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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揆園史話 / 太始紀 - 2
주임교수 추천 0 조회 19 14.09.10 0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二    太始紀 (2)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수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鎧.矛.戟.大弓.고矢, 一幷齊整, 乃發탁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습(仗)[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20)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대]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탁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탁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대]伏尸滿野」者, 是也.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게다가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화창한 바람 기운은 널리 퍼져 있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21)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탁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22)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탁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冀연之地, 盡爲所據,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23)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급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兜무,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황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영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감鄕城中, 高五丈. .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이때에 헌원(軒轅)24)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침에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25)와 기연(冀연)26)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급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27)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kyuwon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28)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29)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감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30)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감,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탁鹿(河)[河]31), 遷(徒)[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32)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수闊]遠, 不可得而詳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며, 게다가 단군이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역시 이치에 가까울 것이다.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1.【六鎭】: 조선 세종때 북쪽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세운 여섯 개의 군 주둔지로서,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온성(穩城)·종성(鐘城)·회령(會寧)이다.

 

2.【九夷】:《爾雅·釋地에는 「동방의 종족인 아홉 夷族과 북방의 종족인 여덟 狄族과, 서방의 종족인 일곱 戎族과, 남방의 종족인 여섯 蠻族을 통틀어 四海라고 일컫는다」라하여, '九夷'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단지 다른 종족에 비해 종족의 갈래 등이 많음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이를 동이의 아홉종족으로 정형화 하기에 이르렀다.《논어·자한편의 疏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는데, 玄토, 樂浪, 高驪,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 등이 그것이다」라 하였다.

 

3.《설문해자의 이(夷), 만(蠻), 융(戎), 적(狄).

1) 夷

[說文] 東方之人也從大從弓(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에서 유래하였다).

[注] (상략) 羊部에 이르기를 「남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蠻' 또는 '민'은 곤충(충)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북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맥'은 벌레(치)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羌'은 양(羊)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남의 종족을 가리키는 '북人'과 '焦僥'는 평범한 사람(人)에서 유래된 글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방의 夷만이 '크다(大)'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니 대인(大人)이라 할 만하다. 이인(夷人)의 풍속은 어질다고 하는데, '어질다'함은 곧 장수를 의미하므로 '군자의 나라'·'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생각건대, 하늘은 크고도 존귀하며, 땅도 크고도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도 존귀한 것이다. 크고도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夷'자의 전체(篆體)가 '大'자에서 유래된 것인 까닭에 '夷(동방)'가 '夏(중화)'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夏'라 함은 중국사람을 말한다. '弓'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숙신씨가 호시 또는 석노와 같은 것을 헌납한 것을 말한다. (하략)

2) 蠻

[說文] 南蠻(남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직방씨>에서는 '여덟 부류의 남방종족'이라 하였으며,《시경·이아》에서는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고는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왕제에서 말하기를 「남방을 일컬어 '蠻'이라 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각궁에서 「오랑캐 같은 행동을 하니」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蠻'이란 남방의 만인(蠻人)을 말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채사에서 「어리석게 준동하는 형땅의 오랑캐」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형만이란 형주의 만인을 말한다」하였다.

[說文] 타동從충(뱀의 종류로서 '충'에서 유래되었다).

[注] '蠻'자가 '벌레(충)'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蠻'이 뱀의 한 종류임을 말하는 것이다. 뱀이란 벌레를 말하는 것이고 '蠻'이나 '민'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글자가 '벌레'에서 유래한 까닭에 해당 부수의 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맥'이 치부의 끝에 놓이고 '狄'이 犬부의 끝에 놓이고 '羌'이 羊부의 끝에 놓이는 등이 같은 것이다.

3) 戎

[說文] 兵也(병장기를 말한다).

[注] (상략)《시경·소아》에 「그럴 때는 우릴 돕지 않는다네(烝也無戎)」라 하였는데, 그 毛箋에 이르기를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략)

4) 狄

[說文] 北狄也(북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적적(赤狄)은 이전에 중국에서 섞여서 정착하여 살던 북방종족의 일종일 뿐이다.《설문해자》의 蟲부에서는 남방의 종족을 '蠻'이라 하고 동남방을 '민'·'越'이라 하였으며, 大부에서는 동방을 '夷'라 하고, 羊부에서는 서방을 '羌'이라 하였고, 치부에서는 북방을 '맥'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맥'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과 '맥'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맥'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석지에 가로되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였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여덟 부류의 만인(蠻人)은 남방에 있었으며, 여섯 부류의 융인(戎人)은 서방에 있었으며,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은 북방에 있었다. 이순이 가로되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이라 함은 그 첫 번째를 일컬어 월지(月支)라 하며, 두 번째가 예맥(穢貊)이며, 세 번째가 흉노(匈奴)이며, 네 번째가 비우(비于)이며, 다섯 번째를 일컬어 백옥(白屋)이라 한다」고 하였다.《왕제의 명당위에서는 모두 「동방의 이인 . 남방의 만인 . 서방의 융인 . 북방의 적인」이라 하였다.

