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시대를 위한 장사문화의 진화
잘 죽는 게 잘 사는 삶의 정점
근세기 들어 우리나라는 이른바 ‘압축성장’이란 걸 했다. 선진 제국들이 수 백 년 걸린 것을 우리나라는 반세기만에 뚝딱 달성했다. 그러니 세상이 얼마나 달라져 있겠는가? 세상이란 게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건데 우리 사회는 마치 KTX를 타고 차창 밖 모습을 보는 것처럼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해 왔다. 어느 사회, 국가이든 가장 늦게 변화한다는 죽음관련 문화, 특히 장사문화도 어지간히 많이 변해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나 죽음을 둘러 싼 공간 구성이 많이 변했다. 죽는 곳이 달라졌고 죽어서 영원을 누리는 공간, 즉 묘지도 많이 변했다. 한마디로 죽음과 관련된 기본 토대가 변한 것이다. 토대가 변했으니 그에 따른 문화, 의식, 콘텐츠가 변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다.
예전엔 많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적어도 큰 아들 내외는 임종을 지켰고, 갑작스런 죽음이라도 임종직후 많은 가족들이 집으로 모여들었다. 고인은 안방에 병풍을 치고 그 뒤에 모셨고 마당엔 천막을 치고 여러 친족들과 동내사람들이 참여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들은 넓지 않은 아파트에 전국, 아니 전 세계에 걸쳐 흩어져 산다. 조문객을 받을 천막 칠 마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부모의 병수발과 임종을 지킬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젠 대개 낯선 병원에서 죽고, 임종에서 장례에 이르는 과정에 참여하는 가족이나 친지들 수도 많이 줄게 된 것이다. 고인이나 상주의 지인들은 잠시잠깐 들러 조의금 내면 끝이다. 장례가 낯설어지고 상업화 되었다. 둘만 낳아 잘 키우다 보니 자식들도 많지 않고 그나마 바쁘다 보니 부모의 마지막 여정을 챙기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니 으레 죽음을 맞고 준비해야 하는 게 죽음에 이르는 당사자들의 몫이거나 상업화된 조직들의 몫으로 변한 것이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집(그래서 幽宅이다), 즉 묘지도 많이 변했다. 예전에야 동내 인근 야산양지 바른 곳에 묻혔다. 더 먼 옛날엔 삶의 가치가 봉분의 크기와 석물 수에 따라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70%이상이 화장돼 집단화된 봉안당, 봉안묘 아니면 나무 밑에 모셔진다. 지금과 비교해 많지 않은 인구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 때야 가까운 야산에 묘지를 마련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산이 없는 가족이라도 이웃 땅 임자가 땅을 내놓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도 많이 늘었고 그것도 비좁은 도시에 모여 산다. 자기 땅을 이웃에게 묘지로 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화장률은 급증했고 묘지는 집단화된 것이다.
진화란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으니 죽음도 변하고 묘지도 변했다. 세상 변한 것에 따라 변한 장사문화를 두고 호불호나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세상이 산자만의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공존하는 공간임을 전제한다면 작금의 변화모습이나 그 지향에 잘못된 것들도 많다.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분명 불편하고 두려워 애써 외면하고 무관심해 하고 싶은 과정이다. 종종 화장장, 장례식장, 묘지와 같은 장사시설은 산 자들에게 방해되고 혐오스런 존재이다.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우리 삶의 필연적인 한 과정인데도 말이다. 피할수록 가까이 다가서고 무관심해 할수록 두려워지는 게 죽음인데도 말이다.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묘지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존재 증명 방식이다. 장례와 묘지는 우리의 존재의의, 가치, 삶의 영원성, 불멸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죽어서도 한 때 이 세상을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음을 증명하는 게 바로 다름 아닌 장례이고 묘지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면, 자신이 한 때 존재했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세상살이는 꽤나 무의미해 질 것이다. 아니면 도를 넘는 비관주의나 낙천주의가 판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나 우리가 누리는 문화 대부분은 실상 우리의 개체적 삶이 궁극적으론 죽음에 이르기는 해도 여전히 삶은 의미 있고 가치 있음을 증명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죽음은 시간에 유한성을 부과해 삶의 순간순간들을 보다 값지게 하고 묘지는 한 때 이 세상을 살았던 개체적 삶을 증언해 주는 표식이다.
한 개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최종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임종과정이고 장례식이고 묘지이다. 그래서 죽음은 바로 삶의 정점이 된다. 그래서 잘 죽는 게 바로 잘 사는 것이다.
최근 죽음이나 장사시설 등 장사제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 국가의 발전단계상 일정 소득 수준, 즉 1인당 GNP가 15,000불 이상이 되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우리 앞서 걸었던 선진국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이에 부응해 정부의 관심과 개입도 대폭 늘었다. 시대변화에 맞게 관련법인 장사등에관한법률을 끊임없이 개정해 왔고 보건복지부 노인복지과 내에 전담 사무관도 배치했다. 장사문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정부출연기관인 한국장례문화진흥원이란 것도 생겼다. 국민들의 편의를 위해 장사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제공하고 화장장을 예약할 수 있는 이하늘장사정보시스템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보의 양이나 질은 미흡하다. 특히 분묘 등의 정보는 없다.
하기야 정부가 전국의 분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갖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간 산 사람들의 집(주택)은 세세하게 파악해 왔지만 죽은 사람들의 집(유택)은 방치해 왔던 결과이다. 물론 정부도 그 시급성을 알고는 있다. 몇 해 전 보건복지부, 지적공사와 함께 전국에 산재해 있는 분묘를 전수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그런데 드는 돈이 천문학적이라 유야무야 됐다. 물론 산 사람들을 위한 예산도 부족한 판에 죽은 사람들 집 파악하는 데 혈세를 쓴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매년 조금씩이라도 예산을 편성해 장기적으로는 전국의 모든 묘지를 파악해 그 정보를 체계화해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을 사람, 곧 산 자, 전 국민을 위한 예산집행이 되는 것이다. (2015.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