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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초기 경전에 이런 이야기들이 윤리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쾌락을 구하는 것
감각기관을 절제하지 않는 것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는 것
게으르고 열성이 없는 것
그런 사람은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
악마가 쉽게 그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을 특정한 삶의 시기에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사로 잡혀서
그것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 특정한 대상이란 사람마다 다 달라요.
특정한 대상을 어느 때는 좋아하고 어느 때는 그 대상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항상 똑 같은 대상이 언제나 쾌락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내 마음에서 이것을 좋아하기로 작정하는 순간
여기에 집착하기로 작정하는 순간
그것이 내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이란 거죠.
대상, 내 바깥에 있는 외부 대상을 실체라고 생각해서
좋을 때 과도하게 좋아해서 내 걸로 가지려고 애쓰거나
싫을 때 과도하게 밀쳐내려 하면서 내 것으로 오지 않도록 밀쳐내는 두 가지 극단
이것이야말로 거기 속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거기 따라가게 만들어서
내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도록 휘둘리게 만드는 것이죠.
눈귀코혀몸뜻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과도하게 휩쓸려 가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욕을 하든 칭찬을 듣든 과도하게 휩쓸려 가지 않고
맛에 향기에 감촉에 어떤 특정한 생각에 내가 좋아하는 생각 싫어하는 생각
과도하게 휩쓸려서 따라가지 않는 것
그래서 감각기관 눈귀코혀몸뜻이란 감각기관을 그대로 지켜 봄으로써
거기에 휘둘려 가지 않는 것이 수행자란 것이죠.
그것을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는 일들
게으르게 살면서
불교에서는 무아이고 텅 비었다고 하니까 그냥 삶의 아무 의미가 없구나
모든 게 실체가 아니구나
열심히 돈 벌 필요도 없지 않을까
열심히 살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게으른 것을 아주 경계하는 종교이죠.
열성이 없는 사람을 얘기하잖아요.
열정과 기쁨과 즐거움으로써
내게 주어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내가 삶에서 꽃 피우고 싶은 내 마음이 가는 모든 것을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행하라는 종교입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은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이지
집착하지 않아야 하니까 마음을 내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란 것이죠.
집착은 하지 않되 매 순간 열정과 근면함으로 열심히 그 일을 하라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 매 순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
나를 즐겁게 하는 일들
가슴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이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처님께 맡긴다.
결과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모든 게 진리의 뜻이고 부처님의 뜻이니 모든 것을 내 맡기겠다.
이게 불자로써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구요.
가장 지혜롭게 사는 걸림이 없어집니다.
이런 방식을 채택해서 살게 되면.
나에게 주어진 삶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서 하겠다
그러나 결과는 부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지금 괴로운 일이 잠깐 생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는 것이죠.
그것이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르겠다
지금 힘든 것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지금이라는 현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고요.
지금이라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이라는 것은 그대로 제법실상이기 때문에 온 겁니다.
참된 진실이기 때문에 내 인생에 등장한 것이죠.
즉 그것은 부처님의 뜻이라는 거죠.
그걸 통해 성장하고 그걸 통해 배우고 깨달으라는
그걸 통해 귀의 참된 진실에 가까이 가라는 이런 메시지를 품고
현실은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삶을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입니다.
나는 독자적으로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족이라는 말처럼
독자적으로 나만이 경험하고 나만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내 인생의 스토리
놀라운 진리의 스토리 삶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하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다.
진리와 내가 둘이 아닌 진리의 차원에서 내 인생에 등장시켜 준 겁니다.
그것을 거부하게 되었을 때 또는 더 많이 달라고 욕심을 부렸을 때
그것은 진리를 어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진리와 어긋나는 삶을 삽니다.
불교에서 여법하다는 것이
여법 법과 같다는 겁니다.
법답게 산다.
어떻게 법답게 사는 것이냐
지금 여기야 말로 유일한 진리의 원천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오직 지금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원천인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모든 삶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는 겁니다.
좋다고 과도하게 붙잡지 않고 싫다고 과도하게 밀어내지만 않으면
있는 그대로 허용하게 되고 수용하게 되죠.
