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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 (Avant-propos) 7-8.
- 루이스 캐럴에서 스토아학자들로(de Lewis Carroll aux stoïciens)
들루즈: "의미의 논리(1969)" 머릿글 두쪽 pp. 7-8:
* [본문]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작품은 현재 독자에게 아주 마음에 들 것이다. 어린이들이, 또한 어린 소녀들이 선호하는 책들이다. 여기에서 기묘하고, 비의(秘儀)적이고, 또한 얼게들이 있고, 암호와 암호풀이가 있으며, 소묘들과 사진들이 있다. (7)
깊이 있는 정신분석적 내용, 논리적 형식주의와 예시된 언어적 형식주의가 있다. 게다가 다른 어떤 현실적 즐거움도 있는데, 의미와 비(무)-의미의 놀이, 즉 카오스모스(un chaos-cosmos)가 있다. (7)
언어와 무의식의 결혼[밀월,蜜月]들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되고 유명해졌다. 루이스 캐럴에서 이런 밀월이 무엇인지를, 그 밀월이 무엇으로 새로이 결합되었고, 밀월이 그 덕분에 유명해진 것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7)
우리는 의미 이론을 형성하는 파라독스들의 계열들을 소개한다. 이 의미 이론은 역설(파라독스)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설명된다. 의미는 현존하지 않는 본징(une entité, 본래 징후)이다. 의미는 심지어 무-의미와 매우 개별적인 연관들을 갖는다.
루이스 캐럴의 특권적인 지위는 그가 의미의 역설들을 처음 고려하고 연출한 인물이라는 점이며, 때로는 파라독스들을 모으고, 때로는 새롭개 하고, 때로는 발명하고, 때로는 준비하였다.
스토아학자들의 특권적 지위는, 그들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또한 소크라테스주의와 플라톤주의와 단절하면서, 철학자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창도자들이라는 점이며, 이런 새로운 이미지는 의미 이론의 역설적[파라독스적] 구성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적이고 또한 위상적(topique)이며, 논리적인 모습들(des figures)이 각 [파라독스] 계열에 상응한다. 마치 순수 표면 위에서처럼, 한 계열 속에 이런 모습에서 몇몇 점들은 다른 모습에서 다른 점들로 귀착한다.성운[별구름들]과 같은 문제들의 일체는 이에 상응하는 주사위 놀이들 – 이야기들과 장소들, 하나의 복잡한 장소, 하나의 “얽히고설킨 이야기(histoire embrouillé)” - 과 같다.
이 책은 논리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소설(roman)의 시론이다. (7)
[아마도 가타리를 만나서 좀 달라진 생각을 보태면, 퀴니코스적이고 분열분석적 단편 소설(la nouvelle)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사, 일생에서 거칠 수 있는 다양한 경우들의 계열들의 이야기로서 한 사람의 것일 수 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사는 70억의 이야기를 계통별로 분류하여 34편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얽히고설킨” 이야기(histoire embrouillé)”란 용어는 벩송의 우여곡절(la sinuosité)을 닮았다.
우리는 부록으로 이미 발표된 다섯 논문을 소개한다. ... (8)
* 부록으로 다섯 논문을 실었는데, 우리나라 번역본에는 1967년 구조주의에 관한 논문을 첨가하여 이정우가 번역했다. [우리가 발표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
1961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Lucrèce et le naturalisme, 1961)」 in Les etudes philosophique 1961 -> 「루크레티우스와 모방(Lucrèce et le simulacre」 1969
1965 「클로소프스키 또는 신체-언어(Klossowski ou les corps-langage」, in Critique, n°214, mars 1965. - 의미의 논리 부록에 Phantasme et littérature moderne: III. Klossowski ou les corps-langage 로 실림.
1966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다(Renverser le platonisme: Les simulacre, 1966)」(형이상학과도덕 지) -> 「플라톤과 모방(Platon et le simulacre 1969)」
[1967 「(구조주의에 대한 인식)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A quoi reconnait-on le structualisme?」, dans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
1967 「타인 이론(Une théorie d'autrui, Michel Tournier)」, Critique, 1967 ; -> IV. 「미셀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계(Michel Tournier et le monde sans autrui)」.
1967 「짐승 같은 인간 입문: 졸라(Introduction à La Bête Humaine), in Les Oeuvres complets d’Emile Zola, Paris, Dnoel, Vol 6, OC VI, 1967. pp. 13-21. -> V. 「졸라와 균열(Zola et la fêlure, 1969)」
(2:22, 55LKC)
[[ 나로서는 예전에 이 책을 읽을 때, 들루즈의 이 작업이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부수적으로 노트를 만든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을 최근에 발견했다. 철학의 기본 흐름은 존재론과 인식론이 아니라, 과학들과 함께 나란히 가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이 때 과학들은 수학과 물리학을 포함하던 상식과 양식의 시대를 넘어서, 의학과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고등양식의 시대라는 것이다. 분석논리와는 다른 형이상학을 우리는 형이심학이라 불렀다.
