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이 기억하는 발
정영주
집은 늘 가혹하다
집을 나가 본 발이 입을 연다
신발이 기억하는 발은 이마 다 해지고
구멍 난 손이 깁는 바늘은 여전히
순례를 끝내지 못했다
순례를 사람의 유전으로 돌리는 시간은 없다
이마의 주름이나 패인 돌이나 오래된 벽화는 유목의 흔적일 뿐
발견되기 전 바람의 행보일 뿐
오백 년 전 누옥의 툇마루를 뜯어
아홉 번 옻 칠한 방에 들이고서야 노숙을 멈춘다
발이 없어졌다는 걸 너무 빨리 알거나
손가락이 미처 기억해내지 못한 바늘의 길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 미안하다
집이 제 이력의 지문을 갖고 노숙을 끌어들이는 일
잃어버린 바늘을 손바닥으로 훑으며 피가 나기를 기다린다
너무 조심할 나이가 지났다는 전언을 듣는 일이 두렵다
노숙이 순례라고 닳아진 신발이 주절거리는 소리가
방에 불을 지핀다
아궁이 없이 산 시간이 달궈진다
모처럼 뚜껑이 열린 방을 깁는 밤이다
산발한 눈들이 지붕을 핥는다
정영주
강원도 춘천 출생.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버지의 도시』, 『말향고래』등.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