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에 대하여
(무후와 지선선사의 관조)
『측천무후가 당대 ‘10대 고승’을 황궁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물었다.
“스님들은 무슨 욕망이 있습니까?”
금욕생활을 하는 스님들에게 묻는 질문이 괴이하다. 혼자 사는 여황제가 출가한 남자스님에게 밤에 여자 생각이 안 나느냐고 물은 것이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선사들이 다들 똑 같이 답을 했다.
“욕망이 없습니다.”
금욕주의를 계율로 삼았으니 욕망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뻔한 답이다.
측천무후가 아무 말 없는 그 한사람에게 물었다.
“스님도 욕망이 없습니까?”
그가 답했다.
“욕망이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무후가 다시 물었다.
“어찌해서 욕망이 있습니까?”
그가 답했다.
“일으키면 욕망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욕망이 없습니다.(生則有欲 不生則無欲)”.
무후가 크게 깨닫고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목면가사와 칙명으로 번역한 『화엄경』한 부를 선사에게 선물로 내렸다. 그분이 지선선사다.
지선선사는 자기 심상에 비친 참을 보는 눈이 열린 분이고, 다른 선사들은 아직 마음에 때가 끼어 있어 자기 마음에 비친 참이 보이질 않으니, 마치 득도하여 욕망이 존재하지 않은 양 자신도 모르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무후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인데, 수필의 관조 또한 이와 같다할 것이다. 』
대구 문협 카페에 이 글을 올렸더니 어떤 문사께서 아래와 같은 댓글을 주셨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금강경에 있는 글에 대하는 야부선사의 유명한 선시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何事西風動林野 (하사서풍동임야) 一聲寒雁淚長天(일성한안누장천)
이 선시를 처음 접한 나는 내 식으로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사람의 정감을 담는 언어로는 한자가 아주 뛰어나다는 생각이다. 서풍이 부는 것과 풀이 흔들리는 것과 기러기 잠들었다 날아가는 것이 실제는 서로 무슨 마음이 있어서 그리했겠는가. 풀숲에 잠자던 기러기 날아 간 것은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니, 누가 저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저바람에 놀라서 날아 간 것뿐인데, 그 기러기 눈에 눈물까지 보인다 함은, 내 마음이 마땅히 둘 곳이 없어, 쓸쓸하고 허전하여 그리 보이는 것이다. 무릇 사물은 자기가 존재한 곳에 따라서 저절로 그런저런 인과관계로 엮여버리니, 사람 사는 이치 또한 그런 게 아닌가 여겨진다. 산당에만 적요함이 있는 게 아니라, 소음 속에서도 적요의 경지가 있을 것이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을 선가의 의미대로 받아드린다면
바람이 부는 탓에 수풀이 흔들리고, 그 탓에 기러기 날고, 겨울기러기인 탓에, 미물의 눈에 까지 눈물이 나는 이 "탓" (니탓이니 내 탓이니 하는,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우울하고 쓸쓸해지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보면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데 나 홀로 괜히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자리=자기 상상력=괜한 생심)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서는 그게 불가능하니, 내 적적하고 외로운 심사를 西風과 冬雁에 빗대어 이렇게 시로 읊은 게 아닐까?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란 이 문장을 내 방식으로 해석을 하면
"마땅히 내 마음 잡아 둘 곳이 없어 그런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다.”
얼마 후 나는 이태준이 쓴 수필 고독(孤獨)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선시를 쓴 야보선사나, 나나, 이태준이나 3인이 똑 같이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문장은 글 쓰는 이의 참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절대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독자들과 함께 지독한 외로움이 뭔지를 공감해 보고자 이태준의 수필 고독 전문을 아래에 옮긴다.
