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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혹은 약한 당나귀 또는 낡은 멜빵
김익하
천백도 입에서 거친 말투가 사라졌다.
말수 또한, 현격히 줄었다. 본디 구관조의 가성假聲까지 듣길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했다. 하이에나처럼 내습한 낙하산 인사로 회사 이사직에서 불시에 쫓겨난 예순넷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누구에게나, 또한 때와 장소조차 가리잖고 닥치는 대로 목청을 높여 거칠게 뱉어냈다. 물론 욕설도 마다치 않았다. 올해 일흔넷이니 험한 입으로 거의 십 년 동안 살아온 셈이다. 거칠고 부지런한 입심에도 ‘넌 지껄여라, 욕설이 내 배 째랴. 누가 뭐라든 난 두 귀를 틀어막고 무소뿔처럼 혼자 갈 뿐이다.’ 그런 세태 환경에 절망했든지 마땅히 한마디 해야 할 정황임에도 요즘 와서는 실어증 환자처럼 입마저 굳게 다물었다. 입뿐 아니라 시선 끝조차 초점을 잃은 채 허공으로 떠돌았다.
천백도 거친 입심을 큰아들이 몹시 못마땅해 했고. 맏며느리조차 민망스럽게 여겨 자릴 슬며시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알면서도 기어이 몇 마디쯤 내지르던 사람 입 끝이 자물쇠로 채운 듯 조용하니 오히려 넋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찢어져 소리를 잃은 북과 같아서 그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 변화낌새를 가장 눈썰미가 빠른 맏며느리 촉수에 먼저 닿았다.
“당신, 그걸 알아? 아버님이 요즘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맏며느리는 그런 조짐이 혹여 건강 이상에서 오는 병세가 아닐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 안색을 살폈다. 한 지붕 밑에 기거하지 않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이들과 갈 때나 밑반찬을 챙기려 드나들 때마다 거북스럽게 들어야 했던 말들이 천백도 입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기에 아랫사람으로서 걱정되기도 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병원에 가 봐야 할 정도였어?”
“아직 병원까지 가시지 않을 만큼 건강은 좋으시잖아, 그런데…….”
“그런 데라니?”
“말씀하시는 투가 완전히 달라지셨어.”
“세상 못마땅한 일에 일일이 격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 천백도 씨가 아니지. 아냐 아버지가 그러실 리 없어. 당신이 뭔가 잘못 보았을 거야?”
“아니라니까. 어제오늘만 아니야. 말씀 끝이 순해지셨어. 그리고 분명 말수마저 줄어들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꼴 사납다면서 시뻘겋게 얼굴까지 붉혔는데 잠자코 있을 분이 아닌데, 혹 치매 전조는 아닐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으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돌변해도 되는지 모르겠어?”
낌새는 일찍부터 있었다. 다만 맏며느리가 천백도의 변화를 뒤늦게 알아챘을 뿐이다. 천백도는 블로그와 카톡부터 멈췄다. 비록 컴퓨터와 휴대전화기의 프로그램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하지만, 세태의 못마땅한 일과 여행담, 그리고 야생화 사진을 부지런히 올리던 블로그와 SNS로 떠도는 온갖 것들이 오가던 카톡에 젊은이 못잖게 열성을 보였었다. 딴엔 그것으로 현실참여라는 흐름에 소외되지 않는다는 자부심마저 느껴가며 세상과 소통하는 한 방편으로 여겨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것을 검도로 대나무 중동을 에듯 냉정하게 끊었다.
그는 어느 날 엉뚱하게도 갖은 쓰레기가 모여드는 플라스틱 아일랜드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잠들었는데, 쓰레기더미에 갇혀 버둥거린 악몽을 꾸고 나서 블로그와 카톡을 망설임 없이 끊었다. 그때야 비로소 지금껏 그런 하찮은 쓰레기에 묻혀 구질구질한 세태에 휩쓸리며 혼몽하게 살아왔다는 자책감이 불현듯 들었던 탓이다.
다음은 퇴직자 쉼터에 나가던 발걸음도 끊었다. 회사에서 퇴임자를 위해 마련해준 쉼터에는 언제나 옛 동료와 소통의 통로가 있어 사회 구성원에서 소외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본의가 아니라 줄을 잘못 섰다가 권고사직 형태로 잘리긴 했으나, 눈 뜨자마자 나가서 동료들의 근황을 들으며, 또 허풍과 위선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자칭 지도층 인사의 구린내 나는 뒤를 게거품 품고 비아냥거리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든가, 바둑으로 소일하다 끼리끼리 모여 점심까지 챙겨 먹고, 간혹 회사로부터 산업시찰 명목으로 보내주던, 나들이에도 빠지지 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걷는 방향조차 잃은 듯 발걸음마저 딱 끊었다. 그러니 수시로 울리던 휴대전화기도 이제 숨통이 죽어 있다가 이따금 오줌을 지리듯 부르르 떨며 띠링띠링 시보만 간간이 알렸다.
그다음 천백도가 한 일은 방송 뉴스와 신문을 외면하고 혼자 생활에 적적함을 들어주었던 구관조마저 가게에다 내다 팔았다. 방송은 진영논리에 물들어 가는 편향뿐 아니라 이제 양심에 철판마저 깔고 왜곡에서 조작까지 서슴지 않는 딴따라 나팔 소리로, 또 온갖 너절한 신상 잡담이 소음으로 그의 귀를 긁었다. 그리고 일부 곡필로 써대는 글로 신문은 찌라시보다 못한 문자 걸레쪽이 되어버렸다고 불신하기 시작하다 끝내 신문 구독마저 포기했다. 또한, 구관조는 제소리를 감춘 채 흉내소리조차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변함없이 내뱉기에 무의미한 공해로 고막만 시끄럽게 했으므로 내다 팔았다. 그것들을 멀리하니 주변에서 갑자기 시끄러움이 줄어들어 비로소 혼몽한 정신을 겨우 간추릴 수 있었다. 천백도 그런 급격한 심리 변화에 쉼터 친구들이 우려를 나타내며 충고했다.
“어이 천 이사, 방송뉴스와 신문조차 보지 않으면 세상일에 어두워지지 않아?”
“눈 뜨고도 제대로 못 보는 당달봉사로 살기보다 눈과 귀를 막고 사는 게 오염되지 않아 좋잖겠어?”
“그리 살다 보면 갈라파고스에서 사는 동물과 같이 이상한 꼴로 진화할 거야.”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건 도덕성 때문인데 그걸 상실한 사회에서 인간이 짐승보다 낫다고 어떻게 당당히 우기겠어?”
갑자기 은둔자로 변해버린 천백도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자연히 시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변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조차 모르겠어.”
