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박세림 선생의 본관은 밀양이며 아호는 동정, 동민, 남관, 우관이다. 불명佛名은 현각이라고 하였다. 1925년
4월 20일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서 부친 박헌용과 모친 유씨 사이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정환경은 엄격한 부친의 영향과 조모의 불교적
가정교육의 영향이 컸다고 보겠다. 부친은 강화의 향토사가로서 『강도지』를 저술하였고, 한문학과 서예의 도를 가르쳤으며, ‘동정’이라고 아호를
지어주셨던 분이다. 8세 때 일이다. 후에 동정이 5년간 예총 경기도지부장 시절 부친의 강도지(江都誌) 옥고를 안고 수원에 있는 도청에 드나들며
책자를 만들고자 애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정의 조모인 밀양 변씨(1862~1932)는 구한말 망국의 통한을 품고 자진自盡하신 종하
어른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분이다. 엄격한 가문에서 태어난 조모는 학문과 재질이 뛰어나셨고, 평생 참선과 염불에 정진한 분으로 동정의 아버님과
고모 남매를 키우시며 혈속인 동정을 3대 독자로 맞아 교육하였다. 천자와 한글을 가르쳤고, 동몽선습을 마칠 무렵 71세로 작고하셨다. 조모의
간찰簡札 3장이 남아있는데, 궁체로 쓴 글로 친지에게 보낸 것을 아버님께서 수집 후 간직한 것을 동정이 가보로 남겨두었다. 그 간찰의 말미는
애모에 넘친 글로 차 있다. <사진1> 궁체로 쓴 동정 조모님의 서신 일부(대전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간찰 세 쪽은 나의 조모님
밀양변씨께서 남기신 많은 글 중에 오로지 한 점 유품으로 남은 글이다. 조모님께서는 구한말 망국의 통한을 품고 마침내 자진하신 진의 조헌중년대
오위장 종鐘자 하夏자 어른의 무남독녀로 1862년 철종 12년 임술 5월 18일 세상에 나셨다. 엄격한 가문에 태어난 위에 천부적으로 학문과
재질이 뛰어나셨음은 물론 평생 참선과 염불에 정진하셨고, 어질고 청명한 성품으로 근면과 검소로써 가정을 다스렸으니 대소 근친간의 화목과 우애가
두터우셨으며, 이웃을 돕는 정성 또한 융숭하시어 높은 예절과 법도가 향리에 그윽하시었다. 이에 조모님께서는 나의 아버님과 고모 남매를 키우시며
그 아들의 혈속인 나를 받으시매 그 기쁨이 더할 수 없으셨다. 내 나이 여섯 살부터 천자와 한글을 가르치심에 이르러 여덟 살 나던 해 내가
동몽선습을 마치던 무렵 1932년 임신 3월 6일 오호애재라 향년 71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이제 그 높으신 부덕과 자비로우신
교훈, 갈수록 사무치는 은총, 영원히 후대에 전하려 함이니 생전에 친지에게 보내셨던 이 글은 아버님께서 수집해 간직한지 어언 40여년 많은
풍상에 누누이 묻었던 티를 털고 손질하여 이에 기리어 영세토록 가보로 삼기로 하노라. 1974. 甲寅 正月 不肖孫孫 世霖 泣血 謹書 부친은
동정이 15세 때 작고하셨다. 태어난 황청리라는 곳은 다른 동네에 비하여 유식한 동리인 듯하다. 한학을 배우는 학반學班이라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청리라는 곳은 새우젓을 생산하는 어촌이다. 지금도 친척들이 살고 있으며, 당시 새우젓과 소나무를 싣고 마포 포구에 왕래하기도 한
고장이다. 모친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으며 효도가 극진했다. 모친 역시 3대 독자를 아끼었다. 동정은 지금의 박문초등학교를 다녔으며, 3학년
시절의 붓글씨가 지금도 남아있다. 중학교는 신흥동에 있는 해성중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의 남중학교이다. 집이 내동 179번지에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이곳이 인천의 본적이 되었으며, 그후 중구 관동 2가 4번지에서 결혼 후 작고 때까지 살게 된 것이다.
<사진2> 동정의 박문초등학교 3학년 때의 글씨(1934년) 1945년 8월 15일 동정은 인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이 폐망하여
인천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들은 귀국하였다. 이듬해 22세 때 이의남(李意男) 씨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여기에서 태병이(사망)와 동생 부향(현재
서울 반포에서 서예학원 운영), 부곤이를 낳았다. 처조카는 문인화가 취정 이준구다. 1950년 6ㆍ25사변을 겪었다. 수복 후에는 서울에 있는
동양 한의대에서 수학하였다. 가정이 있는 형편에서 가차를 타고 통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5분마다 있는 열차가 아니었고
하루에 몇 번 없는 화물칸 열차에 연착이 보통으로 있는 시대였다. 서예에 몰두하다보니 1954년경 3년 중퇴에 이른다. 해방을 맞이한 후
6ㆍ25사변까지의 5년간은 혼란기였다. 인천은 인구가 고작 20만이 조금 넘는 항구도시로서 해외 일본 중국에서 귀국선을 타고 유입되는 사람들,
북한에서 만주 등지에서 내려오는 귀국인들, 좌익과 우익과의 싸움, 신탁통치 반대 데모, 미군정 하의 시대상황, 우익 젊은이들은 대동청년단의
일원이 되고, 먹고 사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시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예술인들은 누가 있었을까. 인천에는
김영건, 이무영, 최석재 씨가 있었다. 서양화가이다. 주로 루팡다방에서 모였다. 이 세분은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한 분들이다. 상해에서 우문국,
유희강 씨가 귀국 귀환하였다. 이경성 씨가 일본에 법률공부를 하고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문화재와 유물을 찾아 모을 때이다. 인천중학교에서는
해주에서 내려온 김학수 선생이 있을 때이고, 동산중학교에서는 김찬희 선생이 미술교사로 재직할 때이다. 숭의동 삼성병원 허리복 원장이 서예를
틈틈이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