[說文] 本犬동(본래 개의 한 종류이다).

[注] 이것은 '蠻'·'민'이 본래 뱀의 한 종류이며, '맥'이 본래 벌레의 한 종류이며, '羌'이 본래 양의 한 종류인 것과 같은 예이다.

[說文] 狄之爲言淫벽也('狄'은 '음란하다.괴벽하다'라는 말이 된다).

[注] 이것은 「공자가 이르기를 『'맥'은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으니, '맥'이란 곧 악함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예이다. '惡'과 '맥' 및 '벽'과 '狄'은 모두 첩운으로 글자의 뜻을 새겼다.《풍속통》에 말하기를 「적인(狄人)들은 에비와 자식간에, 또는 제수와 시숙간에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면서 따로이 구별하지 않으니 '狄'이라 함은 편벽됨을 말한다. 그 행위는 도리에 어긋나 편벽되며 그 종류에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컨대 '벽'은 지금의 '僻'자이다.

 

4.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은 '치우씨(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 묘족의 분류와 연원은 오랜 옛적의 '구려(九黎)'·'삼묘(三苗)'·'남만(南蠻)'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중국)의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는 아주 오랜전부터 매우 많은 인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대에 걸친 번식과 힘든 노동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에 점차 부락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부락연맹을 '구려(九黎)'라고 부르는데 치우(蚩尤)를 수령으로 하고 있었다.《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서 「구려는 치우의 무리이다」 하였다.《서(書)의 <여형석문(呂刑釋文)>과《여씨춘추의 <탕병(蕩兵)> 및《전국책》<진(秦)>에서 고유(高誘)의 주석 등에 모두 '치우'가 구려의 임금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월한 지리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부단히 근면하며 개척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조국 동방의 강대한 부락으로 일약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황제(黃帝)가 수령으로 있는 또다른 하나의 부락연맹이 황하 상류의 희수(姬水)에서 일어나 황하의 하류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구려의 치우와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에는 탁록(탁鹿)에서 구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구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장강 중하류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묘족간사(苗族簡史)》제1장 族源, 貴州民族出版社 1985년.

* 묘요계苗요系 ―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옛날의 삼묘三苗가 곧 지금의 묘족苗族이라 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그것을 부인한다. 지금의 묘요는 곧 춘추 이후의 남만南蠻인데, 한漢 때는 무릉만武陵蠻, 그리고 육조六朝 시기에는 형옹주만荊雍州蠻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송 시기에 비로소 요요라 불려지고, 원 시기에 또 묘苗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청 대에 이르러 더우기 '묘족苗族'이라는 명칭으로 서남 지역 각 성의 토착민족들을 통괄하였었다.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서남의 민족을 셋으로 나누어 분석하는데, 오로지 명칭과 작은 갈래에 있어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묘苗와 요요는 실제로 하나의 민족이기에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그들의 주거지가 예전에는 장강 유역이었으나 지금은 물러나와 호남湖南, 귀주貴州, 광서廣西, 광동廣東 등의 산지에 거처하고 있다. .. 林惠祥 著《중국민족사》제1장 중국민족의 분류

* 묘족(苗族) 개괄.

  [분포 지역] 귀주성(貴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云南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사천성(四川省), 광동성(廣東省).

  [인구] 5,021,175명. (1982년 통계자료에 의한 수치이며, 장족(藏族) 1,338만, 회족(回族) 722만, 위구르족(維吾爾族) 596만, 이족(이族) 545만에 이은 다섯번째의 중국 소수민족이다.)