퇴근한 남편의 옷을 받아들며 맏며느리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도 밑반찬을 챙겨놓으러 갔는데, 천백도는 보던 잡지에서 잠깐 눈을 들어 ‘응, 왔느냐?’ 했을 뿐 아무런 뒷말이 없었다. 옛적처럼 으레 신문을 보면서 거친 말을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내뱉어야 마땅한 분위기인데 적막을 느낄 만큼 조용하기까지 했다. 맏며느리는 천백도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듯 냉장고를 천천히 정리하며 흘끔흘끔 반응만 기다렸지만, 천백도는 ‘반찬이 아직 잔뜩 있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 말만 감정 없이 던졌을 뿐, 주변 인기척에는 들은 대척도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런 상황을 맏며느리가 남편들에게 전했던 것인데 큰아들은 짐짓 놀라며,
“이거 병원에 가서 심리상탤 체크까지 해야 할 상황 아냐, 허 참!”
가볍게 혀 차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가볍게 웃을 일 아니야. 무엇엔가 몹시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았어.”
맏며느리 눈빛에는 여전히 궁금증이 자글자글 묻어있었다.
“대체로 당신 말은 잘 들으시는 편이니 한번 넌지시 당신이 물어보는 게 어때?”
큰아들은 그저 마지못해 대거리하듯 대답조차 데면데면했다.
“이 이 봐. 어떻게 그런 걸 내가 직접 물어볼 수 있어. 당신도 신경 써서 한번 지켜봐. 당신 아버지 일인데 그리 무심하면 안 되지.”
“음 우리. 엄마 제삿날까지 지켜보도록 하는 게 어때?”
“맞아 아버님은 어머님 제삿날에는 여느 날보다도 더욱 감정이 예민해지곤 하셨어. 올해도 그러실 게 분명해.”
하긴 맏며느리가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어머니 제삿날이 낼모레로 코앞에 와 있긴 했다.
*
천백도는 어느 날 외출했다가 ‘한 두어 시간쯤 걸리려나.’ 그렇게 귀띔했던 예측 시간을 앞당겨 일찍 귀가했다. 물론 외출할 때 들고 나갔던 종이가방은 그대로 천백도 손에 들려 있었다.
“아니 아버님, 두 시간쯤 걸리실 거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금세 오셨네요.”
맏며느리가 천백도 돌아올 때까지 세탁기도 돌리면서 넉넉하게 기다리다 제 아파트로 돌아가리라 작심하고 있던 차에 이내 되돌아왔으니 궁금증이 앞섰다.
“지금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려고 굴다리 밑 구두수선 집에 갔더니 문을 닫았다더구나. 물어보았더니 문을 닫고 고물 전자제품을 거두러 다닌다더라. 그러니 그냥 올 수밖에…….”
대꾸하는 천백도 표정은 벌레를 씹은 듯 꾸겨져 있었다. 세월이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지 않고 저만 휘딱 가버리고, 기아棄兒로 버려진 처지가 황당하고 분해서 배신감마저 느꼈던 모양이다. 세월은 생각보다 빨리 달아나 우물쭈물하다간 놓치고 만다는 걸 비로소 체득했다는 표정이다.
“아버님도 차 암, 요즘 구두 뒷굽 갈아 신는 사람 어디 있어요. 회사창고 방출 행사장에 가면, 사오천 원짜리 신과 이삼만 원짜리 양복이 넘쳐나는 판인데요.”
“들녘이 풍년이라서 내 곳간 쌀독에도 곡식이 넘쳐나는 건 아니지 않으냐?”
손님 하나만 태우고 가는 택시를 보면 뭔가 돈을 헤프게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천벡도에겐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의 시대처럼 같은 기름값이면 택시는 마땅히 손님을 꽉 차게 태우고 다녀야 정상으로 보였다. 물자가 흔해 헤프게 낭비하는 세태가 변해가는 세상과 무관하게 더러더러 그의 감정을 굵었다.
“아버님, 어디 입을 것만 그런 줄 아세요. 아주 작은 동네 슈퍼마켓 바깥에 쌓인 물건들을 보세요. 그리고 반 넘게 남은 채 버스정류장에 버려진 일회용 음료수 잔들을 보세요. 여기저기 먹을 거도 넘쳐나잖아요. 그리고 티비 프로도 온종일 온통 맛있는 걸 먹자고 난리잖아요. 또한, 수도권 중심으로 쭈볏쭈볏 일어서는 아파트도 앞으로 집들이 넘쳐난다는 소릴 듣지 않겠어요?”
“네 말마따나 나라는 건국 이래 최고의 활황기를 맞았다. 급성장으로 축적된 부가 곳곳에 쌓였다. 마치 한 해에 모두 형상을 갖춘 대나무같이 외양은 모두 그렇게 보일 만큼 화려하다. 그런데 물자와 돈은 넘쳐나는데 국가 능력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갑자기 성장해서 불어난 풍요를 담아내고 그것을 관리할 역량이 부족하단 말씀이시네요?”
“경제를 공부한 어미 말이 맞다. 너도 늘어난 국부와 풍요를 담아내고 관리할 나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테지? 그런데 늘어난 부를 화수분처럼 여기고 있으니 탈이다. 사고방식이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팔던 때에 익힌 버릇대로 제 주머닛돈으로만 여기는 총수가 감방에 가고, 예전에는 명예를 얻으면 이름이 더럽혀질까 봐 재물을 경계했는데, 요즘 관리들은 목민관의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천출 노비가 구실을 얻은 듯 재물을 탐하기 위해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느냐? 그러니 행정관료나 법관들이 본분에 어긋난 짓을 하다 연일 신문에 도배질이나 하고, 정치인은 국가관과 서민을 위한 봉사보다 이권에 개입하여 사복만 채우려다 보니 국민으로부터 쓰레기 취급받는 게 아니냐? 모두 국가관에 대한 사명감의 결핍과 국정의 역량 미달은 물론 도덕성 결함에서 오는 현상이다.”
“모두 그걸 성장통이라 받아들이면요?”
“그건 핑곗거리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어린아이 작은 주머니에 오만원권을 구겨 넣고 다닌다고 잘 사는 나라라면 그건 우스갯소리에 가깝다. 국정을 감당해야 할 국가경영자들의 정신적 능력은 그 축적된 부에 훨씬 못 미치고 있으니 하는 짓마다 우왕좌왕이다. 얼핏 거대한 국가 예산의 숫자만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직 눈앞에 쌓인 부의 활용방법을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서 찾지 못한 채 그것을 어떻게든 성급하게 갈겨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구덩이에다 지렁이시체를 끌어들이는 개미역사와 같아 참으로 어렵게 일으켜 세워놓은 나라가 어느 순간 맥없이 무너져 하류 국가로 전락할까 봐 걱정이다.”
