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일기 80
낭산(浪山)의 변(辯)
어려서부터 동산에 오르기를 좋아했고 숲 속을 헤짚고
다니면서 산밤이며 머루나 다래 따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또래들에 비해 잘했다.
엄마를 따라다니며 나물 뜯고 큰형님 뒤를 쫓아
버섯 따러 다니는 일이 좋았다.
열 살 정도 무렵 엄마와 함께 쌀을 등에 지고
고개를 넘고 산허리를 감돌며 절집으로
불공드리러 가던 그 산길이 그렇게도 포근했고
오래도록 추억의 영상으로 살아있다.
산골에서 나서 자란 탓인가 산은 늘 눈에서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짬쪼롬한 향수가 되어 나를 불렀다.
배낭지고 나서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산을 찾아 도는 일이 그냥 좋았다.
마을에서 보면 동쪽 박달산 위로 아침해가 떠올랐고
그 너머 월악산 영봉 위로는 한아름 보름달이 솟았다.
그렇게 박달산과 월악산을 바라보면서 유년시절의
동경심과 유랑심을 자극하며 한껏 키울 수 있었다.
그래 청년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찾은 산이 박달산과 월악산이었음은 물론이다.
작은 산이든 크고 높은 산이든 가릴 것 없이
그 품안에 들면 그저 아늑하고 평안했다.
설악이고 한라며 지리 태백 같은
내 나라 내 땅의 명산을 찾아 헤맸고
고향을 더 알기 위해 어려서 올라보지 못했던
고향의 여러 산들을 정신없이 쏘다녔다.
산악회와 어울려 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산길 나그네로 흘러 다니는 게
마음 편하고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시끌한 곳보다는 사람의 발길이 드문 외딴길이
산타령을 맘껏 흥얼댈 수도 있고 또 호젓해서 더 좋다.
낭산(浪山) - 떠돌이의 산.
1980년대 초반, 조선일보 자매지 월간 ‘山’지에
‘내 나라 내 땅’ 제호로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나라 산들에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 바가 있다.
그 때 편집 주간이신 김종환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별칭인데 내 속성과 기질에 어울리는 것 같아
그대로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아호로 삼았다.
산은 내게 국토지리를 익히기 위한 지침서였고
인문지리와 역사를를 공부하는 교과서였다.
이 땅에 태어난 숙명 하나로 내 나라 내 땅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발길에 스치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까지도 내 것, 우리 것이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물며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국토
내 조국인데, 닿는 곳 모두가 유서 깊은 땅이요,
우리네 숨결이 깃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허물어진 성터 깨진 기왓장에서 지난(至難)했던 역사를
회고하고, 대간 줄기의 기험한 봉우리에서는
성스러운 국토의 서기(瑞氣)에 감읍하기도 한다.
뿐이랴, 세월의 이끼가 덮인 비석들을 쓰다듬으며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온고지정을 나누기도 한다.
종일토록 능선을 가르며 하늘구름을 치어다보고
한 마리 사슴으로 떠흐르는 발길-
떠돌이의 산, 산골 나그네의 역마살은
한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타고난 숙명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