 

5.【加】

* 夫餘의 官名 '加'를 '家'자의 잘못된 번역으로 보거나 남자의 존칭으로 보아 '커'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高句麗語의 皆 및 新羅語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王 또는 大官의 칭호로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滿蒙系統의 汗(Han·Kan)·可汗(Gahan·Kagan)과 같은 말로 이해된다. 夫餘傳의 '加'는 部族長이나 官名에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는 원래 부족장을 의미하는 말인 '加'가 국가 형성의 초기과정에서 族的 紐帶感이 강한 單位政治體의 大小族長勢力이 연맹적 결속의 단계를 거쳐 집권적 국가의 지배신분층으로 결집되어 가면서, 점차 중앙의 官名으로 변천되어 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馬加·牛加·저加·狗加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윷 말판의 도·개·걸·윷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본 견해가 있어 왔는데, 이와는 달리 馬加의 馬는 '마리·마라'의 表音으로 보아 新羅의 麻立干과 같은 계통의 官名으로 보고, 牛加의 牛는 '우·위'의 音譯으로 보아 고구려의 于臺(優臺)와 같은 官名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徐榮洙 注.

* 「按, 加字當爲家字之誤. 猶今蒙古謂, 典羊之官曰和尼齊, 典馬者曰마리齊, 典駝者曰特默齊, 皆因所牧之物以名其職. 正如《周禮》羊人犬人及漢狗監之掌. 范蔚宗不解方言, 好奇逞妄, 殊爲준謬(생각건대, 加자는 마땅히 家자의 오자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몽고에서 양을 관장하는 벼슬을 '화이제'라 하고, 말을 관장하는 자를 '마이제'라 하고, 낙타를 관장하는 자를 '특묵제'라 하는 것과 같이, 모두 맡은 사물에 기인하여 그 직위를 이름한 것이다. 바로《주례》의 '양인'과 '견인' 및 한나라 때의 구감의 직위와 같다. 범엽이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며 망령된 것에나 만족을 느끼는 까닭에 매우 그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滿洲源流考》권18 국속3 注.

 

6.【幽燕】: 유주(幽州)를 포함하는 옛 연(燕)나라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 대략 요서와 하북지방을 가리킨다.

 

7.【太昊 伏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복희를 또는 복희(伏희), 복희(복희), 복희(宓犧), 포희(包犧), 포희(포犧)라고도 한다. 풍(風)씨 성이다.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짓고 서계(書契)를 만들었으며, 사냥하고 고기 잡으며 목축하는 것을 백성에게 가르쳤다. 진(陳)에 도읍하여 재위 115년에, 뒤로 15대를 전하여 무릇 1,26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8.【禹倬】: 고려 26대 충선왕 때의 학자. 관직에서 물러나 역학을 연구하였다. 송나라에서 정주학(程朱學)에 관한 책이 들어왔을 때 한 달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했다고 한다.

 

9. 손필본에는 '官職之' 이후 '性也∼偉哉'의 총 358자가 빠져 있다.

 

10.【唐堯】: 옛 성인으로 제곡(帝곡)의 둘째 아들이다. 이(伊)에서 태어나 기(耆)로 옮겼으므로 이기씨(伊耆氏)라고 하고, 처음에 도(陶)에 피봉되었다가 후에 당(唐)으로 옮겼으므로 도당씨(陶唐氏)라고도 일컬어지며, 호는 요(堯)이다. 역사가들은 당요(唐堯) 또는 방훈(放勳)이라 일컫는다. 그의 형 지(摯)를 이어 제위에 올라 덕스러운 정치를 베풂에, 백성들이 강구가(康衢歌)와 격양가(擊壤歌) 등을 지어 불렀다. 아들 단주(丹朱)가 어리석어 이인(夷人)인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다. 재위 98년이었다고 한다.

 

11.【虞舜】: 옛 성인으로 성씨는 요(姚)이다. 처음에는 견무(견畝)에 머무르며 효도를 다하니 그 곳의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당요(唐堯)가 그를 발탁하여 섭정을 시켰더니 사흉(四凶)[환두(驩兜), 공공(共工), 곤(곤), 삼묘(三苗)]을 제거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여덟 현인(八元)[백분(伯奮), 중감(仲堪), 숙헌(叔獻), 계중(季仲), 백호(伯虎), 중웅(仲熊), 숙표(叔豹), 계리(季리)]과 사물에 잘 화합하는 여덟 현인(八愷)[창서(蒼舒), 퇴애(퇴애), 도인(도인), 대임(大臨), 방항(尨降), 정견(庭堅), 중용(仲容), 숙달(叔達)]을 등용하여 천하를 크게 다스렸다. 섭정 30년에 제위의 선양을 받으니 유우씨(有虞氏)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호를 순(舜)이라 하며, 역사가들은 우순(虞舜) 또는 중화(重華)라 일컫는다. 후에 남쪽으로 순행을 하다가 창오(蒼梧)의 들녘에서 돌아가시니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이었다. 아들 상균(商均)이 어리석어 우(禹)에게 자리를 전하였다.