“국가기능의 다변화로 관리 부분이 갑자기 팽창하니 관리능력에 부친다는 말씀이네요. 그래서 사회안전망조차 대책도 없이 여기저기 터진다는 말씀이고요.”
“불어나는 뿌리에 화분이 터지듯 관리가 미숙한 국가의 사회안전망은 늘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있지. 그런데 터졌다 하면 감당을 못하고 쩔쩔 헤매고 있어. 관리 매뉴얼이나 데이터, 또한 경험마저 없으니까. 터지면 수습하여 대책을 세우기보다 빠져나와 떠넘길 사람을 찾거나 핑곗거리와 거짓말하기에만 혈안이 되지. 넘치는 부를 처음 감당하려니 힘에 부쳐 잔꾀로 눈속임하려니 시행착오는 당연할 게 아니냐. 다시 말해 사고는 낡은 지겟가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짐은 너무 많고 무겁지. 짐을 얹기만 해도 부러지기 십상에다 멜빵까지 낡았다.”
“한마디로 국가관리의 역량부족이네요.”
“역량도 부족한 터에 정직하지도 않아. 일이 터졌다 하면 수시로 구실을 달아 말장난으로 때우려 품격 낮은 이벤트를 벌여 시야만 가리려 꼼수까지 쓰지. 공직자가 국민 앞에 정직하지 않다는 것은 국가에 큰 부담이 되니 문제야. 이제는 많이들 배워 어리석은 국민은 차가 다니지 않는 산골짜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요즘 국민은 인형극 뒤에서 움직이는 손가락 그림자를 보고도 극 속에 숨은 메시지를 민첩하게 읽어낼 만큼 이기적으로 똑똑해졌어. 그런데 국격을 높이려는 지도자가 없는 나라의 국민만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국민이 국가의 짐을 잘못 맡긴 거지. 마치 말에 실어야 할 짐인데, 무게를 알지 못하여 당나귀 등에 얹어놓았으니……. 그런데 오늘도 왜 금세 들통 날 그 짓을 고집부리며 계속하려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쩝-.”
천백도 아내는 예순 문턱에서 죽었다. 매련한 성품이 아닌지라 그냥 우물쭈물하다가 때마저 놓친 폐암 때문이었다. 유품을 정리해도 슬픔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큰아들은 사십구재도 지나지 않았는데, 천백도에게 물어왔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품새를 보면 딴에는 몇 며칠 속깨나 앓은 듯했다. 물론 형제 내외들 의견이 부합했기에 맏이로서 떠맡고 나선 총대였다.
“아버지가 재혼하실 의향이라시며 저희 눈칠 보시지 마십시오.”
“재혼이라 했느냐?”
“예, 아버지의 재혼요.”
천백도 입에서 거친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망할 놈 새끼들! 아비를 암내 맞아 대고말고 나대는 수캐로 아느냐? 인간 부부관계가 꼭 짝지기에만 한정하는 게 아니다. 인생에서 짝 하나면 몫은 다했다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거다. 그런데 살 비비던 마누라 죽고 무덤에 풀도 마르지 않았는데, 재혼한다고 뻐젓이 주례 앞에 서 두 번이나 백년해로하겠다는 위인들 낯짝을 보면 속에서 신물에서 쓴 물까지 치밀어 오르더라.”
천백도는 짝으로 맞은 아내에 대한 신념은 돌에 박힌 쇠꼬챙이처럼 확고했다. 조금 성격 차이가 나더라도 조절해가며 필생 같이 살아가야 할 짝으로 여겼지, 비루하게도 성격 차이라 둘러대며 내다 버릴 조대 쓰레기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짐승이 아닐진대 감정조절이 가능한 사람에게 가당치 않은 트집이라 여겼다. 사람의 가치를 우습게 보고 만남을 가벼이 하여 쉽게 맺어졌기에 내상內傷을 깊게 입지 않고도 바람결이 스치듯 헤어지면서 짐을 부린 마음으로 버린다고 타박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우리 가볍게 만나 가볍게 헤어져요.’ 다짐해도 그어진 금 안에 머물러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 물처럼 높낮이에 따라 흐르려는 성질이 있어 언약한들 무용하다. 그러니 마음에 깊이 담았다면, 이별에 상처가 크고 깊으므로 사람으로서 차마 행할 도리가 아니라는 논지였다.
아내를 일찍 보낸 천백도는 제삿날이면 눈빛이 반짝반짝 살아 올랐다. 마치 영혼끼리 조우나 하듯 아내 사진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하기야 그 얼굴이 어제 전철에서 잠깐 스쳐 만난 여인처럼 낯설기만 하겠는가. 은근한 눈빛으로 천백도 귀에다 더 많은 말을 뿌려대고 있을 게니 귀를 더 크게 열어놓고 싶을 거다. 더군다나 한해 한 번 제사 자리에서 조우하는 게 아쉬움을 참아내는 일도 버거울 텐데, 혼자 사는 이런저런 모습이 장하다고 추켜세워주어야 마땅하리라.
천백도는 간소화로 변형되는 관혼상제 의례는 세속의 흐름에 따랐지만, 문중의식이 강한 만큼 관례에는 엄중한 편이었다. 길이 막히더라도 시골 우거진 숲을 헤치며 들어가 조상묘에 성묘해야 직성이 풀리고 합동 제사를 반대하는가 하면 꼭 개 짖음이 멈추는 시각이 지나서야 제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의 관혼상제 의례에 너무 무관심하다면서 제사 때마다 한마디씩 핀잔했다.
“내가 그렇게 일러주며 못 외면 휴대전화기에다 사진까지 찍어두라고 했는데, 오늘도 제상에 과일 놓는 걸 보니 또 순서를 몰라 마냥 쩔쩔 헤매더구나.”
천백도는 제사 때마다 족보를 펼쳐 들고 씨 파벌을 따지고 손자들 돌림자로 이름 지은 내력과 후대의 돌림자까지 내처 일러주기를 잊지 않았다. 그런 일에 큰아들이 못마땅해 했다.
“에이 아버지, 우리 대는 모르지만, 앞으로 누가 돌림자로 이름을 짓나요?”
“아버님, 그건 아범 말이 맞아요. 아이들도 이제 외국을 내 나라처럼 드나들어 외국식으로 이름을 짓는 일도 유행이라는데, 이름은 자유롭게 지어 부르는 덴 저도 찬성해요.”
맏며느리도 큰아들과 한통속이 되어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자 예외 없이 천백도의 거친 입이 열렸다.
“이것들 보래. 그걸 무시하면 어느 놈의 종자가 어느 놈의 종자인지도 세월이 가면 몰라서 제 고모와도 짝짓는 일도 없으란 법 없어. 그러면 그야말로 신라 왕실처럼 윤리가 개판이 되어 기강이 해이해져 나라가 스스로 무너지는 거야.”