기실 위 측천무후의 질문도 그 본마음(참 마음)은, 스님을 상대로 욕(欲)을 물은 게 아니고, 혼자서 삭혀내야 하는 그 지독한 고독을 어찌 이겨 내느냐 하고 물은 것이다. 묻는 무후도 자기 묻는 마음의 참 자리를 몰랐을 것이다. 지선선사가 무후가 묻고자 하는 질문의 뜻을 꿰뚫어 보고, 자기 참마음을 보여 줌으로서, 무후도 비로소 자기 참 마음을 알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문학은 참 마음의 표현이라는 말을 하니, 독자들 중에는 참마음. 깨우침. 자아성찰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무슨 큰 득도를 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하는 양, 오해를 하는 분들이 계시는 듯하여 이 글을 쓴다. 참마음, 깨우침, 자아성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의 제목을 "관조에 대하여" 라고 내가 붙인 이유도, 수필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관조하라"고 하니, 무엇을 관조하라는 말인지도 모르고 관조한다고 함으로, 자기 마음을 관조하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별첨> 수필 "고독(孤獨)"에 대한 필자의 해석
고독(孤獨)/이태준
댕그렁! 가끔 처마 끝에서 풍경이 울린다.
(작가가 지금 도회가 아닌 야보선사처럼 한적한 산촌 어디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주위가 조용하니 댕그렁! 소리도 종소리처럼 크게 들린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댕그렁”이란 의성어를 앞에다 쓰고 있다.)
가까우면서도 먼 소리는 풍경 소리다. 소리는 그것만 아니다. 산에서 마당에서 방에서 벌레 소리들이 비처럼 온다. 벌레 소리! 우는 소릴까! 우는 것으로 너무 맑은 소리! 쏴- 바람도 지난다. 풍경이 또 울린다.
(삶이 번잡할 때는 풍경이 울려도 들리지 않았는데 조용한 곳으로 오니 풍경소리가 들리고 귀가 열려 온갖 풀벌레 소리와 바람소리까지 귀에 들린다는 것이다. 적적요요 함에 숨어 있는 수많은 소리들을 듣고 그게 본 자연이란 걸 표현 한 것이다. 그리고 벌레가 “우는 소리”로 들리는 게 아니라 “맑은 소리로 들린다”는 표현은 작가의 마음까지 맑아져서 인간마음작용의 본바탕까지 보인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등을 바라본다. 눈이 아프다. 이런 밤엔 돋우고 낮추고 할 수 있어 귀여운 동물처럼 애무할 수 있는 남폿불이었으면.
(의식이 전깃불처럼 밝아져 깨어서 잠들지 못하는 이 마음을 남폿불처럼 조절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다. 불면의 밤을 지새워 본 사람은 이해 할 것이다. 이 문장은 홀로 성찰된 자신의 정신세계가 너무 밝아서 잠 못들어 함을 말한다. 왜 작가가 애무란 표현을 사용 했을까?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을 나눌 대상이 없다는 마음 표현이다. )
지금 내 옆에는 세 사람이 잔다. 안해와 두 아기다. 그들이 있거니 하고 돌아보니 그들의 숨소리가 인다.
(선사처럼 홀로 살지 않고 아내와 아기 둘을 키우는 작가이지만 잠들지 못하는 것은 선사와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왜 잠들지 못하는가 하면 영혼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잠든 사람은 안해와 아이들만이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가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안해의 숨소리, 제일 크다. 아기들의 숨소리, 하나는 들리지도 않는다. 이들의 숨소리는 모두 다르다. 지금 섬돌 위에 놓여 있을 이들의 세 신발이 모두 다른 것과 같이 이들의 숨소리는 모두 한 가지가 아니다. 모두 다른 이 숨소리들을 모두 다를 이들의 발소리들과 같이 지금 모두 저대로 다른 세계를 걸음 걷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꿈도 모두 그럴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는가?
(영적인 레벨수준. 곧 깨어있고 잠들어 있음의 수준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제 각기 다르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그걸 나무랄 일도 아니고 그건 그 자체로서 평화롭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삼라만상의 모습이 또한 그렇다는 의미까지 포함하여)
자는 안해를 깨워볼까, 자는 아기들을 깨워볼까, 이들을 깨우기만 하면 이 외로움은 물러 갈 것인가? 인생의 외로움은 안해가 없는 데, 아기가 없는 데 그치는 것일까. 안해와 아기가 옆에 있되 멀리 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외로움이요, 오래 그리던 친구를 만났으되 그 친구가 도리어 귀찮음도 인생의 외로움일 것이다.