벩송은 1900년 파리 철학자대회 이래로 상승하는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철학의 원류 또는 시초는 앵글로색슨 철학과는 다른 길임을 보여주는 강의를 시작했다. 그 강의가 1900년 후반기 원인에 대한 강의였다. 원인에서 발생 또는 생산(창조)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원인의 자유로운 발현으로 생겨나는 다양한 효과들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벩송은 원인 관념 분석 다음 해, 시간 관념을 분석하는 강의를 하였다(1901년). 이 두 강의는 언어에서 개념이라는 일반화와 전혀 다른 도덕성과 종교성의 일반화도 있다는 것이다. 일반화의 두 종류가 페라스의 길과 아페이론의 길이라는 것을 서술한다. 전자가 공간을 토대로, 후자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반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 또는 관념의 분석은 양식(근대의 오성)에 의한 인식이 여러 길들 중의 하나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별하는 전체의 인식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방식이 이항대립의 구조(주체와 대상)를 당연한 사실처럼 놓고서 철학한다고 한다. 이 자들이 여러 방향들(의미)을 두 개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이들은 두 방향 중에서 하나는 주체라고 하여 인간의 인식으로 대체 하였다. 이들은 주체의 대립으로서 대상들을 구성하면서도, 그것들을 실재성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벩송이 보기에 여러 착각들과 오류들, 착오들과 이율배반들이 이항 대립을 먼저 설정하는데서 온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강의록에서 그런 논법을 명제 차원, 문장의 차원, 개념의 차원, 항목의 차원 등으로 언어학에서 당시에 다루는 방식을 그 방식대로 따라가면서, 그 방식으로 따라가면 실재성이 아니라, 겉모습으로 그리고 추상하여 상징(부호)로서 대상들을 다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런 오류의 철학은 한계 내에서 학문(인식)에서만 통용될 뿐인데, 진실로 학문의 종류들은 수학의 경우에서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들이 내부에서는 여러 종류로 분류되고 있기도 한다. 논리학, 수학, 언어학에서 개념화 작업이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을 벩송은 1900년과 1901년 강의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강의록들 2017년 출간).
들루즈 벩송의 강의록들을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문제의식은 벩송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들루즈는 앵글로색슨이 양차 대전후에 의미론(sémantique)에서 전개된 방식을 알았고, 이에 대한 반박 또는 비판은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면서 철학사 곳곳에 먼지투성이로 갇혀있던 것을 끄집어낸다. 들루즈는 벩송의 강의를 몰랐기에 달리 말하기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철학사에서 내면에서(형이심학적으로) 흐르는 철학의 본류가 자연(질료, 물질)에서부터 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당대 철학자들이 자본주의 빠져서 논리실증주의가 주류(majorité)인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며, 어쩌면 그 자본에 자발적으로 예속했을 수도 있다. 나찌를 반대하고 전체주의를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자본의 폐해보다 적들을 쳐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본에 자발적 복종을 했을 수도 있다.
들루즈는 오류와 착오를 지적하기를 넘어서, 앵글로색슨의 분석철학이 자기 나라 문학 안에 논리실증주의보다 먼저 언어뿐만이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새롭게 조명하는 학자가 있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학자들을 비꼰 것은 아니지만, 각성하라고 던진 단편 소설집과 같다. 들루즈는 철학하는 평생의 과정에서, 말년에 말하기를 주제는 생명(Vie)이며,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생명(Vie)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phusis)이며, 이 단어가 휠레로 마테르(물질)로 번역되는 것은 그 시대 문화의 배경을 보아야 할 것이다. 벩송에서는 이 생명이 자연의 자발성으로부터이며, 그 자발성을 온영혼으로 삼으면, 인간 영혼은 온영혼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런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서 계통과 계열에 따른 분류 방식이 철학의 초기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양식이 상대적으로 이원론으로 구별하였고, 이를 과도하게 밀고 나간 것이 이항 대립이다. 이런 대립이 아니라 분열로서 세분화의 과정을 탐구하는 벩송과 마찬가지로, 들루즈가 새로이 철학하는 방법을 일깨우기 위해 파라독스를 생산하는 “미친 생성(자연, 아페이론)”을 잘 들여다보라고 이 책에서 제시한 것이리라. (55LKC)]]
*****책들뢰1969의미논리0120
# 의미의 논리, 1계열, 2계열
왜 의미의 논리인가? 이는 철학서인가, 문학과 언어학, 또한 정신분석학과 분열분석학에 대한 수필집일까? - 철학 거창하게 형이상학, 존재론, 인식론이란 이름의 시대가 있었다. 현대 즉 규소의 시대에 철학은 파편화된 개인의 서사들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수필과 가 같은 방향일 수 있고, 철학 대화로서 마치 노자의 “도덕경”처럼 대구의 여러 계열들을 나열하듯이, 단편 소설과 같이 삶의 이야기를 원인과 귀결이 없이 서술하는 서사일 수 있고, 또는 마치 칸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여러 칸을 달고 가는 긴 열차와 같이 삶에서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같은 긴 열차 안에 어디엔가 묻혀서 살아가는 서서일 수 있다.