천백도는 설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토정비결 책을 펼쳤다. 세월을 집어삼켜 누렇게 변색했는데 낱장을 넘기면 갈피에 갇혀있던 퀴퀴한 곰팡이 냄새나는 고서였다. 그리고 맏손자를 옆에다 불러 앉히고 간지를 짚어가며 한 해 운수를 점치길 즐겼다.
“우리 지원이 올해 운술 좀 보자. 음 제성帝城을 두루 밟으니 일천 문이 함께 열렸도다. 이 괘卦 효爻를 보니 잉어가 용문에 이르도다. 머리에 계화桂花를 꽂으니 맑은 이름이 멀리 전파하리라. 으음, 공부하는 아이에게는 참으로 좋은 운수다. 지원이는 올 한해 부지런히 공부만 하면 되겠다.”
아이 눈이 토정비결 책 글자에 가 있는 게 아니라 천백도의 주름진 입술에 매달려 반짝거렸다. 그리고 호기심을 참아내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천백도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머리에 계화를 꽂으니 맑은 이름이 멀리 전파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으음, 옛날 같으면 장원급제하여 꽃이 꽂힌 모잘 쓰니 이름이 사방에 떨친다는 뜻이다. 그러니 네가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 점술 높게 받으면 모든 애가 널 쳐다본다는 말이다.”
“야호!”
지원이 환한 얼굴로 눈빛을 빛내며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아버지 요즘 누가 그걸로 한 해 운수를 가리나요. 또한, 그 풀이말도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라 젊은 애들은 뜻도 이핼 못 해요. 컴퓨터로 검색하면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이해주는 데 모두 그걸로 이용하지 누가 그런 케케묵은 걸 봐요.”
“토정비결을 새해 벽두에 보는 건 그게 맞고 안 맞고는 둘째 문제다. 또한, 그 말들이 모두 냉술 마시다가 이빨이 부러진다는 소리 만큼 황당하다는 것도 나라고 모르겠느냐? 다만 한해를 새로이 출발하는 자리에서 몸과 마음을 경계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으니 그게 현실적인 풀이보다 오히려 추상적인 게 사람의 정서 반응에 부합되어 좋다.”
아내 제삿날이면 천백도는 봄 바닷가 숭어 같았다. 먹은 나이가 무색하게 기색이 새파랗게 살아 올랐다. 가뭄에 시들었던 풀줄기가 비를 만나듯 얼굴에 화색마저 돌아 생생한 채 빳빳해졌다. ‘맞아! 젊은 날 저런 모습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어.’ 자식들도 그런 말이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올 만큼 천백도는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밤을 깎으면서 옛노래를 코끝에다 연해 걸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물론 아내도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그러다 정색하며 자식들이 들으란 듯 또 거친 입을 열었다.
“네 어민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지랄 같은 사낼 만나 개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마땅히 너희에게 받아야 할 용돈도 땡전 한 푼 못 받고 말이다. 사람이 백 년을 산다고 흰소리 탕탕 쳐봤자 그게 고작 삼만육천 날밖에 더 되느냐? 그런데 네 어민 너무 일찍 가면서도 내 맘 아픔을 한끝도 가져가지 못했으니 나에겐 무척 나쁜 사람이다.”
분명 분해서 식식거리는 모습이 안방 벽에 걸린 복제판 이중섭의 ‘흰 소’ 같은 모습이었다. 천백도에겐 가난해서 어렵고 힘들었던 세월. 그 시절 기억을 여태 떨쳐내지 못한 채 마치 지금도 그것과 샅바를 잡고 씨름이나 하듯 했다. 분기憤氣마저 탱천해 싸워왔던 그때의 울분이 비 온 뒤 웅덩이 흙탕물처럼 가슴에 여태 고스란히 고여있는 듯했다.
그의 아내는 평생 천백도 고집 때문에 외식하러 집 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고 자식들이 마련한 바깥식사자리에서 곧잘 입에다 올렸다. 그때마다 천백도는 해명하기보다 서둘러 딴 곳으로 번져가는 아내의 뒷말마저 차단하려는 듯 거칠게 뱉어냈다.
“제기랄, 술지게미 처먹고 학교 갔다가 술 취했다고 덜떨어진 선생 놈에게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얻어맞은 때가 엊그제 같다. 죄를 저서 아니라 가난 때문에 매를 맞았으니 억울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집 안에서 제 손으로 뭔가 만들어 낼 자료가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똥구멍까지 확 밝아질 일이다.”
“엄마, 술지게미가 어떤 요리에요?”
“그건 요리가 아니라 술을 걸러내고 남은 찌꺼기야.”
옆에서 천백도가 그것으론 설명이 부족하다는 듯 말을 늘였다.
“귀를 항아리만큼 키워서 들을 소리다. 이것저것 골라 먹는 요즘 아이들이 보면 그건 음식이긴커녕 먹어서 안 될 음식쓰레기였으니까. 애완용 개새끼에게도 수입 사료를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너희 세대가 그런 얘기가 씨알이나 먹히겠느냐? 그런 말마저 젓가락으로 국 떠먹는다는 소리로 황당하게 들릴 테니까…….”
그런 아버지였으니 더러 고기음식을 먹으러 나가긴 했으나 저녁밥을 먹자고 밖으로 나서진 못했다. 전쟁을 치러낸 나라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 참혹했기에 품 안 새끼들 때문에라도 저축해야 한다는 결심에는 천백도 부부는 동의하고 모질게 실천해왔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결국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 옛말이 귀를 솔깃하게 했던 탓이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물려주어야 일어설 때 짚을 지팡이가 된다고 믿었기에 돈을 버는 데 노심초사했을 뿐 그것을 잘 쓸 줄도 몰랐고, 그것으로 제대로 즐길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지그시 누른 것은 바다를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의 어머니의 절약 철학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서 정작 귀한 손님이 오면 외식할 음식점을 고르자고 이곳저곳 찾아 허둥댔다.
그런 천백도는 일요일 집에서 쉬다 오후가 되면 이러다 너무 넋 놓아 사람이 멍청해지지 않을까 싶게 조바심낼 만큼 몸에 일이 문신처럼 박혀있었다. 아니 손발을 한동안 놀리지 않아도 운동 신경이 반사적으로 저절로 온몸에서 살아올라 꿈질꿈질 움직였다.
그런데 큰아들은 외식을 줄여야 한다는 천백도 소견에 생뚱맞은 소리로 반박했다.
“아버지, 요즘 놀며 즐기면서 살지 누가 그렇게 벌벌 떨며 구차하게 살아요?”
그런 소리에 거친 입을 가진 천백도가 가만히 듣고 있을 리가 만무다.
