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인이 이누이트족과 교역을 했더라면 해마의 엄니가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누이트족은 해마의 사냥에 뛰어났고, 노르웨이인에게 해마의 상아는 유럽에 수출할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인의 목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상아조각이 누가 사냥한 해마에서 얻는 것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교역이 있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르웨이인의 유적에서 이누이트족만이 팔 수 있는 것,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것, 즉 반달바다표범의 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반달바다표범은 그린란드의 겨울에 가장 많은 바다표범 종(種)이었지만 이누이트족만이 잡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인들은 그런 재주가 없었다.
따라서 노르웨이인들이 겨울을 위해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서 굶주렸을 때 반달바다표범만큼 절실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르웨이인의 유적에서는 반달바다표범의 뼈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종족 간에는 교역이 없었다.
설령 있었더라도 아주 드물게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고고학적 증거에서도 이누이트족은 노르웨이인들과 완전히 다른 행성에 산 듯하다.
같은 섬과 같은 사냥터를 공유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지경이다.
골격에서나 유전자에서 그들이 결혼했다는 증거도 없다.
그린란드의 교외 묘지에 묻힌 유골들의 두개골을 분석해보면 스칸디나비아인의 두개골과 유사할 뿐,
이누이트와 노르웨이인의 혼혈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당시 노르웨이인들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누이트와 교역하지 않고 이누이트에게 생존법을 배우지 않은 것은 노르웨이인들에게 큰 손해였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르웨이사냥꾼들은 노르드르세타에서 틀림없이 이누이트 사냥꾼들을 만났을 것이다.
이누이트족이 서쪽 정착지에 도래했을 때는 피오르드 외곽에서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누이트의 날렵한 배와 노련한 사냥술을 보고, 그들의 나무로 만든 투박하 배를 물론이고
해마와 바다표범을 사냥하는기술도 이누이트에게 미치지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이 머릿속에서만 상상하던 사냥법을 이누이트는 해냈을 테니까!
1500년대 후반부터 그린란드를 방문하기 시작한 유럽 캄험가들은 카약의 속도와 기동성에 혀를 내두르며,
이누니트족이 반인반어(半人半魚)처럼 유럽의 어떤 배보다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고 말했다.
탐험가들은 이누이트의 다인승 배 우미락, 투척 능력, 가죽을 이어붙인 옷과 배, 벙어리 장갑, 작살, 부레로 만든 부표,
개썰매, 그리고 바다표범 사냥술 등에도 놀랐다.
1721년 그린란드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덴마크 인들은 이누이트의 테크놀로지를 신속히 받아들였고,
우미악을 이용해 그린란드 해안을 탐사했다. 물론 이누이트와의 교역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덕분에 노르웨이인들이 수세기를 이누이트와 함께 지내면서도 배우지 못한
작살과 반달바다표범에 대해 많은 것을 덴마크 인들은 수년 만에 터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덴마크 식민지 개척자들 중 일부는 인종을 차별하는 기독교인들이어서,
옛 노르웨이인들처험 이교도의 이누이트를 경멸했다.
노르웨이인과 이누이트의 관계가 어떤 형태였을지 아무런 편견 없이 추측해보면
훗날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러시아,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 등
유럽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원주민들과 맞부딪쳤을 때 있었던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이 중간 상인이 되어 통합 경제를 확립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즉 그들은 식민지에 정착해 살면서 원주민들이 탐내는 유럽물건을 주고,
유럽인들이 탐내는 원주민의 물건을 대신 받았다. 실제로 이누이트는 금속을 탐내서,
북그린란드에 떨어진 케이프요크 운석(Cape York Meteor)에 함유된 철로
냉연철제(冷延鐵製) 연장을 만들려고 무진 애썼다.
따라서 노르웨이 인들이 해마의 엄니, 일각고래의 엄니, 바다표범가죽, 북극곰을 이누이트족에게서 얻고
그것들을 유럽에 보내 이누이트가 좋아하는 철을 가져오는 무역이 발달할 수 있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노르웨이인들은 이누이트에게 옷감과 유제품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이누이트족이 유당(乳糖)을 분해하지 못해 젖을 그대로 마실 수는 없었지만
치즈와 버터처럼 유당을 제거한 유제품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치즈와 버터는 요즘 덴카크가 그린란드에 수출하는 주요 상품이지 않은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이누이트도 그린란드에서 자주 굶주림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누이트도 노르웨이인들에게 유제품을 제공받았다면
그런 위험을 덜고 동시에 식단도 다양화시킬수 있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와 이누이트의 이런 거래는 그린란드에서 1721년 이후에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왜 중세 시대에는 이런 거래가 발달하지 못했을까?