단위들의 결집체 볼복스 또는 단세포들로 뭉쳐진 군체와 같은 시대가 아닐까. 규소의 시대가 낳은 해면체(éponge)와 같은 다양체가 아닐까. (55L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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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계열 설명
플라톤에는 경계가 있는 관념(이데아)의 추상화가 있다. 이에 비해 다른 방향으로 분류되는 생성의 일반화가 있다. 이 생성의 일반화는 형상을 뺀 성질의 일반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지식 측면에서 두 가지 방식의 분류를 소피스트 편에서, 입말의 다양성을 이분화를 테아이테토스에서 실행했다. 두 가지 방식 중에서 다른 방식은 아페이론에서 생성인 셈이다. 이런 생성에서 일반화 방식은, 벩송에서, 감성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는데, 다양한 감성의 종합은 삶의 일반성이다.
이런 일반화는 관념과 달리 여러 방향으로 일반화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일반화를 입말로서 터뜨린 이가 수학자이면 작가인 루이스 캐럴일 것이다. 캐럴은 플라톤의 경계있는 관념의 한 방향과 다른 계열들이 다양하게 있음을 예고 한다. 다른 방향들이 관념의 파라독스이며 사건들의 생성이 될 것이다.
제2계열 설명
스토아학파에서는 다른 한편 현존에서는 사물들이 있고, 그 사물들 사이에 연관에서 원인과 효과들이 있다. 각각의 사물을 각각이 원인이며, 연관이 있다는 의미에서 효과들이, 연관 속에서 생겨나는 부가물들(속성들)이 있다. 이 부가물은 물체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점에, 스토아학파에서는 제2성질과 같은 비형체적인 것이며, 움직이는(운동하는 변화하는) 성질로서 드러난다. 이런 연관들은 인과관계가 아니며, 두 물체 사이에는 틈이 있다. 스토아학파가 보기에 플라톤의 관념(이데아)는 물체도 비물체적인 것도 아니다. 스토아학파의 현존에는 연관들이 있을 뿐이며, 이들의 연관을 물체적 관계로 설명하려 한 것은 에피쿠로스주의이다.
이 연관들은 내부적인 것과 현존의 현재하는 것의 동시적인 한에서 무엇(이것임)일 뿐이다. 스토아에서 연관들의 효과는 현존에서 현재인 한에서 표면적일 뿐이다. 이 표면의 생성이 사건들 자체이다. 이런 입말에서 등장하는 표면효과를 다룬 이는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크리시포스이다. 이런 한 것을, 기표라고 말할 수 있다면, 루이스 캐럴은 그림과 같은 형상화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데아가 아니라 형상화들은 기호화, 상징화, 표지화 등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퍼스의 기호론에 가까울 것이다. 캐럴은 어린 소녀에게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수학의 파라독스와 달리, 입말에서 파라독스를 발견했을 것인데, 입말은 단지 정의와 판단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에서 표면으로 생성은 여러 갈래이며 다양하게 의미를 생성하며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형상화가 다른 언어체계에서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심층과 표면의 연관 속에 이어지는 형상화, 즉 이미지들은 대화자들 사이에 또는 억압받지(명령받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웃고, 즐기며, 기뻐하는 감성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이 이미지가 허구일지라도 정태적 종교의 우화적 효과처럼 어린 소녀에게 종합감성(공감과 교감)의 효과를 지닌다.