“허그참, 배지에 똥만 들은 놈들! 부존자원 없이 오직 뚝심과 부지런함으로 일궈낸 터전에 근면함이 제일인데 일자리가 없다고 놀고, 일하는 자는 토요일 일요일 쉬고도 금요일까지 일찍 퇴근하여 먹고 마시며 놀고, 그런 풍습에 영합하여 정치하는 작자들은 이름을 달아 쉬는 날만 늘이고 참으로 한심하다. 패거리 이익을 위해선 국가를 마치 먹일 거두는 사냥터처럼 여기는 놈들. 그냥 천리마에 붙어 천 리를 공짜로 갈 쉬파리만도 못한 놈들!”
“아버지, 그런 말씀 어디 가서 막하지 마세요. 욕먹어요.”
“욕하는 일도 욕먹을 놈들이 있을 때 하는 게 신명 나는 일이다.”
“아버지!”
“하기야 주먹에서 힘이 빠진 놈이 주둥이로 욕밖에 무엇을 더 하겠느냐…….”
“요즘 젊은 사람은 다음 세대엔 관심이 없다니까요. 그냥 당장 즐겁게 살다 가면 된다는 거예요. 우선 보세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잖아요. 그게 즐기는 데 부담이 되거든요.”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천백도 거친 입이 또 터졌다.
“툭하면 법과 진리를 앞서 따지는 놈들이. 뭐 성을 즐기기만 하고 새끼는 낳지 않겠다고? 그건 인륜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이를 낳고 기름은 만물이 존재하려는 바탕 행위인데 그마저 거부하면 되느냐? 태어나 남기는 제일 보람되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게 씨 번식인데…….”
“양육비며 교육비, 그리고 사회로부터 상대적 불이익……. 아이 때문에 자기 인생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게 요즘 풍조라는 걸 아버지도 이미 잘 아시잖아요. 저조한 출생률이 국가 존폐에 적신호라고 외쳐대고 있지만, 그건 가임여성의 책임이기보다 국가가 책임짐이 마땅하잖아요? 그런데 왜 국가사업인 그 책무를 개인이 져야 하죠? 어려운 환경에서 맞벌이하여 국가를 잘 운용하라고 세금까지 꼬박꼬박 내는데…….”
“희생?! 우린 그런 말을 자식에게 사용할 줄 몰랐다. 마땅한 의무라 여겼으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고, 중동 건설현장에서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지금도 그리 믿고 계시겠지요? 그건 속았어요. 국가나 자식이 아버지 노년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일찍 사회로부터 퇴출한 노후에도 대책을 마련 못 한 국가에다 연금 받아 세금만 내고 있고, 자식들조차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아시기나 하세요? 젊어 죽도록 돈 벌어 자식들 준다지만, 요즘 돈 잘 만지는 자식들에겐 그게 푼돈일 뿐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괜히 푼돈 받았다가 노년까지 책임지는 걸 부담스러워 귀찮아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버지 세대는 국가와 자식에게서 이미 속아서 버림받은 세대지요.”
“그러나 우리 세대는 지금보다 더 궁핍한 시대에 살았지만, 자식을 자기의 앞길을 막는 저주 대상으로 여기진 않았다.”
“요즘 보세요? 벌써 1인 1가구로 가족 해체시대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아요? 공동체 운명보다 나만의 생존에 올인하지요.”
“요즘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친족간 흉악범죄가 느는 게 모두 그런 까닭이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다 보면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나 아느냐? 그 끝은 필시 둘 다 물에 빠져 죽는 낭떠러지밖에 더 있겠느냐? 요즘 세태가 이미 그런 늪에 빠져들고 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이젠 내 처지만 살펴 갑과 을로 분류해서 여럿의 정서까지 도용하여 뒤로는 제 이득만 취하려는 얄팍한 세태로 내닫고 있는데요.”
천백도는 또 거칠게 반응했다.
“육이오 전쟁에서 삼촌을 잃은 나는 응당 군 복무를 해야 했기에 월남전쟁까지 명령이지만 당당히 참가했다. 그리고 어렵게 잡은 직장이라 부장 새끼가 야근하라면 밤새울 일도 마다치 않았다. 똥 부대처럼, 아니 아니지 그때는 근사한 말로 열반주涅槃酒에 취했다 했지. 술이 먹어 치운 부장 새끼를 마땅히 집까지 데려다주고 대중교통마저 끊긴 귀갓길을 택시로 돌아오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아침이면 오뚝이처럼 일어나 회사로 출근했다. 꽃이건 술이건 반쯤 피고 취하는 게 좋다는 뜻을 몰라서가 아니고, 내가 머저리 병신이라 서가 아니다.”
천백도 얼굴은 거친 말 대문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갑질이네요.”
“그것도 요즘 갑질이라지만, 그때는 들 취한 사람이 더 취한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도리라 여겼다. 또한. 그땐 갑과 을은 계약서에서만 쓰는 전문용어였을 뿐 일상어로 쓰기엔 너무 야박했고, 왠지 왜놈의 조선 땅 수탈 냄새가 나서 싫었다. 우리 윗대들은 귀에 익은 갑질이란 왜놈의 횡포로 굳어진 단어였다. 그들은 계약서로 그런 관계를 설정하곤 이 나라 구석구석에서 온갖 걸 착취해다가 전쟁물자로 썼다.”
천백도와 큰아들 사이 금언은 ‘정치에 관한 소신’이었다. 결코, 편 가르기로 끝장나는 정치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 은연중 금언의 영역이 되었다. 그것은 세대를 아우르지 못한 채 갈래를 달리한 소리와 출렁거림, 그리고 빛과 색깔을 감추면서 깊이 흐르는 강이었다. 어쩌다 국가경영의 철학장인 정치마당이 국운을 기울게 하는 이념의 싸움터로 변질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무리 짓기를 일삼는 정치구성원의 인성 탓이라 천백도는 규정했다. 모든 직종 종사자가 종착지로 정치판이라 여겨 너도나도 몰려드는 세태니 격이 하향 평준화되어 사익만 챙기려는 수챗구멍 같은 환경으로 왜곡되었다고 그는 공공연히 야박하게 평가했다.
천백도와 아들들은 선거 때가 되면 서너 달 앞뒤로 눈빛마저 섞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큰아들이 천백도 눈치를 살피며 먼저 속내를 탐색하러 입을 열었다.
“아버진 말 하시진 않지만, 저희는 아버지가 누굴 찍으셨는지 다 알아요. 어차피 찍을 사람은 그 사람의 정치 행보나 도덕성과 무관하게 이미 오래전부터 연대의식에 사로잡혀 있잖아요.”
“너희의 기준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마치 내 샛서방이 남 본 서방이듯 말이다. 너희가 막무가내로 찍을 사람은 내가 이미 짐작하고 있듯 너희 세대도 주관보다 충동적인 사고로 행동하지 않느냐?”