 

12.【月氏】: 秦·漢 시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으로 중국 史書에 우氏·和氏 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月氏는 春秋 時代 末부터 戰國 時代 末까지 蒙古고원의 西半을 지배하여 東方의 東胡민족과 內蒙古 방면에서 접경하고 있던 큰 세력이었지만, 秦 末 흉노의 침입에 의해 격파당하고 그 일부만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甘肅과 靑海의 두 省의 중간 산악지대로부터 黃河 상류지역에 잔존하였다. 월지는《漢書》에 유목민족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農耕·遊牧·狩獵을 병행한 森林民族으로 보는 설도 있다. 唐代에는 月氏都督府가 설치되었다.

 

13.【于전】: 중앙아시아 T.rim 盆地의 南邊에 있는 나라로서 漢·唐의 史書에는 于치國으로 되어 있는데, 西域南道의 代表國이었다. 그 외에도 烏纏·于遁·于殿·屈丹·喚那·壑旦 등의 異字 異稱이 있으며, 元代에는 황도·斡端·五端·忽炭 등으로도 쓰여졌다. 于치은 崑崙山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Yurung Kash川과 Kara Kash川에 걸친 大 오아시스國으로, 많은 부락이 散在하여 果樹裁培 및 농경으로 생활하였다.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이 특산품으로 중국과 이란 및 이라크 등지에 수출되어 于치國을 부유하게 하였으며, 東西交涉과 더불어 이 나라를 西域의 유수한 문화국으로 만들었다. B.C.2세기에 중국에 처음으로 알려질 즈음 이미 于치國은 번영기에 있으면서 東西貿易의 중계시장으로서 각 방면의 문화를 받아들여 다채로운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조로아스터敎가 유행하여 많은 佛寺가 건립되었다. 7세기에는 唐朝의 지배를 받아 이 나라에 沙毗都護府가 설치되어 安西四鎭의 하나가 되었다.

 

14. 대진국을 비롯한 서방에 대한 북애의 기록은《삼국지》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의 평론(評論)에 주석으로 인용된《위략·서융전(西戎傳)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 기록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15.【提擧市舶司】: 掌蕃貨海舶征각貿易之事, 以來遠人, 通遠物. 元祐初, 詔福建路於泉州置司(외국의 화물 및 외국과 통하는 바닷길의 선박,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세와 전매 및 무역 등에 관한 일을 비롯하여 외국인의 관할, 외국 물품의 유통 등을 관장한다. 원우 연간 초에 복건로에 조서를 내려 천주에 해당 관직을 설치하였다.) ..《송사》권 167, 지(志) 제120 직관(職官) 7.

 

16.【利瑪竇】Matteo Ricci(A.D. 1552∼1610)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태리 제스이트파 선교사.

 

17. 중국이 비록 일부 계층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역사에서 자신들의 중원 지역을 변방으로 보고 여타 지역을 내지(內地)로 본 적이 한 차례 있었으니, 바로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에 승려들이 인도를 내지(內地)로 본 경우가 그것이다.

 

18. 손필본에 '出胎∼也재'의 16자가 빠져 있다.

 

19.【救我! 救我!】: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단지 울음을 우는 것 뿐이다. 북애노인은 그러한 울음 소리를 듣고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며 최초로 드러내는 투쟁과 추구의 몸짓으로 보았으며, 그 소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리 글자와 함께 그러한 시각을 뜻 글자로의 의미도 함축시켜 표현한 것이 바로 '救我'일 것이다.

 

20. 손필본에 '戟∼今之'의 17자가 빠져 있다.

 

21.【고矢】: 고木으로 만든 화살. 고는 낙엽교목인 牡荊과 흡사하며, 주로 백두산과 그 북방 지역의 소나무 숲속에 자생하는 나무이다. 겉 모양은 가시나무와 같고, 잎은 느릎나무와 비슷하며, 나무의 재질이 습기에 영향을 받지않고 단단하면서도 곧아 화살대를 만드는데 적합하다.