들루즈는 플라톤의 관념(이데아)를 실재성이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스토아학파가 보기에 파라독스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단다는 것이다. 그런데 캐럴은 파라독스 연구자인 셈인데, 수학보다 언어의 입말에서, 이 생성들이 이미지들(비형체적)로서 연관을 맺고, 일방향으로 원인-결과(효과)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간에 원인과 효과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내부의 깊이에 온사건이 표면에서 사건들로 드러나는 방향은 파라독스에 대항하는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에피쿠로스 원자들의 결합처럼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사물들 각각의 사이에,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여러 빠른 선들처럼, 여러 방향들과 비형체적 속성들이 생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성은 남자애보다 소녀들이 잘 느끼고 감화한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캐럴은 꼬마 남자란 서툰 인간과 같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감화작용이 부족하여, 공감과 교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캐럴이 보기에 완전긍정판단의 대립 파라독스 하나만을 찾는데 비해, 여자애는 부분긍정판단에도 파라독스들이 있으며, 거의 무한정의 파라독스들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긴다. 이 무한정한 파라독스란, 유클리드 기하학의 하나의 직선에 대해 곡면의 유율에 따라 여러 파라독스 직선들이 있을 수 있다.
이로서 들뢰즈는 생성의 다양체 개념이 여러 방향들과 기호들이라는 측면을 사유해 냈을 것이다. (56LKJ)
***내용 중에서
제1계열: 역설들의 제1계열, 순수 생성 Premiere série de paradoxes, du pur devenir 9-12.
[들뢰즈는 역설의 두 계열로서 하나는 플라톤(제1장), 다른 하나는 스토아학파(제2장)를 들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에서 지성의 대상으로 기하학적 척도로 잴 수 있는 것(페라스)과 잴 수 없는 생성의 두 계열이 서로 대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스토아의 것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처럼, 형상화된 것과 형상화 될 수 없는 것 사이를 다룬다. 전자는 형이상학의 대상의 질적 구별을 하는 두 가지 방식, 정지와 운동의 두 측면, 두 방식으로 사유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후자는 두 측면이 대상화되는 측면보다 한 덩어리가 있고 이에서 발현되는 여러 양태들이 있다. 전자는 자연 즉 질적 변화(생성)의 일반화에 대한 두 입장이고, 후자는 영혼(물체의 상태)의 자기 정체성의 다양화이다. 결국 전자에서 시간은 질적 공간의 이원성에서, 후자에서 시간은 정체성의 자기 변화를 보여주는 다양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0TLH)]
*플라톤의 구별: 측정된 사물과 미친 생성 9
(Distinction platonicienne des choses mesurées et du devenir-fou)
9 거울의 이면(1871)에서와 마찬가지로 굉장한 나라 엘리스(1865)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매우 특수한 존재들, 즉 사건들, 순수 사건들이라는 범주다. ... 그녀는 지금 더 크고 이전에 더 작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전보다 더 크고 이루어지기 보다 더 작았다는 것[전보다 더 크고 미래보다 더 작다는 것, 즉 과거의 크기와 미래의 크기와 다른 지금의 크기는]은 동시적(en meme temps)이고 또 단번에(du meme coup)이다.(9) [과거도 미래도 아닌 그녀는 동시적이다]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가는 것은 생성의 본질에 속한다. .. 역설(paradoxe)이란 두 방향(sens)을 동시에 긍정한다. (Deleuze, LS 9)
9-2 플라톤은 다음 두 차원의 구분을 제안한다. 1) 한계지어지고(limitées), 측정된 사물들, 고정된 질들의 차원. ... 2) 측정되지 않은 순수 생성, 미친 듯이 움직이는 생성[플라노메네 아이티아] ... (9) [1) 페라스와 2) 아페이론]
(“보다 덥고 보다 추운 것은 어떻게든 움직일 뿐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 “보다 젊은 사람이 보다 늙은 사람보다 더 늙게 되고...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생성을 끝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성하기를 그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생성하지 못할 것이요, 단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9-10)
10 우리는 플라톤의 이원성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가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이데아와 질료, 형상들과 물체들에 [구별에] 전혀 있지 않다. ... 원본(Modèle)과 복사의 구별(distinction)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사본들과 시뮬라크르들의 구별에 있다. (10)
순수 생성, 즉 무규정성(illimité, 경계없음)은 그것이 형상을 비켜가는 한에서, 그리고 원본과 복사본에 동시에 저항하는 한에서 시뮬라크르의 질료이다. (10) [생성자체는 원본없이도 복사없이도 그 무엇이 나왔다. 그리고 다음도 나왔고, 이들 사이에 원본없는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다.]
