닮은 신맛의 유자입니다.
처음엔 과일 유자로 알았다가 어느 책에서 중국의 효자로 귤을 품은 유자라는 인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과일 유자가 아니고 효자 인물 유자라고 말하면서도,
한자 글자를 보니 과일 유자라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하였습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육적이 귤을 품은 고사에서 비롯한 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잘못 말씀 드린 점 미안하고 정정합니다.
육적회귤(陸績懷橘)
[요약] (陸: 뭍 육. 績: 길쌈할 적. 懷: 품을 회. 橘: 귤나무 귤)
육적(陸績)이 귤에 품에 품었다는 뜻으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이르는 말.
[동어] 회귤고사(懷橘故事)
[줄임말] 회귤(懷橘)
[출전]《三國志》
[내용] 이 성어는 그 유명한 삼국지의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가 조조(曹操)군에 쫓겨 강하(江夏)에 있으면서 오(吳)나라에 가서 손권(孫權)의 참모들과 논쟁을 벌일 때, 제갈량이 육적을 지적하며 말했다.
그 장면을 황석영의 삼국지에서 보자.
그때 좌중에서 또 한 사람이 묻는다.
“조조가 비록 황제를 내세워 제후들을 호령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漢) 나라의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예요, 유비는 비록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아무 증거도 없고, 우리가 알기로는 그저 돗자리나 짜고 짚신이나 삼던 사람이거늘, 어찌 조조에 맞서 싸울 수 있겠소이까?”
이번에는 육적(陸績)이 었다. 제갈량이 웃으며 대답한다.
“공은 원술 면전에서 귤을 품에 넣던 육랑이 아닌가? 그대는 편히 앉아서 내 말을 잘 들어 보시오. 조조가 조상국의 자손이라면 한나라 신하가 분명한데, 지금 함부로 권세를 희롱하여 황제를 업신여기니, 이는 황제를 업신여길 뿐 아니라 제 할아버지마저 욕보이는 것이며, 한나라 황실의 난신(亂臣)일 뿐만 아니라 조씨의 적자(賊子)요. 그러나 유예주께서는 당당한 황제의 자손으로 지금 황제께서 족보를 살펴보고 벼슬을 내리셨거늘, 어찌하여 증거가 없다고 하시오? 또한 한고조(유방)께서는 정장(亭長= 지금의 동장)의 신분으로 마침내 몸을 일으켜 천하를 얻으셨으니, 돗자리 짜고 짚신을 삼은 게 욕될 게 뭐가 있겠소? 육공은 소견이 어린아이 같으니 족히 높은 선비와 더불어 한자리에서 노할 위인이 못 되오.”
座上又一人應聲問曰:「曹操雖挾天子以令諸侯,猶是相國曹參之後。劉豫州雖雲中山靖王苗裔,卻無可稽考,眼見只是織蓆販屨之夫耳,何足與曹操抗衡哉!」孔明視之,乃陸績也。孔明笑曰:「公非袁術座間懷橘之陸郎乎?請安坐聽吾一言。曹操既為曹相國之後,則世為漢臣矣;今乃專權肆橫,欺凌君父,是不惟無君,亦且蔑祖;不惟漢室之亂臣,亦曹氏之賊子也!劉豫州堂堂帝冑,當今皇帝,按譜賜爵,何雲無可稽考?且高祖起身亭長,而終有天下;織蓆販屨,又何足為辱乎?公小兒之見,不足與高士共語!」三國演義/第043回
여기서 나온 육적회귤(陸績懷橘)은‘정사삼국지. 오지(吳志) 육적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육적이 여섯 살 때 구강(九江)에서 원술을 만났는데, 원술이 귤을 주자 그중 3개를 품에 넣고, 작별 인사를 귤을 떨어뜨린다.
이에 원술이“육랑은 손님인데 왜 귤을 품에 넣었는가?”라고 물었다.
육적은 무릎을 꿇고“돌아가 모친께 드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원술은 그 효성(孝誠)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績年六歲,於九江見袁術。術出橘,績懷三枚,去,拜辭墮地,術謂曰:"陸郎作賓客而懷橘乎?"績跪答曰:"欲歸遺母。"術大奇之。
이 고사는 원나라 때에 곽거경(郭居敬)이 저술한 24명의 효행을 적은 《이십사효(二十四孝)》에도 나온다. .
노계시비
첫댓글 어링불님은 참 총명 하셔요! 어쩌면 그렇게 줄줄 얘기를 잘도 풀어내시는지 감탄입니당.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님 덕분에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오늘 노계 묘소에 가면 어링불님에게 들어서 안 얘기들을 친구에게 좔좔 해조야쥐. 근데 기억을 잘 할랑가 모리겠네요. 한 번 들어가면 당최 나오질 않는 것이 요즘 저의 슬픈 현실...ㅎ
어머니가 주순신의 따님, 부인이 충무공 이순신의 따님....뭐 요런 것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정보일런지요? ^^
어링불님 덕분에 의미 있던 하루였습니다
아름다운 하루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주신 해국님의 멋진 사진!
노계 선생 묘소를 가득 덮고 있는 아름다운 꽃은 백선입니다. "씀바귀꽃인가?"하고 물은 건 흰고들빼기이고, "산머위꽃인가?"하고 물은 건 솜방망이입니다. 노계 묘소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지지 않는, 야생화 천국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그게 흰고들빼기꽃이었군요. 고맙습니당~
전 희귀한 분홍씀바퀴꽃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였어요. 첨 보고 그 색깔에 홀딱 반했습니다.
나로서는, 광주 이씨 시조 묘가 있는 잘 가꾼 명당자리보다
온갖 풀꽃 잡초며 떡깔나무 새순까지 우거진 노께 선생 유택 자리가 더 탐이 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