 

22.【少昊 金天氏】: 상고 시대의 제왕.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少호)로도 쓰며 이름은 지(摯)이다. 태호 복희씨의 법을 닦았기에 소호라고 하며, 쇠의 덕(金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금천씨라 하며, 궁상(窮桑)에 영지를 가졌기에 궁상씨라고도 하며, 청양(靑陽)에서 나라를 일구었기에 청양씨라고도 하며, 죽어서 운양(雲陽)에 장사를 지냈기에 또한 운양씨라고도 한다. 곡부(曲阜)에 도읍하였으며, 재위는 84년이라고 한다.

 

23. 한영본에 '遷徙往來, 號令天下'의 8자가 빠져 있다.

 

24.【黃帝 軒轅氏】: 상고 시대의 제왕. 소전씨(少典氏)의 아들. 성은 공손(公孫)이며, 희수(姬水)에서 자랐기에 또한 희(姬)를 성으로 삼는다. 헌원의 언덕에서 태어났기에 헌원씨라고 부르며, 유웅(有熊)에 나라를 세웠기에 유웅씨라고도 부르며, 토덕(土德)으로 임금이 되었고 흙은 누런색인 까닭에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애초에 신농씨로부터 여덟 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자 유망이 폭악무도하여 동방의 치우씨에게 쫓겨나자 황제가 다시 치우씨를 몰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갑자(甲子)를 짓게 하였으며, 창힐(倉힐)에게 명하여 육서(六書)를 짓게 하였으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율려(律呂)를 정하게 하였으며, 예수(례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를 정하게 하였다. 또한 기백(岐伯)에게 자문하여 내경(內經)을 지어 처음으로 의약 처방의 길을 열었다. 그의 아내 나조(螺祖)는 또한 누에를 치고 실을 잣는 것을 가르쳐 의상의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고 한다. 10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25.【淮岱】: 회하(淮河)와 대산(岱山 卽 泰山)의 사이를 말하므로,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및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26.【冀연】: 기주(冀州)와 연주(연州)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연州)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및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27.【指南車】: 중국 고대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 수레의 바퀴와 수레 위의 신선상(神仙像) 사이에 톱니를 이용한 일정한 장치를 설치하여 수레가 비록 회전을 하더라도 신선상의 손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다.

 

28.【炎帝 神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강수(姜水)에서 태어 났기에 강을 성씨로 한다.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쳤다. 불의 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염제(炎帝)라고도 하며, 열산(烈山)에서 일어났기에 열산씨라고도 한다. 재위시 온갖 약초를 맛보아 그로서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저자를 열어 재화의 유통을 처음하였다. 애초에는 진(陳)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노(魯)로 천도하였으며, 12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29.《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탁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군사와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벌판에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로서 황제가 되었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 황제가 그에 따라 그들을 정벌하여 평정시킨 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 치우씨를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한 뒤에 거듭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라 하였으니 여전히 저항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30. '치우(蚩尤) 사당'에 대한《한서와《후한서의 <지리지(地理志)> 기록

* 東郡 … 壽良, 蚩尤祠在西北제上. 有구城(동군 … 수량현은 치우의 사당이 그 북서쪽 제(제)의 위에 있다. 구성이 있다). ..《한서》권 28 상, <지리지> 제8 상. 동군(東郡) 條.

* 東平國 … 壽張 春秋曰良, 漢曰壽良, 光武改曰壽張. 有堂聚, 故聚屬東郡.〔《地道記》曰: 「有蚩尤祠, 狗城.」《皇覽》曰: 「蚩尤총在縣감鄕城中, 高七丈.」〕(동평국 … 수장현은 춘추 때는 량(良)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수량이라 하였는데, 광무제 때 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취가 있는 까닭에 동군에 귀속되어 있다.〔《지도기》에 이르기를 「치우의 사당이 있으며 구성이 있다」 하였다.《황람에 이르기를 「치우의 무덤이 현의 감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일곱장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지(志) 제21, <군국(郡國)> 3. 동평국(東平國) 條.

 

31.【河→阿】:《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원문에 의거하여 河를 阿로 수정한다. 正義에서 阿자에 대해 주석하기를 「廣平曰阿. 탁鹿, 山名, 已見上. 탁鹿故城在山下, 卽黃帝所都之邑於山下平地(넓고 평탄한 것을 '아'라고 한다. 탁록은 산 이름으로 이미 윗글에 나타나 보인다. 탁록의 옛 성이 그 산 아래에 있으니 곧 황제가 산 아래의 평지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라 하였다.

 

32.【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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