크라틸로스의 주요 내용 ... 두 언어, 이름들의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형상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정지와 고정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형상의 작용에] 저항하는 운동들과 생성들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10)
*무한한 동일성 L'identité infinie 10
순수 생성의 역설[vkfkehrtm]이란, 생성이 현재를 비켜갈(esquiver)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한 동일성이다. 동시에 두 방향으로 무한한 동일성, 즉 과거와 미래, 어제와 내일, 더와 덜, 너무와 아직,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 등. 한계를 고정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한계를 벗어나서 한계를 짓지 않는(illimité) 생성의 무한한 등가성을 통해 그것들(한계들)을 복구시키는 것도 언어이다. (10-11) [전자의 언어는 지성(오성, 이성)의 역할에서 이루어진(fait)의 언어이고, 후자의 언어는 직관과 공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se faisant) 성질들이다. 후자에서 사유가 넓고 삶에 기초하고 있으며, 전자에서는 규정된 범위 안에서 규칙과 법칙을 찾는 방식이다. (56LKD)]
* 엘리스의 모험들, 즉 “사건들” Les aventures d'Alice ou "événements" 11
무한한 동일성 속에서 등장하는 이 모든 뒤바뀜들(renversements, 전복들)은 엘리스의 인칭적 동일성의 흔들림, 고유명사의 상실(perte) 등과 동일한 귀결을 나타낸다. (11)
[고정적 관계는 일반명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따라서 인칭적 자아(le moi personnel)는 신과 세계일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 정지의 명사[일반명사]들이 순수 생성에 끌려 들 때, 그리고 사건들의 언어 속에 미끄러져 들어 갈 때, 자아, 세계, 신에서 모든 동일성은 상실된다. (11)
사건자체가 여전히 동시에 두 방향으로 가는 한, 또 사건자체가 양 방향을 따라서 주체를 갈라놓는(écarteler) 한, ... 역설(paradoxe)은 우선 일 방향으로서 양식(bon sens)을 파괴하는 무엇, 그러고 나서 고정된 동일성의 할당(assignation)이라는 상식(sens commun)을 파괴하는 무엇이다. (12) [들뢰즈는 모순이라 하지 않고, 역설(파라독스)이라고 한 것은 플라톤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양식은 지성의 한 방향과 감각의 한 방향을 파괴하면, 파라독스 속에서 생성이라는 다른 방향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성의 양식도 감성의 상식도 독사의 일방향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40TKH)
[생명(온의식), 즉 사건자체는 두 방향이 있다. 이 때문에 언어에 두 의미, 단어[개념]에도 두 의미가 있다. 이런 두 방향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데미우르고스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페라스와 아페이론이 있다. (40TKH)]
***내용 중에서
제2계열 :역설의 제2계열, 표면효과들 2e série de paradoxe, des effets de surface, 13-21
[플라톤이 존재의 구별에서 측정된 사물과 미친-생성의 구별은 파라독스이다. 여기서 생성은 측정의 상식(감각)과 양식(지성)의 방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래서 생성의 파악의 방법은 감각도 양식도 아닌 어떤 것으로 있다. 이에 비해 스토아의 존재의 구별은 물체(corps)와 효과(effets), 다시 말하면 상태와 사건들, 이 후자들은 언어와 같은(사유의 제2 평면과 같은) 영혼의 비형체적인 것이 표현된 것으로서 사건들이 있다. 결국 플라톤이 두 개의 존재 방식을 보았다면, 스토아학파는 둘 사이의 유물적 실체와 피상적 사건(언어로 기록된 것)들의 파라독스를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박홍규(1919-1994)는 플라톤에서 두 파라독스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고, 둘 사이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지성의 관심에 따른 고정과 유동의 차이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관심은 자연의 조작가능성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스토아는 물체의 과정을 보았고 그것에 따른 자기 현실화 또는 효과화에 관심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플라톤이 파이드로스(Phedre ou sur la beauté, Phaidros)에서 영혼의 존재론적 설명에서 존재에 대한 연속적인 측면의 설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소피스트편 생명존재에 대한 분할의 설명이 단지 선분의 분할이 아니라 원의 분할(중심에서 현을 가르는 분할)이라는 측면에서 보기를 제안하였다. 이 원의 분할은 내재성의 공유(공연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중심에서 원주로 이행을 회오리로 비유하고 점에서 회오리의 경계까지를 시간의 기억의 충만으로 설명하면 베르그송의 지속(시간)으로 생성을 설명할 수 있다. (40TLH)]