“나이 먹었다고 보수라 하고 젊다고 진보란 이분법에 이젠 넌더리가 나요. 그게 얼마나 낡은 사고인지 아직도 모르고 계시지요? 보수든 진보든 새로운 가치를 창출 못 한 채 구습에 안주하면 근방 파국을 맞게 되어 있어요. 국민은 늘 새로운 가치에 목말라하면서 국가발전을 퇴행시키는 집권자에게 냉정히 등만 돌리는 게 아니라 갖은 방법으로 비난을 서슴잖고 퍼부으며 쫓아내기까지 하는 무서움을 모르는 세태라니까요.”
“국민 성향의 변화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성말라 가고 욱하는 조급증으로 세태가 더욱 거칠어 지고 야박해져 민족성의 긍정적인 성향까지 변질할까 봐 염려스럽다.”
“부모가 아이들을 너무 일찍 경쟁사회로 밀어 넣었지요. 탑이 되라고 윽박지르면서도 인간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자란 세대니 경쟁의 선두에 서기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어요. 그러다 밀리면 불공정했다고 좌절하고 분노하지요. 그런 까닭으로 나라 안이 좌절로 인한 분노의 도가니로 변해가고 있는 게 표면으로 나타나고 있다니까요. 그 모두 윗대의 인성 교육을 등한시한 응보가 아니겠어요?”
“모든 형태의 것이 그렇지. 칼날의 기능과 같은 것이야. 칼날은 남을 헤쳐서 못 쓰게 되는 게 아니라 제 몸에서 이는 녹 때문에 못 쓰는 것이야. 너희가 입 끝으로는 보수니 진보니 떠들어 대지만 제대로 알고 편 가르기를 하나 그런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보수 가치와 진보의 가치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보완의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편 갈라 싸움의 구실로 삼는 자들을 보면 할미꽃은 어려서도 할미꽃이고, 각시 풀은 쇠도 각시 풀이라는 논리로 굳어져 있으니 상대편에게 타협의 여지를 아예 없애지 않았느냐? 그 또한, 스스로 진화를 거부하는 짓이지.”
“태극기를 들고 집회하는 보수 단체도 깃발을 다른 거로 바꾸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선입견이 앞서고 가치관의 혼돈으로 국기에 대한 저항이 생길까 봐 걱정까지 돼요. 그러다 보면 반대진영에서 마땅히 국기를 흔들어야 할 때 주저하게 되지 않겠어요? 국경일 태극기를 내건 집을 보고 내 친구 아들이 그랬대요.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신 보수꼴통 집이 저 집이야, 그렇게 묻더래요.”
“촛불이나 노란 리본도 주체와 본질을 떠나 정치세력으로 변질하지 않았느냐?”
“본질에다 잠재해있던 기득권에 대한 상대적 패배감이 불을 붙여 폭발했다고 봐야지요.”
“참으로 치밀하다. 우리는 독재와 맞설 땐 병신처럼 효율적으로 패거리와 힘을 모을 줄 몰랐다. 그저 구호가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격할 때는 화염병과 깨진 보도블록 조각이나 던졌지. 촛불이나 노란 리본 또는, 댓글로 편을 끌어모아 목소리를 높이고 가짜뉴스로 여론을 조작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지. 그저 화염병과 보도블록 조각이 물리적으로 파괴력이 크다는 단순히 어리석은 생각만 했으니까…….”
“그게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의 차이잖아요.”
“다만 문제는 보수든 진보든 그 탈을 뒤집어쓰고 행해지는 부도덕한 위선과 악행이 문제다. 그러다간 빼앗은 칼로 스스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민심이 또 언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민심은 간사한 것이라 불만이 쌓이면 숙주나물처럼 금방 변하지. 다만 국가 발전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쪽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구나. 싸움꾼치곤 골병 안 드는 놈이 없다는 옛말도 있으니까. 서로 목숨까지 빼앗으며 골병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마치 원수들만 사는 나라처럼 보이니 탈이지 않으냐. 이 나라에서 이념 논쟁의 싸움으로 역사가 바른 방향으로 발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러하다.”
둘째 아들이 노조파업에 가담하여 회사로 나가지 않고 광화문광장으로 들락날락한다고 했다. 종업원이 오천 명 넘는다니 작은 회사도 아니다. 급여 수준이 상위그룹에 속하는 데도 봄이면 회사창립기념행사나 치르듯 직장에서 뛰쳐나와 버스로 광화문광장에 모여들어 목청을 높였다. 월급이 올라 차를 샀으니 기름값을 달라 했고, 일은 하청자가 하니 놀아야 하는데 여행경비는 줘야지 않겠느냐. 연봉과 상여금을 모아 아파트에 입주했으니 가전제품과 가구들은 들여놓아야지 않는가-하청업체 노동자의 처지에서는 그런 소리로만 들렸다.
천백도는 장소도 문제지만 요구조건도 문제라 여겼다. 직장 문제는 직장 안에서 해결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농성현장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외침은 줄어드는가 싶더니 이젠 정권을 향해 지분요구 구호가 더없이 높아졌다. 노동자의 꿈이 기장技匠에서 국회 베지를 가슴에 다는 목표로 바뀐 세태가 된 지도 이미 오래되어 하루 생산량이 하류 국가의 수준에도 못 미쳤다. 너도나도 모두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오히려 정치꾼보다 그들을 먹여 살릴 국민의 머릿수가 모자랄 판국이다.
일 복이 곧 돈복이라 여기며 노동현장을 중요시하여 모든 가치를 현장에 두었던 천백도는 직업인이 천박한 욕망에 눈이 멀어 본업에 자긍심을 잃어가는 걸 못마땅했다. ‘성질 급한 놈이 물소리로 갈증을 풀려고 한다.’고 현실 여건에 비견하여 지극히 출세 지향적이고 탐욕적이라 했다.
“자발 없는 짓이야. 기름 엎지르고 깨알 주워 먹는 꼴이지. 바람이 불을 일으킨다고 해서 약하지 않고 강하게만 부쳐대면 오히려 불길이 꺼질 뿐만 아니라 모두 날아가 버리고 모래땅만 남지. 지금 형태를 보면 꿈속에서 빌려준 빚돈을 달라고 조르는 생떼와 무엇이 다르냐?”
둘째 아들도 한때 제 직장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했다.
“덥고 작업환경이 열악해서 직장을 옮겨야겠어요.”
그 소리를 들은 천백도는 어김없이 거칠게 반응했다.
“배지 부른 소리 작작해라. 국내 작업장이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불볕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중동 사막에 비하겠느냐? 이 아비는 살아남기 위하여 일거리를 찾아 그런 곳에서 네 어미와 너희를 생각하며 땀투성이로 일해도 그런 마음을 갖지 못했다. 땀조차 흘리려 하지 않는 너희가 육체노동에서 흐르는 땀 냄새를 어찌 알겠느냐? 몸을 쓰는 일자리는 남아도는데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치니 사람이라서 굽은 못처럼 때려서 쓸 수도 없으니 딱하긴 딱하다만…….”
