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광주교구의 터전에서 성서형제회의 꿈이 회복되기를..
+ 찬미예수님
2000년이 되기이전에 저는 친분이 있는 신부님을 뵈러 벌교에 내려간적이 있다
서울서 기차를 타고 순천에 도착했다. 저녁미사를 마치고 급히 순천으로 오신 신부님을
만났다. 주일 미사시간이 꽤남았는데 신부님은 서둘러서 외출을 하신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옆동네에 있는 공소에 미사를 드리고 와서 본당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했다. 그당시 인구가 만명정도도 안되었든곳이다. 한때에는 인구가 늘어서 시로 승격되기만을
기다린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젊은이들도 아이들도 근처 도시인 순천으로 유학간다고 했다.
지금도 벌교역이 있어서 광주에서 출발해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철길이 있지만
하루에 몇차례가는지 어디까지 가는지 잘알려지지않고 있다.
광주교구에는 지금 70군데의 공소가 있다고 한다
몇 년전에 들렀던 신안군에는 수많은 섬이 있는데요 성당이 몇군데 있는지는
잘모르지만 자은도주변에는 2군데 성당이 있고 몇 개의 공소가 있다.
큰섬이라고 하지만 인구가 2천여명수준이고 신자가 200명을 크게넘지 못하고
성당에 나오는 인구도 채100명이 안될 것이다
여기에 몇군데 공소를 다니느라면 본당신부님 혼자서바쁜 일정을 보내는 것 같다
대부분 부족한 인력으로 농사를 짓는다. 차편을 이용하기 보다는 성당교우들은
주일 해안가를 통해서도보순례를 한다고 했다
1830년경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빠리외방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온다
그리고 조선인 사제가 탄생되나 김대건신부님은 불과 1년사목이후 치명되셨고
최토마사제가 조선을 두루다닌다 어느때인가 조선에는 8개의 성당이 있고
나머지는 공소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몇 년전에 전주교구에서 발행되는 쌍백합지에서
대구교구장이 호남지역을 순레하는 모습의 기록을 보았다
그때에는 아마도일제시대인 것 같아보인다. 기차를 타고 가셨다는 기록이 있었다
지금 광주교구의 공소는 운영에 다소어려움이 있어보인다
자은성당에서 만나본 신자들은 적은수이지만 열성적이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바쁜생활을하기에 사목을 하는데 도움을 받기가어렵다고 늘 신부님은 말씀하신다
지금은 신안군의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큰 다리가 놓여있지만
육지와 연결된 섬에서 볼때에는 눈으로 봐도 바로앞에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배가 운영되지않을만큼 먼바다의 높은 파고이다
신부님은 이곳은 강원도 첩첩산골보다 더 외지라고 한다
늘 다가갈수가 없다고 한다.
저도 처음 신부님을 만나러가기위해서 목포시외버스터미날에서 멈 때리고 있었다
그때에 그섬으로가는 봉고차를 만나지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교구는 분명히 대교구이다
서울. 수원.대구 대교구에 비해서 인구도적고 당연히신자수도 적은 편이지만
일찍히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곳이라고 한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서 시작해서 내포지방과 호남지역으로 퍼진 것은
평신도사도들의 힘이큰것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로 와서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충청도의 박달재고개이며 문경과청송에서의 높은산은
그분들이 숨어살수가 있었다고 한다.
평신도들의 숨은 노력이 컸다고 한다.
아둔한 저의 머리로 마음만 복잡을뿐 제대로정리가 안되어 아쉽기만하다
소공동체운동이라고 하지만 아프리카선교프로그램을 이용하는지도 알수가 없고
하루에 몇가지생각을 했다가 지웠다가 한다
2020년초에 창설자신부님이 남기신자료정리하러 서울로 올라갔다
코로나사태가 확장되면서 서둘러서 그자료중몇덩어리를 갖고 내려왔다
내려와서 읽어보면서 정리해서 워드로치고 게시판에 올렸다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부님의 그 열정을 조금씩이나마나 바라볼수가 있었다
그를읽을때에 그 느낌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어떻게 잘 표현할까 그느낌을 우리가
유지할까하는 마음이었지만 제머리속에서 잘 정리되지않았다
그래서 그의미를 되새기기위해서 제2차바티칸공의회자료나 그이후의 여러교황의
사도적권고등 여러주교들의 흔적이 담긴문서를보았다
너무나도 많은 분량이며 말이다. 이사를 다니면서 과거에 서울에 살때에는 매번 교황문서가
나오면 단행본으로 발간하고 저는 이를 구입해서 읽어보곤했었다
그때에는 그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다
지금은 조금씩 알아듣기는 하지만 이를 어떻게헤쳐나가야 할지는 도무지 가늠이 잡히지않는다
때로는 성가를 듣기도 하고 여러신부님의 관련강론을 유투브에서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정리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들 저보다 다 경험이 많고 똑똑하신분이 많으시지만
이들과 정부교류나공유가 생각만큼이 쉽지않음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성서형제회가 태어난 배경이 된 이곳이 그당시로 재현되기를 고대해본다
주님,자비를 베푸소서
순교자이시여 저희를 위해서 빌어소서 아멘
2020.10.6 아침햇살을 받으면서
코로나 한가운데 대구에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