* 스토아적 구별: 물체들, 즉 사물들의 상태들 대 비물체적 효과, 사건들
(Distinction stoïcienne des corps ou états de choses, et des effets incorporels ou événments)
스토아학파는 이번에 사물(choses)의 두 종류를 구별한다. 1)물체들(corps, somata), 응집력[강도](tensions), 물리적 성질, 관계, 수동과 능동, 사물들에 해당하는 상태 들이 있다. ... 물체들 즉 사태들의 유일한 시간은 현재이다. .. 물체들 가운데 원인과결과는 없다. 모든 물체들은 서로와의 관련 하에서 또 서로를 위해서 원인이다. 그리고 이 원인들의 통일성은 우주적 현재의 부피(étendue) 안에서 운명(Destin)이라고 불린다. (13)
2) 모든 물체는 서로 서로의 또한 서로를 위한 원인이다. 물체들은 어떤 사물들 즉 전혀 다른 본성의 것의 원인이다. [전혀 다른 것 즉 효과], 효과들(effets)들은 물체가 아니고 소위말해서 ‘비물체적인 것’들이다. 이들은 물리적 성질(qualité)이나 속성(propriété)들이 아니라, 논리학적 또는 변증법적 부대물(attributs)들이다. 이들은 사물들이나 사태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13) [(중기)스토아학파의 사건들은 움직임으로 동사 원형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벩송의 강의록에 따르면 명제론에서 긍정문, 부정문, 의문문의 토대이다. ]
이들[효과 또는 사건]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들에 관련된다. ... 되돌릴 수 없는 것(impassible) -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 [한번 땅에 쏟은 물을 다시 그릇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이들은 살아있는 현재가 아니라 부정법들에 관련된다. 즉 이들은 한계지어지지 않는 아이온(Aiōn),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뉘며 현재를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생성(devenir)이다. (13-14) [여기서 생성은 크로노스인 셈이다. 아이온과 크로노스는 대칭도 평행도 이원론도 아니지만 연대성가 있다. 그 연대성은 부분과 전체에 연관되어 있지만, 부분이 전체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이 숙명(필연)이다. 운명은 전체와 연관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개체(부분)의 자발성을 어떻게 만들어가며 사는가 하는 것이다. 산다. 자연의 자발성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운명이다. (56LKD)]
에밀 브레이어(Emile Brehier, 1876-1952)는 “칼이 살을 벨 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성질이 아니라 새로운 부대물(attributs, 속성들), 베어진다(être coupé)는 부대물이다.... 스토아학파는 처음으로 존재함의 두 수준을 단호히 구분했다. 하나는 심층적이고 실재하는 존재함의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물체적인 무한한 복수성의 수준이다” (14)
[스토아학자들에게] 증기는 하나의 물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커지다’ ‘작아지다’, ‘붉어지다’, ‘푸르러지다’, ‘나뉘다’ ‘자르다’ 등등으로 의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들은 사물의 상태가 아니며 심층의 혼합물(des mélanges)도 아니다. 이들은 이 혼합물들로부터 유래하는 {물체의} 표면에서 비물체적 사건들이다. 나무는 푸르러지고 ‥…(15)
한 철학의 천재성은 우선 철학이 존재들과 개념들에 부여한 새로운 분배들을 통해 측정된다. 스토아학자들은 사람들이 결코 보지 못했던 경계선을 긋고 있고 경계선을 지나가는 중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반성 전체[반성적 사고]를 이동시켰다(déplacer). (15)
* 원인 관계의 균열 Clivage de la relation causale 15.
따라서 자유는 두 가지 상보적 방식으로, 즉 원인들의 연계인 운명의 내재성, 그리고 효과들의 연계로서 사건들의 외재성을 통해 확보되었다. 스토아가 운명과 필연을 대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15) [플라톤의 형상과 아낭케의 구별에서 아낭케는 영원한 부조화에 가깝지만, 스토아에서 운명과 필연의 구별에서 필연은 환원 불가능한 사건이다.]
