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6. 시리즈를 마치며 (끝)
수행.교육 통한 정체성 확립이 한국불교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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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한국불교 원류를 찾기 위해 취재팀이 답사한 길. 취재팀은 언론사상 최초로 선으로 표시된 모든 곳을 거쳤으며, 인천-뭄바이 심양-인천 구간은 비행기를 이용했다. |
다르마로드, 한국불교 원류의 길
2002년 5월14일(지령 1862호) 시작된 기획시리즈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가 2004년 1월23일(지령 2000호) 126회를 끝으로 마감됐다.
인도 네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 북한 등 8개국을 돌아 경주 남산에서 회향된 ‘한국불교 원류’는 우리나라 언론사상 획기적 연재의 하나로 평가된다. ‘연재 회수’나 ‘원고 매수’면에서 가장 길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한국불교 원류’는 본래 “인도불교가 쇠퇴한 원인은 무엇인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나, 중국불교는 과연 회생가능한가, 한국불교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를 분석.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런 문제의식을 안고, 신라 혜초스님(704~787)과 당나라 현장스님(?~664)을 수호보살(守護菩薩) 겸 인로보살(引路菩薩)로 삼아 출발한 취재팀은 인도대륙.중앙아시아.중국대륙 곳곳을 누비며 그 지역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유물이 산재한 현장에서 찾았다. 그 결과 1917호에 소개한 대로 인도불교는 지나친 학문화, 포교에 대한 열기 저조, 불교의 힌두화 때문에 쇠락한 것으로 분석됐다.
세계불교미술 사상 불멸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아잔타.엘로라 사원과 산치대탑, 부처님 족적이 남겨진 붓다가야.쿠시나가라.사르나트.룸비니(네팔) 등의 유적이 있는 인도대륙지만, 그곳엔 생동하는 불교는 없었다.
“천년동안 비밀의 방에 갇혀있던 아잔타 석굴은 발견됐지만, 천년 전 사라진 인도불교는 다시는 햇빛 속으로 나올 수 없단 말인가”라는 자조적 탄식이 나올 정도로, 불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암베드카 박사가 신불교운동을 전개한 고장인 나그푸르에서 ‘불교 소생’이라는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암베드카 박사의 생애를 읽으며 그나마 위안 삼았다.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암베드카’(1891~1956)박사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다.
‘인도불교 쇠퇴 원인’ 찾아 취재 시작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난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로 개종했다. 1947~1951년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불교로 개종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 뿐임을 자각한 암베드카는 1956년 10월15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종식을 갖고 ‘신불교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 인도에서 불교인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도의 불자들은 부처님과 암베드카 박사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예배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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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 신강성 니야에서 차르클릭으로 가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배경으로 선 조병활기자. |
암베드가 박사와 함께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다르마팔라는 현대 인도불교 탄생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도불교 재탄생을 위해 대보리회(Maha Bodi Society)를 결성했으며, 부처님 4대 성지 유적을 보호하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는 운동도 주도했다.
특히 붓다가야에 있는 대보리사를 힌두교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국 대보리사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바라나시의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새 몸으로 다시 대보리사를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죽을 만큼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인물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였다.
붓다가야 대보리사 대탑 부근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에서 다르마팔라의 흉상을 보았을 때,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나그푸르와 붓다가야에서 불교 소생의 희망을 발견했지만,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북인도 스리나가르, 파키스탄 간다라 지방,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계곡에 도착했을 땐 여전히 암흑이 앞을 가렸다. 스리나가르엔 불교의 ‘불’자도 없었고, 간다라엔 유적은 많았으나 신자는 없었으며, 바미얀계곡엔 부서진 부처님의 잔해만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곳에 불교가 다시금 피어나기를 기원드리고, 남아있는 유적이나마 잘 보존되기를 기도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 역사민족박물관엔 부처님과 보살상들이 다수 보관돼 있었지만 거리엔 불교의 ‘ㅂ’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인이 연 포교당이 보였지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주지하다시피 중앙아시아 불교는 751년 탈라스전투 이후 사라져 갔다. 불교세력을 대표하던 당나라와 이슬람 세력을 대표하던 압바스왕조의 대결이었던 이 전투에서 불교세력이 패퇴함으로써 중앙아시아 불교는 든든한 후원자를 잃고, 정치적으로 세력을 장악한 이슬람에 밀려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나라 무제 시절 천마의 산지였던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대초원을 지나 중국 최서단 도시 카슈카르에 도착해도 불교는 박물관에만 남아있었다. 서역 남.북도를 지나며 7세기 서역의 불교와 풍물을 기록한 〈대당서역기〉를 보았지만, 불교는 역시 사막의 모래 속과 박물관 진열대 안에 유물로만 잔존했다. 신강성을 사실상 부쳐 먹고 사는 위구르족들은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슬람만 신봉하고 있었다.
