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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間革命 29卷 第3章 淸新(17~22)
<청신 17>
대지진과 대규모 지진해일이 발생한 2011년 당시 모토후지 유지는 창가학회에서 오쓰치, 가마이시, 오후나토, 리쿠젠타카타 등 피해가 심한 지역의 현장(縣長)이었다.
그날 모토후지는 내륙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마이시에 있는 집에는 눈이 불편한 장모와 아내, 딸 그리고 젖먹이 손자가 있었다. 휴대전화도 불통이라 가족과 동지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 애가 탔다.
일단 집으로 가기로 했다. 교통이 규제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서 수미터 앞까지 해일이 밀어닥쳤지만, 집도 가족도 모두 무사했다. 어본존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총현부인부장인 아내 후쿠요와 함께 회원의 안부를 확인하러 집을 나섰다.
거리는 완전히 바뀌었다. 일단 쓰레기 더미로 뒤덮이고 폐허가 되어 시가지로 가는 길도 사라졌다. 그러나 어떻게든 동지를 만나야 했다. 뒷산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 덤불이 무성한 좁은 산길을 따라 걸었다. 어제부터 내린 눈에 다리가 푹푹 빠졌다.
쓰러진 나무와 무너져 내린 바위를 넘어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자 이번에는 쓰레기 더미가 앞을 막았다. 그것을 밟고 넘어 2시간 정도 걸려서 시(市) 대책본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각 대피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명부를 보고 학회원의 이름을 확인해 대피소로 찾아갔다. 잔해로 뒤덮여 사라진 길을 필사적으로 걸어 이날 대피소 다섯군데를 방문했다. 학회원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달랑 걸친 옷만 입고 대피소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은 초췌해 있었다.
모토후지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에 할 말을 잊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하고 그저 손을 붙잡고 함께 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모두가 반가워했다. 동지의 눈동자에 차츰 빛이 되살아났다.
어쨌든 만나야 마음이 전해지고 마음이 이어진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자신도 재해를 입었으면서 사람들을 보살피며 바쁘게 일하는 학회원도 있었다. 신앙의 힘을, 빛나는 학회의 혼을 보는 듯했다.
<청신 18>
모토후지는 대피소를 돌면서 많은 사람이 사망한 것을 알았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함께 활동하러 다닌 선배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녀를 잃은 부부, 부모를 잃은 아이, 남편을 잃은 아내, 아내를 잃은 남편….
모토후지는 사람들이 처한 괴로운 현실에 자기 가족들이 무사한 일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부지한 이 목숨을 사람들을 위해 쓰자고 굳게 다짐했다.
대피소를 나온 모토후지는 의용소방대 활동에 들어갔다. 구호물자를 운반하는 등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했다.
많은 동지의 집이 해일로 떠내려갔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학회원은 대피소에서 청소를 하고 밥을 지어 배급하는 등 남을 위해 용감하게 헌신했다. 남의 행복을 바라며 행동하는 속에 자신의 행복도 있다는 불법(佛法)의 공생 철학이 맥동했다.
모토후지만이 아니라 1979년 1월 미즈사와문화회관에서 신이치와 만난 사람들 중에 이런 동지들이 적지 않았다.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자 창가학회는 학회본부를 비롯해 각 방면과 현에 ‘재해대책본부’를 마련해 전국적인 규모로 구호와 지원활동을 펼쳤다.
미야기현 센다이시 미야기노구에 있는 도호쿠문화회관을 비롯해 재해지역에 있는 회관은 모두 대피소가 되어 이재민을 수용했다. 모토후지가 사는 가마이시시(市)의 가마이시문화회관에도 인근 주민 등 40여명이 대피했다.
신이치는 대지진과 대규모 지진해일이 일어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아파하며 재해지역 벗에게 전언을 보냈다.
“참으로 소중한 여러분에게 불천(佛天)의 가호가 반드시 있기를 아내와 함께 제목을 강성히 보내고 있습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義)이고’(어서 947쪽)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불굴의 신력(信力), 행력(行力)을 불러일으켜 위대한 불력(佛力), 법력(法力)을 거침없이 끌어내어 이 고난을 반드시 이겨냅시다.”
<청신 19>
3월 16일자 세이쿄신문에는 재해지역 동지에게 보내는 신이치의 메시지가 실렸다.