그렇게 있는 그대로 허용하게 되었을 때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느냐?
고가 소멸되게 되는 방향으로 갑니다.
있는 그대로 허용하게 되면 내 머리로 해석하지 않거든요.
세상에 대해서
머리를 가지고 이건 좋으니까 더 잡아야지
이건 싫은 거니까 내 인생에 도움 안되니까 밀쳐내야지
이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건 내 머리 속의 해석일 뿐이에요.
사실 지금 나에게 온 것이 내 인생에 정말 필요했기 때문에 왔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싫다고 생각했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지금 어땠을까?
그때 그 괴로움이 있었던걸 정말 다행이라는 걸 이제 깨닫겠구나 하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사실은
진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여기’라는 우리의 매 순간은
지금 여기라는 지금 이순간은 완전한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진리답게 살려면 법답게 살려면 부처님답게 살려면 아주 심플하고 아주 간단합니다.
블법의 수행이라는 것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허용해 준다.
거기에 내가 생각을 굴려서 의식을 알음알이로 굴려서 좋다고 집착하거나 싫다고 밀쳐내는 대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것이 진리구나’ 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 뜨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대로를 허용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그렇게 됐을 때 어떻게 바뀌냐 하면요.
OK, 온전히 받아 들여야 하겠다.
온전히 부처님께 맡겨야 되겠다.
어차피 부처님께서 하는 일이라면 다 맡기겠다
부처님께서 하는 일이라는 얘기를 왜 하냐 하면요
이것도 하나의 방편인데
내가 한다 이거 가장 큰 착각이거든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무아거든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삶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주법계가 하나가 되어서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물 한 모금도 먹을 수 없구요
공기, 숨을 쉴 수 없구요
햇볕의 따스함을 느낄 수도 없구요.
밥 한끼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온 우주가 연결 되어서 연기법적으로
이 우주가 동시에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는 겁니다.
내가 잘 나서 사는 게 아닙니다.
지금 법당으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죽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잖습니까?
이게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일까요?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히 주어진 삶의 몫인거구요.
근원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하는 일입니다.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존재에요.
내맡겨라 이러면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데 모든 걸 맡기면 너무 자유의지를 스스로 쓰지 않는 거 아닙니까?
내 개인의 자유의지는 내려 놓고요.
내 개인의 자유의지는 사실 없습니다.
내 개인의 자유의지는 의식의 발동일 뿐입니다.
내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닌 참나의 자유의지 진짜 나의 자유의지를 쓰라는 겁니다.
진짜 참나의 자유의지는 바로 이 우주법계 전체가 바로 진짜 참나고
부처님의 성품이 참나의 의지입니다.
즉 이 말은 뭐냐 하면요.
큰 스님들이 뭐라 하시냐 하면
불법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아주 간단한 여정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여정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머리를 굴리면서 살면서 내 머리가 해석한 게 맞다고 생각하잖아요.
머리가 해석한대로 이렇게 돼야 하고 저렇게 돼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렇게 살아야 해 하잖아요.
머리를 따르지 말고 가슴을 따라 가라는 얘기는 뭐냐 하면
진정한 참나, 진정한 주인공, 불성, 본래면목, 우주의 근원이 거기에 동의하게 되면
내 가슴이 거기에 응하게 됩니다.
내 가슴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머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내 가슴이 거기에 따르고 있어요.
이것이 정의롭다 라고 내 가슴이 거기에 따르고 있어요.
그런데 머리로는 그렇게 하면 손해 볼 수 있어
가슴이 이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면 가슴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근원의 작용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어떤 에고 아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아상의 존재는 머리만 쓰고 삽니다.
분별심이라고 한다 했습니다.
머리를 쓰고 사는 게 아상의 존재에요.
그래서 생각을 진짜라고 생각해요.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착각을 한 겁니다.
생각하는 게 내가 아닙니다.
생각은 그저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하루에 오만개 육만개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의도해서 일으킨 생각이 그 중에 몇 가지가 될까요?