에피큐로스 학파에서 ... 클리나멘(clinamen)에 의해 그 상호 의존성을 보장받는 원자들의 계열에 따라 인과관계를 마름질 한다. 이 경우에 성립하는 것은 이제 필연없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없는 인과관계이다. (15-16)
그리고 이 해체(dissociation)는 원인들의어미변화(déclinaison)에 관련해서든, 아니면 뒤에서 분석하겠지만 결과들의 동사변화(conjugaison)에 관련해서든 언제나 언어에 관련된다. 반면에 스토아학파에서 사물들의 상태들, 즉 질들과 양들은 실체와 동등한 의미에서 존재들이다. 그들은 실체의 일부를 이룬다. 그리고 이런 자격으로,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본성(entité, 본징)으로서 비물체적인 것을 구성하는 예외 존재(extra-être)에 대립된다. 최상위의 항은 존재(Etre)가 아니라, 어떤 것(quelque chose) 즉 그 무엇(Aliquid)이다. (16) [존재범주체계: 중심에 불, 물체, 비물질적인 것, 그리고 이데아적인 것(기호적인 것)]
[여기서 예외 존재는 언어에 속하는 것으로 비물체적인 것이며, 이것의 최상위 존재는 존재 또는 이데아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어떤 것(aliquid)이다. 이 무엇은 불교에서 화두로 삼는 이뭣꼬와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뭣꼬를 논하는 것은 플라톤의 전복보다 더 논리의 극한을 나아간 것이 아닐까? 이 뭣꼬를 질료의 필연성 쪽에서 본다면 플라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유를 한 것이 될 것이다. (41LKG)]
최상위의 상층[가장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를 그리고 현존하는 것들(les existences)과 내속하는 것들(les insistances)을 아우르는 한에서 무엇(Aliquid)이다.나아가 스토아학파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 플라톤의 이데아의 성격은 사물의 표면에서 되돌릴 수 없고 불모이자 무효과적인 예외 존재로 전락한다. 다시 말해 형상적인/비물체적인 것은 물질적 차원에 속하지 않은 이제 단지 “효과”에 지나지않는다. (16-17)
* 표면으로 올리기 Faire monter à la surface...
이 귀결은 매우 중요하다. ... 이제 모든 것은 표면으로 올라온다.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작업이 가져온 결과이다. 미친 생성, 무규정적인 생성은 더 이상 으르릉 거리는 바닥이 아니다. 그것은 표면으로 올라와 되돌릴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내부의 영혼이 외화되면 특이성의 개인으로 정체성이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시뮬라크르는 지하에서 형상을 피해 은신하기를 그치고, 자기 자리로 올라와서 노는 효과들이 된다. 인과의 의미에서 효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소리, 시각, 언어의 효과들이다. [신체가 외부로 보내는 것은 소리, 시각(제2성질), 그리고 기하학적 방식으로 추상화한 형상의 언어들이다.] (17)
스토아학파는 표면효과를 발견했다. 시뮬라크르들은 지하에서 반항하기를 그치고 그들의 효과들을 작동시킨다. (우리는 시뮬라크르들의 이 효과를 스토아학파의 용어법과 무관하게 환각(phantasme)이라고 부를 것이다. (17)
한계없는 생성(devenir-illimité)은 사건자체가 된다. 모든 [플라톤의 도식에 대한] 전복과 더불어 사건자체이다. (17)
스토아학파들은 역설의 애호가들(amateurs)이자 발명가들이다. ... 스토아학파들은 역설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역설을} 언어 분석의 도구로 그리고 동시에 사건들의 종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8)
사건은 생성과 공연적(coextensif)이며, 생성 자체는 언어와 공연적이다. 그래서 역설은 본래 ‘연쇄추리(sortie)’, 즉 계속되는 덧붙임과 잘라냄의 과정을 따라 진해하는 의문 명제들의 계열이다. (18) [공연적이란 표현은 동일한 단어인 동연적과 다르다.]
크뤼시포스(Crysippe)가 가르치기를 “당신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 무엇은 입을 지나간다. 예컨데 당신이 짐수레라고 말할 때, 짐수레가 당신 입을 지나간다.” (18)
*루이스 캐럴에서 표면의 발견 Découverte de la surface chez Lewis Carroll
스토아학파가 올려놓은 이 생각을 루이스 캐럴은 나름대로 다시 형상화한다. 루이스 캐럴의 전 저작에서 사건들은 존재들, 사물들, 사태들과 변별화 되어 등장한다. (19)
따라서 엘리스의 여러 모험들이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모험이 있다: 표면으로 올라감, 그릇된 심층의 거부, 모든 것이 경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캐럴이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인 ‘앨리스의 지하 모험들’을 거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19) .
