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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교를 믿어야 하나.
그리고 왜 금강경으로 수행해야하나 라는 질문에 선지식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실까?
가상적 선지식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 봅니다.
어째서 누구나 부처님을 믿고
금강경 공부를 해야 하는줄 알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사는 동안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때 위대하다고 알려진 선인(先人)들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였을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맛보는 동호인들의 모임이 형성될 수 있다.
이렇게 되므로 각종 종교가 발생하였다 할 것이니
종교는 사실 생활의 필요(獨,Lebens Gestroben)에 의한 출발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어째서 중생들은 생로병사와 같은 불가항력적 난제를 비롯해
빈곤 근심 공포 외로움등 각종 고통을 만나게 되는가.
부처님께서는 무시겁으로 지어온 죄업으로 말미암아
실제로는 없는 “나(我)”라고 하는 것이 꼭 있는 것처럼 생기게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모든 고통이나 난제들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실은 본래는 없는 “나”로부터 발생한다고 말씀하셨다.
삶에 무상(無常)을 느낀다.
가난하다. 병들었다. 근심이 많다라고 느껴지는 모든 것은
실은 “나”라는 상(相) ― 무시겁의 죄업이 만든 결정체(結晶體)―이 만든 작난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부처님을 믿고 수도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나라는 상을 없에는 과정이며, 죄업 소멸의 과정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계(五戒), 십선(十善),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모두 나(ego)의 소멸이요,
죄업의 소멸을 위한 수행문이라 할 수 있다..
죄업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차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는 존재가 허상임을 알게되는데,
참나(眞我)는 곧 부처님 성품이라 할 것이다.
“나(我)라는 상 즉 아상(我相)의 다른 이름이,
무시겁의 죄업이요, 몸뚱이 착이요, 애욕이요, 탐(貪),진(瞋),치(癡)이다.
이 세상에는 성인(聖人)들이 다수 출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아상을 소멸하고
탐진치를 멀리하는 각종의 가르침을 펴왔다.
이들 성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탐진치의 독심(毒心)이
부드럽게 되어 행복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탐진치를 완전히 소멸하였다기 보다는
다소 부드럽게 함으로써 얻어진 행복이기 때문에,
실은 재앙이 재발하는 악순환을 나타내는 불완전한 행복이라 할 것이다.
탐진치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완벽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부처님의 가장 밝으실 때의 가르침 금강경 가르침을 받들지 아니하고 아니된다.
왜 그러냐? 금강경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의 용심을 보아라.
그들은 부처님,하나님 ……을 부르면서 거룩한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은 부처님,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고,
자신 속의 익숙한 어떤 생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느냐?
아상 즉 탐,진,치에 빙의(憑依) 된 중생이 절대선(絶對善)를 지향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사람들은 극락세계에 가지 못하고
텁수룩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 그들이 아미타불을 염송할 때 모든 분별심이
끊어진 아미타불을 지향하였다면
아마도 그들은 이미 금생에 극락세계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비어있는 아미타부처님 대신
자신의 그럴듯한 생각인 텁수룩한 영감의 모습을 지향하며
아미타불을 염송했기에 금생에 극락을 체험하지 못함은 물론,
내생에도 자신의 생각대로 텁수룩한 영감의 모양을 하고 태어난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부처님의 참모습을 지향하려고 하여도
도저히 참모습을 지향할 수 없는 근본적 장애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즉 아상으로부터 출발한 잘못된 신앙 때문인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모두 올바르지 않다는 금강경의 가르침(凡所有相 皆是虛妄)을 따르지 않는한,
또는 자신의 죄업이 태산같이 크다고 생각하여 아상을 한없이 낮추고 죽이기 위해서
부처님 전에 무릅꿇고 굴복하는 깊은 참회가 동반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부처님을 제대로 지향하지 못하게 되고
참 행복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부처가 되는 방법은 금강경에서 나온다 하셨던 것이다.(皆從此經出)
부처님께서는 죄업의 종류에는 마음 속의 근본적인 세가지(貪,嗔,癡)죄업이
몸으로 세가지(殺生,偸盜,邪淫), 입으로 네가지(妄語,綺語,兩舌,惡口)죄업으로 나타나는데
이 열가지 죄업을 연습하면 악도에 떨어져 하염없는 고통을 받고
이 죄업을 소멸하면, 행복을 얻고 결국은 부처님처럼 밝아지리라 말씀하셨다.
죄업소멸을 위해서는 우선 나자신은 한없는 죄업덩어리요,
내생각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부처님께 고백하고
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죄업의 용심으로부터 된 것이니
이를 부처님께 바쳐 참회한다고 하여야 한다.
몸으로 지은 죄업에 대해 논의해보자.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야함은 물론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
언제인가 다투는 두사람을 관찰하니 사람이 아닌 두 말(馬)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 보이더라.
남을 억누르려는 마음이 곧 말의 마음인데
이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마음이 옳지 않음을 알고 참회하지 않는다면
내생엔 결국 말의 몸을 받을 것이다.
축생의 몸은 큰 감옥이요 고통이다.
남과 다투는 과보가 이러게 심각하거늘 하믈며 어찌 살생을 할 수 있겠느냐.
비록 살생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 남을 억누르려 하는 마음
남을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또한 살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여라.
심각한 재앙의 씨앗이되니 깜짝놀라
그 마음을 부처님께 지극 정성으로 바쳐 참회하도록 하여라.
도둑질하지 않음은 물론 공짜를 바라거나 취하지 말 것이다.