그냥 일어나는 겁니다.
인연이 맞으면 그냥 일어나는 거에요.
나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었나 하고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거에요.
거사님들이 연예인 보고 웃고 있을 때 보살님들이 옆에서 막 찌르며 당신 지금 뭐하냐
‘당신 지금 뭐하고 있냐? 그렇게 좋냐?’ 이런다잖아요.
그냥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겁니다.
좋은 거 보면 그냥 웃는 겁니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거지 내가 뭐 그래서 일어나는 게 아니란 거죠.
마음 속에서 나쁜 마음이 일어날지라도.
뭔가 과한 욕심이나 이런 것들이 왔을 때는 인연 따라 저절로 일어나요.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도 부모님 재산 받는 거 욕심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몇천만원 이 정도면 별로 욕심이 없는데
일억도 안 되는 땅을 가지고 있던 땅이 백몇십억이 되니
갑자기 찾아오지도 않던 아들 며느리 손자 다 찾아와 가지고
서로 ‘이 돈 내꺼다’ 해서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고
과도한 욕심이 있을 때는 저절로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과도하게 손가락질하고 욕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내 스스로 그런 상황에 대해서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욕심이란 것이 어떻게 인연 따라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다음 게송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울지라도
그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 게으른 이는
남의 소만 세는 목동과 같아서
깨달음의 대열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많이 배우고 하더라도
행동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게으른 이는
남의 소만 세는 남의 돈만 세는
이런 것과 같아서 깨달음의 대열에 들어갈 수가 없다
자기보다 훌륭하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든
굳건히 혼자서 길을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벗하리 말라
다음 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행동이 바르고 지혜로운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왕처럼
숲에 사는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
감각기관을 잘 절제하고 만족할 줄 알며
계율을 잘 지키고
청정한 삶을 사는 지혜롭고 열성적인 친구와 가까이 하는 것은
지혜로운 수행자가 처음으로 할 첫 일이다.
행동이 바르고 지혜로운 친구를 만났거든
모든 장애를 극복하리니 기쁘게 그와 함께 가라.
또한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깨달음의 반 이상을 성취한 것과 같은 거 같습니다.’
‘아난아 그렇지 않다. 좋은 벗과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깨달음의 전부를 성취한 것과 같다.’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우리가 삶을 바르게 사느냐 바르지 못하게 사느냐?
혹은 불교공부를 바르게 하느냐 바르지 못하게 하느냐?
깨달음의 길을 바로 가느냐 바로 가지 못하고 있느냐?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할 때는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바르게 가는 것이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바르게 가지 못하는 거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은 다 못났어도 내가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스님들이 어떻게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면 깨닫겠지 했어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시구요.
내 주변의 승가가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독살이 중이라고 해서 안 좋게 생각해요.
혼자 사는 스님들을 아주 안 좋게 생각해요
아주 안 좋게 생각한다고 하면 혼자 주지하시는 스님들을 나쁘게 보라는 게 아니라
그 분들은 안 좋지만 어쩔 수 없이 희생을 포교를 하시는 분들입니다.
안 좋지만 어쩔 수 업이 포교를 하시는 분들인데
처음 출가를 하면 대중생활을 시키지 않습니까?
승가대학을 다니던가 강원을 다니던가 선방을 다니던가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승가를 중요시 여깁니다.
승가 집단이에요.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라고 해서 스님들과 신도들의 집단.
불교에서 오욕죄라 해서 최악의 잘못이 다섯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가의 화합을 깨는 겁니다.
불교에서 승가를 중요시 아주 중요하게 여겨요.
선방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승가가 화합을 하면 소도 잡을 수 있다.
승가가 화합을 하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옳다 그르다는 것은 실체적인 것이 없거든요.
승가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승가의 집단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어야 할 것은 좋은 벗들의 모임입니다.
좋은 벗들의 모임과 내가 함께 하고 있느냐 내가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느냐?
좋은 벗과 좋은 스승과 좋은 가르침을 내가 자주 접하느냐 접하지 못하느냐?