쿠차.투루판.돈황을 거쳐 하서주랑에 접어들자 분위기는 약간 변했다. 사찰과 석굴엔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개혁과 개방 이후 종교에 관대해진 중국사회에서 불교가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듯 했다. 병령사 석굴로 유명한 난주, 천년고도 서안(옛 장안)과 낙양에선 사찰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엄청 많음을 확인했다.
용문.운강석굴에 참배하고 북경을 거쳐 하르빈에 도착해 중국불교를 되돌아보니, “중국불교는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중국불교 제일성지 오대산은 수행과 신행의 중심지였다. 선당(禪堂)엔 스님들이 수행하고, 대웅전엔 기도하는 신도들이 적지 않았다.
교포들이 밀집한 연변지역, 고구려 고도 집안.환인을 거쳐, 묘향산.평양.구월산을 지나 서울에 도착,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백제 고도 부여.공주, 신라 천년고도 경주지역을 답사하면서도 이 화두는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국 관건은 ‘정체성’인 것 같았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이가 인도 수상 네루다. 네루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저서 〈인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난폭한 수단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리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불교에 의해 힌두교가 밀려나간 사실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힌두교는 여전히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불교는 자연사(自然死)했다.” 이만큼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살(自殺)도 아니고, 타살(他殺)도 아닌 자연사가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이라고 네루는 지적했다.
아무리 큰 건물 지어도 세월에 무너져
병에 걸려 오래 동안 앓다가 자연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노쇠하여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사.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흥했던 인도불교는 결국 정체성을 상실한 채 힌두사회에 용해(溶解)돼 자연사하고 말았다. 자신의 땅에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한 집단이든 한 종교든 한 사람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배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사한 인도불교와 쇠락한 중앙아시아 불교가 한국불교에 던지는 교훈이라고 결론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리 크고 많은 건물을 지어봐야 한 순간의 화재에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인도불교사와 중앙아시아 불교사가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적이 없는 것 보다야 있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유적을 관리할 수행자와 재가자가 없다면, 불교유적이 주는 본래 의미는 반감된다. 거대한 아잔타 석굴이 기도와 수행처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단지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정체성을 확립할 것인가’인데, 교육과 인재양성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출가자는 출가자대로 수행과 교육에 전념하고, 재가자는 재가자대로 자신에 적합한 수행법을 골라 일상에서 수행하고 불교를 공부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결코 한반도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나긴 ‘한국불교 원류’ 취재 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것은 인도불교 쇠퇴 원인, 중앙아시아 불교 쇠락 이유, 중국불교는 소생 가능한가와 함께 ‘어떻게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할 것인가’였는데, ‘정체성 정립’은 따라서 공허하게 제기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체득된 결론이다.
■ 대장정을 마무리하며
유적이 준 감동 아직도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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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바미얀석굴 앞에 선 김형주 기자. |
2002년 봄부터 넉달에 걸쳐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길을 따라 취재했던 기획물 ‘한국불교 원류’가 대장정의 막을 내리게 됐다. 인도 서쪽 끝에서 출발해 아시아 대륙을 횡단하다 마침내 백두산에 다달았을 때 전율은 아직도 생생하다.
눈덮힌 산하나 뜨거운 사막 속에서 만난 불교유적들은 카메라를 든 기자의 손에 떨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국적인 모습으로 나툰 부처님을 보며 참배하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들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현장의 감동들을 사진을 통해 지면에서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 지난 2년여 연재됐던 이 기획을 후원해주고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후 원 :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관광부
중국 국가종교사무국, 백련불교문화재단
조계사, 봉은사, 도선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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