신이치는 메시지에서 이재민을 위로하고 구호와 지원활동에 바쁘게 뛰어다니는 회원에게 고마움을 전한 뒤, 큰 시련을 반드시 이겨내길 바란다고 온 마음을 다해 강조했다.
“어서에는 재해가 일어나도 ‘마음을 파괴할 수 없는데’(어서 65쪽) 하고 분명히 씌어 있습니다.
‘마음의 재(財)’만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영원히 행복해지기 위한 시련입니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변독위약(變毒爲藥)할 수 있는 것이 이 불법이고 신심입니다. (중략) 절대 지지 마라! 용기를 내라! 희망을 가져라!”
학회본부에서도 최고간부들이 재해지역으로 달려가 벗을 격려했다. 또 복구지원을 위해 젊은 직원들을 파견했다. 모두 신이치의 뜻을 받들어 온 힘을 다해 헌신했다.
이와테뿐 아니라 미야기, 후쿠시마 등 재해지역에서 분투하는 학회원 또 한신·아와대지진을 이겨낸 효고 등 간사이를 비롯한 전국 동지의 지원은 인간의 강한 유대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길이 빛날 것이다.
도호쿠 청년들은 각지에서 ‘자전거 구급대’ ‘청소작업반’ ‘청소봉사단’ 등을 결성해 재해를 입은 고령자들을 위해 청소나 정리 그리고 물자 배달 등을 자진해서 도맡았다.
요리사나 이발사, 미용사 등 기술을 살려 봉사활동을 한 장년부원과 부인부원도 있었다. 모두 자신도 재해자였다.
해일이 덮쳐 재해로 뒤덮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에서는 한 남자부원이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싶다. 살아갈 용기를 주고 싶다’고 결의했다. 그리고 ‘힘내자! 이시노마키’라고 쓴 길이 10.8미터, 폭 1.8미터짜리 간판을 만들었다.
이 남자부원도 집이 떠내려가는 바람에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에 겨우 소나무에 매달려 하룻밤을 지새우고 목숨을 건진 청년이었다. 이 간판은 도호쿠 부흥의 상징이 되었다.
‘질 수 없다!’는 기상이 학회혼이다! 창가(創價)의 사자(師子)는 고난의 폭풍우가 사납게 날뛸수록 용감하게 끈기 있게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청신 20>
피해가 심한 이와테현 오후나토시에 있는 현립오후나토병원에 전공의가 한 사람 있었다. 스물일곱 살 먹은 시오타 다케오였다. 지진이 일어난 날이 임상수련과정 2년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시오타는 큰 지진 직후에 고지대에 있는 병원 창으로 해일이 시가지를 집어삼키는 광경을 보았다. 환자가 잇따라 실려 왔다. 중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도 있었다. 20일 동안 병원에서 숙식하며 진찰과 치료에 매진했다.
시오타가 열일곱 살 때 남동생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출산한 뒤에도 날마다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동생이 ‘선천성 거대결장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장과 항문에 신경세포가 없어 이완작용을 못하는 병이었다. 동생은 결국 1년 10개월만에 생을 마감했다.
처음으로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끌어안은 동생의 몸이 아직도 따뜻했다. 생명의 무상함이 어린 마음에 밀려왔다.
시오타는 중고등학교를 소카학원(創價學院)에서 공부했다. 고3 졸업기념촬영회 때 창립자인 야마모토 신이치에게 “반드시 의사가 되겠습니다!” 하고 결의했다.
그러고 나서 모 사립대학 의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2년 뒤 아버지가 경영하는 토목회사가 도산하고 만다. 채무자가 집에 계속 찾아와 빚 독촉을 했다. 더 이상 학비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원했다.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 약속을 지키겠다!”
이와테현에 의사를 양성하는 장학금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래 이와테현에 있는 공립병원에서 일정기간 근무하면 지원받은 학비를 반환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였다. 시오타는 이 장학금 덕분에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졸업한 뒤 오후나토병원에서 전공의로 근무하다 지진을 만났다. 진료에 필사적으로 힘썼다. 피로가 한계에 달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날을 위해 내가 있다! 지금 힘내지 않고 언제 힘을 낸단 말인가!’
인생에는 가장 중요한 때가 있다. 그때에 최고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승리자가 된다.
시오타의 분투는 환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 뒤로도 시오타는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와테현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며 의료에 종사한다.