이것이 세속의 삶에서든 출세간의 삶에서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보살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절에 와서 스님 법문을 듣고 절에 있는 보살님들을 만나면 내가 정화가 되는 것 같은데
내가 절에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무슨 얘기 말씀이세요 그러니
아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갈 때까지 십년 가까이를 주변의 아들 친구 엄마들을 만나게 되면
모든 엄마들이 어느 학교를 가는 게 좋고 어느 학원을 보내면 좋고 어느 학원 누가 잘해서 이 선생님을 만나야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를 가고 여기 가지 못하면 안되고 이러면서 ‘공부, 공부, 공부’ 어떻게든 이 아이를 공부를 잘 시키고 이런 얘기 그리고 어디 아파트를 가야 좋고 어느 아파트가 뛰었고 자신도 당연히 그대로 안 하면 안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단 거죠.
난 돈에 대한 욕심 없다
자식 적절히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하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안 하면 낙오될 거 같고 항상 쫓기는 마음으로 살았다
절에 와서 스님과 도반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내가 맞았구나
내가 그 사람들하고 너무 오랫동안 사귀다 보니까 그러지 않음 안될 거 같은 거에 휩쓸렸었구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인연 따라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거기 과도하게 사로잡혀서 거기 일희일비하면서 살 필요는 없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서는 많이 할 기회가 없다는 거죠.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가 가장 중요한 점은 바른 법을 자주 듣고 바른 도반을 자주 만나는 겁니다.
그것이 공부를 저절로 시켜 주는 거에요.
불법은 아주 중요한 것이 바른 승가 바른 도반 바른 법들의 모임을 만나면
그 도반들이 저절로 공부를 시켜 줍니다.
제가 이십년전부터 군법당에 오자마자 일요일날 전방에 갔더니
교회 성당 책은 많은데 불교책은 하나도 없더라구요.
사주는 것도 내무반이 너무 많아서 제한이 있어
그때부터 주보를 매주 만들면서 거기 글을 하나씩 쓰기 시작했었어요.
주보에 매주 글을 쓰다 보니까 그게 이삼년 모이니까 글이 많더라구요.
인터넷에 우연히 글들 쓴 게 있으니까 올리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보던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목탁소리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고
절에 한번 가고 싶다 해서 ‘한번 오셔라’ 해서 목탁소리라는 모임이 오랫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가끔 법회 와서 법문 듣고 저한테 질문을 하시거나
군법당에서도 마찬가진데 계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법당 신앙활동을 많이 하신 분일수록
저희를 경책을 해 줍니다.
우리 스님들이 모이면 맨날 하는 얘기가
법당에 10년 20년 다니시던 분들이 앞에 딱 앉아 계시면 긴장돼서
그 다음주 법회 준비를 대충 할 수가 없다.
수많은 스님들한테 십년을 법문을 들으신 거 아니에요
어지간한 법문은 들어 보지 않은 게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할 수가 없게 만드는 거죠
그분들 질문을 들어보면 상당히 수준 높은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상당히 공부가 많이 되신 분들도 뵈었고
제가 되짚어 보건대 그때 그 분은 정말 공부가 많이 되신 분이구나
당신이 스스로 견성했다는 것을 모르고 이 분은 정말 자기 성품을 보신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되는 분들을 만나봤을 정도로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꽤 많이 계십니다.
학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도 계시고
그런 분들을 뵐 때 마다
마음속에서 점점 더 발심의 발심을 더욱 더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외 법당이고 신도님들이 많은 법당에서는
이게 인연이니까 열심히 포교도 하고
열심히 법문도 해야지 하고 법문도 열심히 하고 아카데미도 열지만
육군단이라던가 강원도 전방 부대 가면은
대중법회 안하고 법회라던가 장병들하고만 하면서 남는 시간에 제 공부를 치중을 하다 보니까
옛날부터 아시던 분들은
어떻게든 대중법회 좀 해달라 해달라 막 요청을 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당분간 안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여러분이 저를 공부를 시키다 보니까
정말 제가 여러분 앞에 떳떳하게 바른 깨달음이 되어서
정말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탁 얻어서
정말 내 마음 안에서 부처님처럼 바른 법을 바로 설 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불퇴전의 지위가 된다면
여러분들이 요청하지 않아도 법회를 열정적으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스스로가 공부가 간절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대중 앞에 서서
설법한다는 게 제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는 부분들도 있었던 거죠.