*
“어, 아버지가 벌써 오실 때가 넘었는데…….”
진즉에 가족은 천백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각이 밤 열 시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성격을 보건대 약속장소에 행보가 느린 사람은 아니었다. 출행 길을 나서면 늘 아내의 느린 발걸음에 실색하며 짜증까지 버럭버럭 냈던 사람이다. 그의 빠른 발걸음에 질려 나들이 가자면 아내가 생머리를 끄적거릴 만큼 불평부터 했다. 젊었을 때 어찌나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던지 앞서 가다가 아내가 보이지 않으면 우뚝 멈춰서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눈앞에 다다르면 한마디 내뱉은 다음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내처 걸음을 내달곤 했는데, 그런 습관은 평생 고쳐지질 않았다.
“가다가 그렇게 기다릴 바엔 애당초 천천히 걸어가면 되잖소.”
“이 사람, 걷지 않고 기어놓곤…….”
“사람 본체 않고 바람난 사람처럼 어찌 그리 휭하니 내 빼기만 하우? 남편 된 사람이 아내에 대한 배려란 눈곱만치도 없소?”
천백도는 행동이 느리고 굼뜨다는 것, 특히 약속 시각에서 느리고 굼뜨다는 데는 용서조차 인색했다. 그런 그가 아내의 제삿날인 오늘따라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는 게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련히 때 되면 오시겠지 하던 가족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시선까지 슬금슬금 교환하기 시작할 만큼 천백도의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까닭 모를 불안감에 드디어 큰아들이 침묵을 깨며 둘째 아들에게 일렀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이상하시다. 네가 한번 나가 살펴봐라. 휴대폰도 꺼져 있다.”
그러자 맏며느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버님이 요즘 외출도 하지 않으셨는데 지금 이 시각 어디에 계신다고 찾아 나서요? 지금 가신 데도 잘 모르잖아요. 그러니 집에서 그냥 기다릴 수밖에 도리 없지 않겠어요?”
“늦어도 너무 늦어 답답하니 그렇지…….”
“답답하다고 행방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게 말이나 돼요? 지금 상황에서는 기다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늦을 분이 아니시잖아요. 왜 휴대폰조차 꺼 놓으시고…….”
“배터리가 모두 나갔겠지. 혹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겉보기에는 또래보다 잗젊어 보이지만, 마땅히 가족들이 늦은 밤길을 염려할 나이다. 더구나 한낮의 느슨하던 생활리듬도 밤늦은 시각이면 빠르게 흘러 오가는 차 행렬에 따라 걷는 발걸음도 덩달아 속력이 붙는다. 어둠 속에 흐르는 빠른 리듬은 반사신경이 무딘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위협적이어서 부담스럽다. 천백도도 쏜살처럼 달아나는 차도 옆 인도로 정신이 휘둘리면서 밋밋한 언덕길에 가쁜 숨을 추슬러가며 진땀까지 흘리면서 걸어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불안한 예감은 불길함에 더욱 부채질했다.
“아냐. 형수 내가 바람도 좀 쐴 겸 문밖에 나갔다 올게요.”
둘째 아들이 뒷말에는 관심이 없는 듯 겉옷을 걸치고 현관 밖으로 서둘러 나섰다.
그 시각에 천백도는 레이지룸rage room에서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주먹만 한 망치로 팔을 죽자사자 무턱대고 휘둘러 어깨가 빠질 듯 뻐근해 오기 시작했다. 이마로 땀이 빠져나오다 못해 지금 손으로 훔칠 만큼 친친하게 느껴지는 건 필시 식은땀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천백도는 남은 힘을 모두 소진하려는 듯 마네킹 얼굴 부위를 망치로 막무가내 후려쳤다. 이미 바닥에는 망치질에 견딜 수 없는 가정 용구들이 산산 조각나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천백도의 마음속 답답함은 풀려나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천백도가 레이지룸에 들어서자, 종업원은 할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아저씨라 부르며 중년으로 대접했다. 턱수염을 젊잖게 길러 한 멋을 더하게 보여 천백도는 반사적으로 갑자기 제 턱을 쓰다듬어 보려는 충동마저 느꼈다.
“아저씨, 7080 클럽은 바로 이 옆 건물인데 여긴 잘못 찾아오셨어요.”
종업원은 천백도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일러주듯 친절하게 오른손가락으로 왼쪽 건물을 가리켰다. ‘7080 클럽’이라는 간판이 네온을 빠르게 튀겨내고 있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콜라를 마시며 빨랫줄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낡은 무명천처럼 춤추는 늙은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니네. 나는 레이지룸이란 간판을 분명히 보고 들어왔다네.”
젊지만 턱수염 때문에 말끝을 냉큼 놓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 소리에 종업원은 천백도 외관을 다시 훑어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의중을 확인하려 들었다.
“이상하네요. 여긴 젊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풀려고 오는 곳인데…….”
“이 늙은이에게도 스트레스라는 게 있다네.”
“그런데 망치를 휘두르시자면 엄청나게 힘들 텐데 그래도 하고 싶으세요?”
“아직 그런 힘은 있네.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꼭 해야만 하네.”
종업원은 고객으로 반가워하긴커녕 틈입자로 여겨 영 못마땅하다는 듯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참을성을 보이며 친절하게 다시 말렸다.
“아저씨, 안전모를 착용하시더라도, 튀는 파편은 위험해요.”
“철부지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금방 지칠 건데요. 한번 해보시고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특별히 삼 분 넘지 않으면 요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종업원은 끈질기게 걱정을 붙들고 있었다. 가게에 아르바이트한 뒤 나이 먹은 손님이 처음이었던지 불안한 눈길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었다. 젊은 사람은 스트레스라지만 늙은이에겐 속상함이다. 속상하면 술을 마시거나 버럭버럭 욕설할 나이 때지, 야구장에 가 소리를 지르거나 레이지룸에서 망치를 휘두를 세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삼 분 되기도 전에 지칠 거라 넘겨짚은 것도 그런 계산에서지만, 천백도로선 기분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높은 목소리로 받아치지 않고 참아내야 했다.
“화가 치밀 때 솟는 힘은 보통 때 열 배쯤 되지 않겠나? 그 정도면 뭔가를 부술 힘은 충분하겠지. 어디 한번 해보자 구나.”
“참 걱정되네.”