( 이 문장이 압권인데 홀로 영혼이 깨어난 자의 지독한 외로움을 이리 표현 하고 있음이다. 독자들도 곁에 아내와 가족이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이 한 두 번 정도는 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흉금을 터놓는 친구라 할지라도 해소시켜 줄 수가 없는 근원적이고도 본질적인 문제이며, 영혼이 크게 열린 자만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
山堂靜夜坐無言 (산 집서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자니)
寂寂寥寥本自然 (적막하고 쓸쓸함은 본디 그러하더라.)
(이 선시를 쓴 야보선사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았으리라는 말이며 모든 깨어난 자의 외로움이 그러 할 것이라는 말이다)
얼마나 쓸쓸한가!
무섭긴들 한가!
무섭더라도 우리는 결국 이 요요적적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홀로 깨어 있음이 고독이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근원인 쓸쓸함과 무서움도 없는 적요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살아 있음을 찬양하고 기뻐하라는 말을 이리 하는 것이다. 인생은 고독하지 않을 수 없는 당위적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고독을 이겨 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가족들이 다 잠든 밤에 홀로 잠들지 못하고 글을 쓰고 있는 이태준의 저 처절한 고독을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보선사가 잠들지 못하고 선시를 쓴 것이나, 나 또한 이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퇴고 하고 있음도 외로운 탓일 것입니다, 그걸 짐짓 야보선사는 서풍 탓이라고 해 보는 것입니다. 위 고사의 지선선사가 말한 生則有欲 不生則無欲이란 말이나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말이나 같은 말이라는 생각입니다. 누가 시(詩)란 말씀언(言)과 절사(寺)가 결합된 것으로 절 사람이 사용하는 고도의 함축된 언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4. 9.11 가을에)
첫댓글 시란 말씀언과 절사가 결합된 절 사람이 사용하는 고도의 함죽된 언어......과연 그런가 봅니다
시란 언어에 이렇게 깊은 뜻이 .....
젊은 시절 뜻도 모른체 군중속의 고독 이란 말을 함부로 지껄이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야릇하게 생각의 고리를 던지는듯 한 ......
안병욱선생님의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갑자기 떠오릅니다
고독이란 단어, 인간 생각 철학
지구상에 고독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이니까
입니다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고독은 홀로 있음을 극복하고 즐기는 경지에 이른 것이고, 외로움은 홀로 있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음에 병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적요는 만물의 본연입니다. 이태준은 세상 사람들이 외로움에 떨지 않기를 기원하며 고독이라는 수필을 쓴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하느님도 때로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노래하여 만인이 외로움에서 이겨 내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게 감상하실까요?
수선화에게/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수필가협회 부회장이신 수선화님은 제가 쓰는 깨우침이란 단어를 엄청 듣기 싫어하시는데 깨우침이 없이 이런 시와 이런 수필이 나올 수가 없지요.
읽고 또 읽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생각하면서
선지자란 먼저 더많이 깨우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지 못함은 깨우침도 할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포용 따뜻함 이러한 느낌을 알지 못한다면 외로움을 느낄수 있을까요
홀로 살수없는 세상에 적응된 인간 본연의 두려움이 외로움인가요
외로움 이라는 말 자체가 연민을 느끼게 하는 말인듯 합니다
항상 좋은글 올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등단 18년 차에 비로소 제가 전하려는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하신 분을 만나 오리려 제가 고맙습니다.
인생 3막에서 문학으로 몰려 오는 분들이 넘치는 환경입니다. 삶의 긴 시간에서 마음이 가난해 지는 나이가 된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 난 환경 탓입니다. 이들의 영혼을 잘 인도해 줄 선지식(=선지자, 선생)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드뭅니다. (성경 표현을 빌리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 드니, 추수할 것은 많지만 진짜 일꾼은 없습니다. 갈급한 내 심령을 이용하여 추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경우도 왕왕 보입니다. 깊이 사유하고 "내가 왜 문학을 좋아 하는 가"를 스스로 고민하여, 마음 갈무리를 잘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결심을 해야 진짜 문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잘난 자랑하고 싶어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세상을 울릴 감동이 나오 질 않는 것입니다. 북은 자기 가슴을 쳐서 세상을 감동 시킵니다. 오늘은 참 기쁜 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