하나의 가능성은 문화적 장벽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 결혼하지 않았고 상대의 것을 배우려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노르웨이 남자에게 이누이트 여자는 노르웨이 여자만큼 쓸모 있지 않았다.
노르웨이 남자가 여자에게 원한 것은 옷감을 짜고 양털을 잣는 능력,
그리고 가축을 돌보고 젖을 짜며 '스키르'와 버터, 치즈를 만드는 능력이었다.
노르웨이 여자들은 이런 재주를 어린 시절부터 배웠지만 이누이트 여자들을 그렇지 못했다.
노르웨이 사냥꾼은 이누이트 사냥꾼과 친구가 되어도 그 친구의 카약을 빌려서 사용법을 익힐 수 없엇다.
카약은 사용자의 몸에 맞춰 정교하게 재단되어 배에 이어붙인 옷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누이트 사냥꾼의 아내가 어린시절부터 배운 가죽 재봉술을 발휘해서
남편의 체구에 맞게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노르웨이 사냥꾼은 이누이트의 카약을 보았더라도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내게도 그런 것을 만들어 주구려!"라고 말할 수 없엇다.
설령 노르웨이 사냥꾼이 이누이트 여자를 홀려서 자기 몸에 맞는 카약을 만들게 하거나,
그 여자의 딸과 결혼하려면 먼저 우호적인 관계부터 맺어야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노르웨이인들은 처음부터 이누이트족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빈랜드의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린란드의 이누이트를 '비열한 사람'아라 불렀고,
두 곳 모두에서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 피를 보는 충돌을 일으켰다.
게다가 기독교인이었던 노르웨이인들에게는 중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이교도들을 경멸하는 편견이 있었다.
노르웨인인들이 노르드르세타의 주인은 자신들이고, 이누이트를 침립자라 생각한 것도
그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노르웨이인이 이누이트보다 수세기를 앞서 노르드르세타에 들어가서 사냥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린란드의 북서 지역에서 내려온 이누이트족이 처음 모습을 그곳에 드러냈을 때
노르웨이인들이 소중한 사냥감으로 생각했던 해마의 엄니를 이누이트족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노르웨이인이 이누이트족을 처음 반났을 때,
이누이트족이 가장 탐낼 만한 물건이었던 철이 노르웨이인들에게도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아마존 유역과 뉴기니처럼 오지에 사는 몇몇 부족을 제외할 때
유럽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원주민'들과 접촉해보았다.
지금은 그들과 접촉하기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었다면 노르드르세타에서 이누이트족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떦게 했겠는가?
"안녕하쇼!"라고 소리치면서 미소 띤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해마의 엄니를 가리키면서 철덩어리를 쑥 내밀었겠는가?
나는 뉴기니에서 생물학적 현장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그런 '첫 접축의 상황(first-contact situation)'을 무수히 겪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마다 나는 그들이 위험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원주민들도 유럽인을 침입자로 생각한다.
침입자가 자신들의 건강과 삶, 땅에 위협을 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가 상대의 의중을 모르기 때문에 경계하며 긴자응ㄹ 늦추지 않는다.
양쪽 모두가 달아나야할지 선제공격을 가해야할지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서로 상대의 본심을 알아내려고 상대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관찰한다.
첫 접촉의 상황이 우호적 관계로 바뀌기 위해서는 첫 접촉의 상황을 무사히 넘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신중한 처신과 인내가 필요하다.
훗날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런 상황들을 슬기롭게 넘기는 경험을 축적해갔지만
그린란드에서 노르웨이인들은 선제공격을 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에 그린란드에 들어간 덴마크인이나, 다른 곳에서 원주민을 만난 유럽인들도
노르웨이인과 똑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즉 '미개한 이교도'라는 편견,
그들을 죽일 것이냐 그들과 교역할 것이냐, 그들을 약탈하고 땅을 빼앗을 것이냐
그들과 결혼할 것이냐, 그들에게 달아나거나 공격하지 말라고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등의 문제였다.
훗날의 유럽인들은 선택의 범위를 넓혀서 상황에 따라 , 즉 유럽인의 수가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유럽 남자가 유럽 여자만을 아내로 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유럽인들이 탐낼 만한 물건이 있느냐에 없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원주민의 땅이 정착하기에 적합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최선의 방향을 선택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러나 증세 노르웨이인은 이런 선택의 여지를 개발하지 못했다.
결국 이누이트에게 배우기를 거부함으로써,
게다가 그들보다 군사적 이점을 갖지 뫃했기 때문에
그린란드에서 결국 사라진 쪽은 노르웨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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