인연 따라 법회도 하지만
20년 동안 저를 꾸준히 저를 공부하도록 만들어 주신 분들은
정말 법회에 동참하는 불자님들이세요.
제가 군에 오고 매주 법회 할 수 있는 인연이 된 것을 너무나도 감사하고
이렇게 좋은 도반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좋은 법의 모임
이렇게 좋은 승가가 있을 수 있을까
저는 어찌 보면 독살이로 혼자 살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하나의 승가가 되어서 저를 공부시켜 주셔서
저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구요
부처님의 말씀이 정말 맞구나
바르고 지혜로운 도반과 함께 간다면 모든 장애를 극복 할 수 있습니다.
기쁘게 그와 함께 가야 한다.
물론 이 말은 나보다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친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른 법 바른 지혜를 얻으려면 바른 공부를 하는 바른 도반 스승이 법이 있는 곳에서
함께 있기만 해도 훈습이 된다 합니다.
향 내음이 계속 풍겨나면 내 몸에 저절로 향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훈습이 된다는 거죠.
공부는 훈습으로 하는 겁니다.
공부는 내가 해야지 노력하는 게 아니라
내가 꾸준히 법에 동참하고 도반들과 함께 하는 이것만으로
저절로 공부가 되는 측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 법회가 중요한대요.
매주 법회 하고 틈만 나면 법문 하는 곳을 찾아 다니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떼는 법문 하는 스님들이 별로 없었고
그때는 정말 법문을 들을 기회가 없었거든요.
책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대학 다닐 때 법문 하나 들으려고 정말 먼 길을 차비도 없는데 찾아 다니면서 너무 귀하게 법문 듣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인터넷만 탁 키면 법문이 넘쳐나는 시대라서
정말 우리는 복 받은 시대를 살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이 법의 모임, 법회가 있는 곳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법의 모임에 함께하기만 해도 정말 저절로 공부가 되어서
방편으로 그런 방편을 쓰죠.
법회를 많이 참석하게 되면 저절로 지혜로워 지지 않을 수가 없구요.
저절로 공부가 되어서
죽고 나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은
‘공부 했느냐? 안 했느냐?’를 본다는 거죠.
첫째가 업을 얼마나 지었느냐 복을 얼마만큼 지었느냐
둘째가 공부, 지혜를
복과 지혜가 죽고 나서도 다음 생까지 가져 갈 수 있는 거거든요.
이 공부에 대한 발심
발심하고 나서 일상생활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공부할 때는 이 공부의 분위기에 푹 젖어 드는 겁니다.
마음공부의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 좋은 친구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 것이죠.
행동이 바르고 지혜로운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왕처럼
왕이 그 나라를 정복했는데 그 나라에 갔더니 너무 황폐하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나라면 과감히 버린단 거죠 그리고 떠나는 왕처럼.
숲에 사는 코끼리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처럼 좋은 벗이 없으면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낫다라는 거죠.
나쁜 벗과 어울리느니 그런 이야기이죠.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만족할 줄 알며 계율을 잘 지키고 청정한 삶을 사는
지혜로운 열성적인 친구와 가까이 하는 것은 지혜로운 수행자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원광사에 요즘 공부하는 분위기
요즘 보살님들이 모이면 공부 얘기를 많이 하시고 또 공부에 대해서 많이 질문하시고
공부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보살님들 말처럼 법회 할 때마다 구름처럼 많이들 모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첫댓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의 삶이 거부하거나 욕심내거나 두가지 방식으로 진리에 어긋난 삶을 살았다는것을 보게된 날 입니다
무겁게 갈아앉는 마음이지만
잘지켜보겠습니다
좋은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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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공부 꾸준히 하겠다 더욱 다짐합니다_()()()_
문자서비스
_()()()_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