빈곤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으랴.
빈곤은 숙세에 바라는 마음을 연습한 결과요,
도둑질한 과보이다. 도둑질을 모든 복덕(福德)의 종자를 말살하나니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 것은 물론,
공자님의 제자 증삼(曾參)과 같이 거저 생기는 것도 절대로 취하지 않는 용심을 가져야 한다.
남는 물건이 있다면 여투어 두었다가
부처님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는 것이
곧 복덕의 씨앗을 심는 길이다.
마음 속에 바라는 마음이나(부처님의 가피를 비롯해)
공짜를 기대하는 마음은 심각한 재앙의 씨앗이니
바라는 마음이 비록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하여
죄가 아니라 생각말고 깜짝놀라 부처님께
그 마음을 바쳐 참회해야 할 것이다.
전생에 잘 닦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숙세에 죄지음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하더러도,
사된 음행은 하지 말아야한다.
자신의 애욕의 죄업을 깊히 참회하고,
가족을 부처님께 인도하며,길이 음욕을 해탈하는 원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음욕을 낙(樂)으로 아는 마음은 무시겁으로 음욕을 연습한 탓,
음욕을 마음에 품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의 씨앗임을 알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음욕이 참회 됨에 따라 얼마나 큰 정신적 안락과 큰 자유를 누릴 것인가.
반대로 자신의 음욕을 연습하면 자신은 점점 추해질것이며,
내생에는 추운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으리라.
말(語)이 곧 마음이다. 망어(妄語)와 양설(兩舌)은 탐심의 표현이며,
기어(綺語)는 애욕, 악구(惡口)는 곧 진심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눈에 뜨이는 거짓말, 눈에 들어나는 양설과 기어,
그리고 눈에 뜨이는 악구에는 물론 삼가야 탐진치의 싹이 자라지
아니하고 밝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잖은 말 같고 합리적인 말 같아도,
자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용심의 독(毒)이 들어나서
심각한 재앙의 씨가 될 수 있으니,
한마디 한마디 말도 부처님께 말씀드리는 것처럼 정성드려야 할 것이다..
당나라의 뛰어난 문장 한퇴지(韓退之, 당송팔대가의 한사람)가 조주(潮洲) 자사(刺史)시절,
당시 생불이라고 널리 추앙을 받았던 태전선사에게
“배에 음산한 바람이 불어 배가 갈길을 잃고 나찰(귀신)의 나라에 좌초했어도
그 중 한사람이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모두 해탈을 얻느니라”
라는 법화경이란 불경(佛經) 한 구절이 무슨 뜻인가 하고 질문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태전선사는 댓뜸
어떤 개같은 년이 개같은 짓을 하여 저런 개 같은 놈을 낳았는고.
하고 추상같은 꾸중을 하였다.
밝은 태전선사는 비록 불경(佛經)이라고는 하지만
“음산한 바람이 분다”는 한퇴지의 말 속에서 개(犬)와 같은 추한 용심이 번득이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고,
그 추한 용심을 해탈시켜 주기 위해서 험한 말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험한 말을 듣기까지 한퇴지는 단 한번도
자신의 죄업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곧으며 학식도 많고 인품이 훌륭하다고 자만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천한 개의 용심 속에 뒤덥힌 죄인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퇴지는 태전선사의 말씀을 계기로 자신의 죄업이 태산과 같음을 깨닫고
독실한 불자가 되었지만, 태전선사와 같은 선지식을 만나지 않고
자신의 용심대로 살다 세상을 떠났으면 그 후생은 어찌되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한퇴지와 같이 자신의 죄업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자신은 깨끗한 존재로 착각하고 다른 사람은 어리석다하고 가르치려 한다.
남의 허물을 들추며 오만하기 쉬운 것이다.
자신의 죄업이 얼마나 남아 있나를 판단하고저 한다면
뱀(蛇)의 모양을 상상해 보라.
마음 속에 뱀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자신은 아직 뱀과 같은 탐욕과 진심의 흉한 죄업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대로 뱀의 모습을 아무리 상상하려 해도 생각이 잘 되어지지 않는다면
죄업이 상당히 참회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와 함께 있다고 생각할 때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면
그 두려움 또한 자신의 죄업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죄업이 소멸된 사람은 뱀과 함께 있어도 호랑이가 곁에 있어도
뱀이라 여겨지지 아니하여 늘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할 것이다.
그대들은 항상 악도의 길과 불법의 길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존재이다.
악도의 길을 갈 것이냐? 부처님을 따르겠느냐?
그대들 마음 속의 “내”라는 무시겁의 애욕의 업장은
부귀영화의 길을 따르자. 놀자. 적당히 살자고 한다.
이 길은 쉬운 길이지만 이 길을 따르면 고난이요 심각한 불행이다.
또 그대들 마음 속에 언제인가 부처님을 향했던 선근(善根)은 늘 쉬지 말고
부처님 지향하자. 게으르지 말자.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자라고
자성(自省)의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길은 고달픈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순간순간 기쁨이요 행복이요, 결국 극락에 이르게 된다.
그대는 지금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 극락의 길이냐 지옥의 길이냐?
순간순간 그대 주위의 상황은 그대들에게 엄숙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중립은 용납되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불도수행을 선택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될 것이다.
첫댓글 금강반야바라밀경_()_
나무금강반야바라밀 잘다녀오셨나요?
@청정심별 네~ 금강경 제24분 福智無比分.. 듣고 왔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