<청신 21>
이와테현 라쿠젠타카타시에서 양식업을 하는 무라카와 요시히코는 대출을 받아 최신 설비를 갖춘 어선을 구입했지만 해일로 잃었다. 항구도 모두 파괴되었다.
무라카와는 실의와 낙담에 빠졌지만 지구부장으로서 동지의 안부를 확인하러 뛰어다니며 마을 복구작업에도 힘썼다.
괴멸된 거리를 보니 절망이 엄습해왔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심정으로 창제하고 학회 지도를 정신없이 읽었다.
무라카와에게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 이른 아침에 아내인 후미와 함께 수확해 놓은 미역 1톤이 있었다. 산리쿠 미역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평소보다 몇 배나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이것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라카와는 그 미역을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은 먹으면 힘이 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힘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결단을 내린 일이었다.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용기가 솟았다. ‘다시 미역을 기르자’고 생각했다.
‘세이쿄신문’이 재해지역 특집으로 무라카와가 지구부장을 맡고 있는 히로카 지구를 소개하자 전국에서 동지들이 격려의 편지를 수백통이나 보내왔다.
‘한신·아와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서 지구 이름이 같은 히로타태양지구가 회원들의 응원 문구를 모아 보내왔다.
게다가 히로타태양지구의 지구부장은 무라카와와 같은 성으로 지진으로 집이 붕괴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리쿠젠타카타에 있는 무라카와 집에 찾아와 자시의 체험을 말해주었다. “형제 지구로서 함께 힘냅시다”라는 말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무라카와와 가족들의 마음을 울렸다.
‘고투하는 벗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자!’
이것이 불법형제의 연대에 깃든 마음이다.
해일로 모든 것을 잃고 어업을 단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라카와는 학회원인 자신이 마을 부흥에 앞장서자고 결심하고 공동으로 양식작업을 추진해 지진이 일어난 다다음해 1월에 새 어선을 구입했다. 무라카와는 지역부흥의 추진력이 되었다.
창가 동지의 삶에는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어서 1598쪽)는 정신이 맥동한다. 이것이 지역을 건설하는 힘이 된다.
<청신 22>
전국 각지에서 복구지원을 위해 달려 온 본부 직원 중에 규슈에서 온 청년이 있었다. 재해지역에서 만난 한 부인이 그에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이 참상을 똑똑히 봐 두십시오. 그리고 이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부흥을 이루어 5년 뒤, 10년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지켜보았다가 역사의 증언자가 되어주십시오.”
스스로 역사를 창출하려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고경을 무대로 인생의 장대한 무대를 만들어낸다.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자 42개 회관에 이재민 약 5000명을 받아들였다. 학회가 재해대책본부를 마련하고 지원한 물자는 음료, 식료품, 의약품, 의류, 침구 등 약 64만 2000점에 달했다. 동원한 자원봉사자는 2만 500명이 넘었다.
니치렌대성인은 1257년 8월에 일어난 대지진 그리고 폭풍과 대기근, 대역병 등 잇따르는 참화에 마음 아파하며 <입정안국론>을 쓰고, 1260년 7월 당시 사실상 최고권력자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제출해 간언했다.
‘안국론어감유래’에는 “다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며 사람들을 위해서이지 자신을 위해 이를 말함이 아니로다”(어서 35쪽) 하고 씌어 있다. 대성인은 불행한 현실 세상을 눈앞에서 보고 그 고뇌를 해결하려고 홀로 일어서셨다.
입정안국(立正安國, 정<正>을 세워 나라를 평온케 한다)의 입정은 한 사람 한사람의 가슴속에 정법이라는 생명존엄의 법리를 세우는 일이다.
안국은 입정의 귀결로서 사회번영과 평화를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법자(佛法者)의 종교적 사명인 입정은 안국 실현이라는 사회적 사명을 이루어야 완결된다.
입정 없는 안국은 미궁에 빠져 헛돌 뿐이고 안국 없는 입정은 종교를 위한 종교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정안국의 대도(大道)를 힘껏 돌진한다.
도호쿠 동지는 입정안국의 법리에 비추어 “결국은 승부를 결정해 버리는 이외는 이 재난이 그치기 어려우리라”(어서 988쪽)는 성훈을 곱씹고는 광선유포를 위해 다시금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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