천백도는 빌었다. 제발 사춘기 중학생의 화날 때 같은 힘이 몸에서 솟구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늙은 몸은 상황에 알맞게 힘이 솟는 변신 로봇이 아니었다. 종업원이 어림짐작해 준 삼 분도 못미처 어깨 힘이 빠져나가는 게 호흡을 내쉬는 짬짬이 분명하게 감지되었다. 그럴 때마다 눈앞에서 깨질 물건이 망치보다 점점 강해 보였다. 망치에 맞은 물건에서 와장창 파열음이 나는 게 아니라 허, 허, 헛- 비웃음 같은 소리만 귀를 두들겨댔다. 그러니 짐작보다 빠르게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이마에선 줄 땀이 쏟아져 내렸다.
“아저씨, 힘드시지요. 더구나 그렇게 무턱대고 힘껏 하시니…….”
“아니네. 아직은 할 만하고말고. 암 이렇게라도 해야지”
천백도는 앞에 겹겹이 가로막아 뭉쳐있던 것들이 깨져 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못마땅한 모든 것에서 늙음이 한스럽다는 패배감과 자괴감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마음이 가벼워져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관여했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육체에서 정신을 뽑아내고 세상의 모든 얼개에서 벗어나 외면하거나 의연하게 눈을 감아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천백도는 부서진 조각들을 밟아가며 다시 힘을 모아 망칠 휘둘렀다. 숨결이 다시 목 아래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며 몸에 눈물처럼 땀이 솟구쳤다. 연질의 플라스틱 인형이 망치질에 건들건들 상체를 흔들며 히죽히죽 비웃기까지 했다. 그것은 지금껏 천백도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김가, 이가, 박가, 등등 뭇사람의 모습으로 비쳐 보였다. 그는 다시 그것을 향해 망칠 죽자사자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그만하셔야 할 것 같네요. 이젠 힘에 부치시는 같아요.”
그 말이 갑자기 천백도 귀에 서럽게 들려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천백도는 호병胡兵과 맞선 고려 노병처럼 나이를 잊고 씩씩하게 맞싸워 이겨내고 싶었다. 아니 아직은 힘이 아니라 의지의 충만함이 꺾이지 않았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부에 꽉 차있는 것들이 시원하게 빠져나갈 때까지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몸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힘들게 쌓았으나 이젠 의미를 잃은 것들이 산산이 부서진 가전제품 조각 위로 함몰하는 환상만 보였다. 그것은 황혼녘에 떨어져 내리는 은행잎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이제 한창 힘이 솟구치니 괜찮네.”
천백도는 몸 상태와 다르게 말했다. 마치 항변하듯 목소리까지 높였다.
“아니네요. 내 눈에는 다리에 힘조차 풀려 있네요. 그러다가 사람이 다칠 수 있어요. 그만하시든가 좀 쉬어다가 하세요.”
종업원이 천백도의 망치 쥔 손목을 검잡았다. 갑자기 동작을 멈추니 기운이 빠지며 몸 중심이 허물어졌다. 종업원이 안전모를 벗겨주자 그는 구석 자리에 놓인 낡은 소파에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쏟아 낸 기운 탓인지 사물이 어지럽게 흔들려 보이며 현기증마저 일었다. 그러나 뭔지 모를 분한 감정이 연이어 꾸역꾸역 치밀어 올랐다. 망칠 잡아서 벌겋게 핏발이 일어선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못할 일도 척척 해냈던, 두려움조차 몰랐던 부지런하고 용감했던 손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는 손으로 변했다. 천백도는 지금 무력한 그 손이 자신 몸에 붙어있는 게 미웠다.
“아저씨껜 아무래도 너무 벅차시지요.”
천백도는 서러운 마음만 안고 밖으로 나왔다. 땀 흘리며 기력을 소진한 데 비견하여 속은 여전히 시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어둠을 헤쳐가며 집으로 가야 했다. 아내의 제삿날을 잊은 건 아니었다. 마음에 무거운 걸 털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죽은 사람과 해후하고 싶었다. 천백도는 집으로 오르는 길옆 전신주 숫자를 세어가며 걸었다. 네 개째를 지나가야 했다. 그의 눈 안으로 네 번째 전신주가 들어오고 어둠을 안은 사람의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전신주는 그대로인데 사이의 풍물들과 오가는 사람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구멍가게가 즐비해서 어깨를 툭툭 치며 걸었던 거리였다. 간판들이 큼직한 글자를 안은 채 퇴색하고 횟집 어항에 활어 대신 부서진 유리조각이 가득 차 있으며, 희번덕거리던 가게 조명들이 산소호흡기를 단 환자처럼 가르랑거리고 있었다. 이 거리에 예전처럼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자식들이 밀어내고 성마른 세태가 밀어냈다고 여겼다. 이곳에서 사라지고 잊은 것들이 마음을 무겁고 우울하게 했다. 이 모든 흐름 때문에 세태가 끊임없이 거칠고 야박해진다는 느낌이 다시 머리에 스쳤다. 천백도에겐 세상의 거친 변화 끝이 두려웠다.
걸음새부터 처져있었다. 젊었을 때 이십 분이면 너끈히 끝낼 길이다. 그런데 천백도는 삼십 분도 더 허비하며 그도 지친 모습으로 발걸음 앞에 놓인 제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왔다. 둘째 아들이 지체하잖고 마주 달려갔다.
“아버지, 어디 가셨다가 이제야 오세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반가움보다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내가 조금 늦었지?”
“아니, 아버지 어디서 오셨길래 땀에 이리 흠뻑 젖으셨어요?”
천백도는 아들에게 어깨를 기대고 싶은데 눌러 참았다. 둘째 아들 물음에 건성 대꾸하며 집안 사정을 되물었다.
“이제 모든 일에 힘 드는 데도 땀 좀 뺐다. 지금쯤 다들 모였지?”
“그럼요. 모두 모여 아버지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데요. 이제 밤늦은 시각까지 운동하실 나인 아니시잖아요. 과한 운동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야지요.”
“그래 앞으로 그래야 할 것 같다. 내가 명심하마. 얼른 앞서 가기나 하자.”
천백도가 제사상 앞에서 아내의 초상과 마주했다. 아내는 천백도의 오늘 하루 행방을 알고 있듯 작은 유리조각에 갇힌 저쪽에서 은밀한 말을 하듯 미소로 충고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당신 심경을 알아요. 암 알고 말고요. 그렇다고 그렇게 화를 품고 사시면 너무 힘드시잖아요. 이제 이겨낼 나이도 아니잖아요. 그냥 그대로 참아낼 수 없을 지경이면 실실 웃어가며 또 꼴같잖게 여기면서 사는 데서 즐거움을 찾아야지요. 어디 사람 하는 짓이 반드시 옳기만 하겠어요. 참, 그리고 꼭 구관조를 찾아오세요. 구관조는 사람을 헤치지는 않잖아요.’ [끝]
[삼척문학 27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