거울의 이면(1871)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사건들은 사물들과의 첨예한 차이를 드러내며, 심층을 포기한 채 표면에서, 물체들을 비켜가는 이 비물체적인 얇은 수증기, 그것들은 둘러싼 부피없는 막, 반사하는 거울, 이것들을 계획하는 장기판에서 발견된다. (19-20)
스토아학파의 발견은 많은 지혜들을 가정하고, 온전히 윤리학을 끌어낸다. 그것은 어린 소녀의 발견물이다. 이 발견물은 가장자리에서만 커지고 줄어든다. 또한 [이발견물은] 붉어지고 푸르러지기 위한 표면이다. .. 훗날 위대한 인물들이 심층에 의해 사로잡히고, 너무 심층적이기에 [깊이 속에] 다시 쳐 박혀서 이해하지 못한다. (20)
왜 스토아학파의 예들이 루이스 캐럴을 계속해서 영감을 주었을까? 나무는 녹색이 되고, 해부칼은 자르고, 전투는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엘리스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무들 앞에서 이고, 험프티 덤프티가 엘리스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거는 것은 나무에게 이다. (20)
숲, 전투, 상처, 이 모든 것[사건], 이드(Id) 만큼이나 심층적인 이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는가? 역사[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길들이 토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며, 지리학은 대지가[땅은] 얇은 층 위에서만비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20)
스토아 현자의 재발견은 어린 소녀에게 예약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루이스 캐럴은 일반적으로 소년을 싫어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엘리스에서 사내아이는 돼지새끼로 변한다. 일반적으로 어린 소녀들만이 스토아주의를 이해하며, 사건의 의미를 소유하며, 이중의 비물체적인 것을 끌어낸다. 그러나 작은 사내아이가 말더듬이에다 왼손잡이임이 판명되고, 표면의 이중적인 의미로서 의미를 정복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20)
실비와 브루노(1889)에서는 안팎에서 위아래에서 여러 방식으로 배움을 얻는, 그러나 ‘심층’만은 비켜가는 사내아이가 창조적 역할을 맡는다. 실비와 브루노는 앨리스(1865)에서 소묘된 변화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이는 다시 거울의 이면(1871)에서 확대된다. (20-21)
신장기[늘이는 기계]는 노래들마저도 길게 늘인다. 그리고 뫼비우스 띠처럼 생긴 포르투나투스 주머니[화수분]는 엉뚱하게 꿰매진 수건들로 만들어져 그 안과 밖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그 주머니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셈이며 안의 것이 밖의 것이 되고 박의 것이 안의 것이 되게 말들고 있다. (21)
실비와 브루노(1889)에 이르러 현실로부터 꿈으로, 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이행은 복수화되고, 완전히 개선되며, 그 완전한 결지에까지 도달한다. 이러한 이행은 언제 표면을, 가장자리를 늘임으로써 이루어지며,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의 힘에 의해 {표면/가장자리의} 다른 쪽을 따라간다. 안과 밖의 연속성은 심층의 모든 층위를 대체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들에 관련해 유효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온사건(Evénement)에서 표면 효과들은 모든 생성과 {그 생성의} 역설들을 언어로 올라오게 한다. (21)
(4:28, 40TKI) (6:30, 56LKC) (7:07, 56LKD) (8:17, 56LKJ)
*참조:
428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 Plátôn, 전428/427-전348/347) 고대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피스트들을 정력적으로 비판했다. 소크리테스의 제자.
크라틸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280 크뤼시포스(Chrysippe de Soles, Χρύσιππος ὁ Σολεύς, 전280-206) 스토아학당에서 클레안테스 다음 3대학장(전232-206).
O
205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5-270)
1832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본명 찰스 럿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영국 작가, 수학자, 사진사이다.
수학작품으로
- 대수 기하학 평면의 강의(A Syllabus of Plane Algebraic Geometry (1860)
- 알파벳 암포(The Alphabet-Cipher, 1868)
- 유클리드와 그의 현대 경쟁자들 (Euclid and his Modern Rivals (1879)
- 논리학 놀이(The Game of Logic, 1887)
- 수학 외설서(猥褻書) I, II Curiosa Mathematica I (1888), Curiosa Mathematica II (1892)
-(fr) Logique sans peine, trad. Jean Gattégno et Ernest Coumet, ill. Max Ernst, éd. Hermann, Paris 1966.
문학작품으로
- 훌륭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Les Aventures d'Alice au pays des merveilles),
-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 1871)(fr. 거울의 이면(De l'autre côté du miroir) (includes "Jabberwocky" and "The Walrus and the Carpenter"),
-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 1876)
- 실비와 브루노(Sylvie and Bruno, 1889) - 이 소설 속에서 논리학과 그것의 파라독스, 기표들과 기의들이라는 주제들을 다루면서 유머와 무의미(넌센스)의 모든 조합들을 밀접하게 다룬다. 그의 셋째 소설인 실비와 브루노(1889)를 1889년에 출간하고 1893년에 결론을 냈다고 한다. (54ULA)
- 실비와 브루노 결론판(Sylvie and Bruno Concluded, 1893)
- What the Tortoise Said to Achilles (1895)
1876 에밀 브레이어(Émile Bréhier, 1876-1952)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학자. Histoire de la philosophie I: Antiquité et Moyen Âge(trois volumes), Histoire de la philosophie II: La philosophie moderne(quatre volumes) / Émile Bréhier, La Théorie des incorporels dans l'ancien stoicïsme, Vrin, 1928. pp. 11-13.
<예전에 읽은 것을 새로 정리하면서 첨가하고 또한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