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는 악기로 연주를 하기 전에 반드시 튜닝(tuning)을 해야 한다.
튜닝이란 악기의 음을 표준음에 맞게 조절하는 것이다.
튜닝이 되지 않은 악기는 아무리 고가의 것이어도 소용이 없다.
고가의 악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튜닝이 잘 된 악기이다.
튜닝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연주할 수도 없고,
더구나 다른 사람과의 협연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이광재 목사는 <튜닝 베이직>이라는 책을 통해
영적인 튜닝을 이렇게 정의한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느슨해지고,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변해버린
‘영적인 줄’을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악기와 연주자가 있어도 튜닝되지 않으면
협연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음이 되고 연주할 수가 없다.
사람도 그렇다.
튜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협연을 할 수 없다.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
공동체 협연은 튜닝된 사람들을 요구한다.
튜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이리저리 부딪힌다.
물론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또 다시 튜닝이 이루어지겠지.
그러나 너무 많은 불협화음을 낸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아파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소에 늘 자신의 삶을 튜닝해야 한다.
튜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절대음을 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준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를 갖고 우리가 가야 할 정도를 찾아내야 한다.
영적 튜닝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함이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보여주는 준거틀을 따라
살아가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의 기준과 틀은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 말씀에 익숙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관점에 능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한다.
사람들은 가끔 말한다.
‘코드가 맞아야지. 코드가 맞아야 함께 살지.
도대체 함께 살 수가 없다니까.’
서로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세상에 코드가 딱 맞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마다 코드가 다르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말한다
. ‘나한테 맞춰!’ 서로 맞추라고 하니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인간 코드’가 아니라 ‘신적 코드’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께 코드 맞추기 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 안테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각자가 기준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영적 튜닝을 위해서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음을 잡아내야 한다.
사단도 우리 내면에 잡음을 들려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소리를 분별해 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교회를 정의한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에 맞추어
튜닝하면 될 텐데, 그게 안타깝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데 튜닝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서로가 비난하고 정죄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지 않는다.
서로 짐을 지고 돌아보지 않는다.
가족이라면 서로 이해하고 용납할 텐데.
크고 작은 허물을 덮어주려 할 텐데.
오늘날 교회는 가족에다 튜닝을 하지 않는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여기에 튜닝을 하지 않는다.
목사가 주인이 되려고 한다. 장로가 주인이 되려 한다.
여기서 헤게모니 싸움이 일어난다.
주인이 되려는 바로 그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그러니 서로 주인이 되어 다스리려고 하지.
그러니 교회의 교회다움을 볼 수 없다.
다시 교회를 튜닝해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건축을 할 때 터는 매우 중요하다.
모래 위에 집을 지어보라.
폭풍이 몰려오면 한 순간에 무너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씀의 반석 위에.
복음의 반석 위에
. 바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건물은 터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된다.
건축을 할 때 기둥 역시 아주 중요하다.
기둥은 건물을 지탱해 준다.
기둥이 제대로 지탱해 주지 못하면 건물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든든한 건물은 반드시 기둥을 잘 세워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기둥과 터가 무엇인가?
바울은 진리라고 말한다.
진리의 기둥, 진리의 터가 바로 교회이다.
진리 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위험하다.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하고, 진리에 의해 지탱돼야 한다.
교회가 진리를 저버릴 때, 진리에서 벗어날 때 매우 위험하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이단과 거짓 교훈에 대항해서 진리를 파수해서
교회와 교리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떠난 진리도 있을 수 없다.
최근 다락방에 대한 이단시비가 붙고 있다.
이미 많은 교단으로부터 다락방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최근 어느 단체로부터
‘다락방은 이단이 아니다’는 면죄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부 교단에서 교수들을 중심으로
다락방 이단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여전히 다락방은 이단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다락방이 건강한 교회가 되려고 한다면
‘교회를 떠난 진리’를 주장한 것에 대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락방은 지금까지 기존 정통교회와 목회자들을
비난하면서 인정하지 않았다
.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이다.
교회의 권위를 도전한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복음과 진리가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벗어났다면 그들은 회개해야 한다.
진리를 떠난 교회가 위험하듯, 교회를 떠난 진리도 위험하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에 맞추어 튜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계속해서 혼란을 거듭할 것이다.
영적인 튜닝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라.
자아는 이기적이다.
자기 밖에 모른다.
남을 의식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게 어렵다.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 앞에서 조명해 봐야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가지치기해야 한다.
영적 튜닝을 할 때 더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가려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속도와 방향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미묘한 함수 관계를 풀어내야 한다.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7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