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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인생의 맛, 신앙의 멋 (욥 1:13-22/고후 12:7-10/마 6:25-34)
세상의 모든 음식은 나름대로 제 각각의 고유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관상으로 비슷하게 보여도 맛이 모두 다릅니다. 일전에 와인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포도주 감별사를 소믈리에라 부르는데, 이 사람들은 정확하게 포도주 맛의 차이를 구별해 냅니다. 우리가 느끼는 맛은 그게 그것인 것 같은데, 포도주 감별사는 그 포도주가 가진 고유한 맛을 기억해 두었다가 생산된 지역과 포도주의 종류와 년도까지 구별해 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단 포도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미각은 기억력과 관련되어 있어서 한 번 본 맛을 머리에 기억해 둡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 맛을 보게 되면 지난번에 맛을 볼 때 겪었던 일들이나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그 맛을 기억해 냅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어머니 손맛’의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준 음식을 맛보고 그것을 기억해 놓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거나 같은 음식을 먹게 되면 그 맛을 떠올립니다. 동시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잊지 않는 것은 미각보다는 기억력과 상관이 있습니다.
제가 집에서 가끔 요리하는 닭 복음탕 닭 도리탕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먼저, 닭을 먹기에 좋을 만한 크기로 잘 손질해서 냄비에 넣고, 국간강과 고춧가루 그리고 약간의 고추장을 넣고 닭을 먼저 복습니다. 그리고 감자와 양파와 빨간 무를 덤썽덤썽 썰고, 마늘을 다져넣고 양념이 베이도록 살짝 뽁아 줍니다. 그리고 내용물이 잠길 정도의 물을 붙고 끓여 줍니다. 내용물이 끓을 때 미리 불려놓은 당면을 넣고 다시한번 끓여주면 요리가 완성됩니다. 이 요리의 핵심은 채소와 고기와 면을 다양하게 썩어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얼큰한 맛과 복음의 맛을 동시에 즐기는 풍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져 고유한 맛을 내는 것은 음식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양한 재료들이 조화롭게 섞여져야 그 맛을 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인생의 단맛, 행복만으로 인생이라는 요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문제는 인생의 단맛만 가지고서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인생의 요리를 만들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인생이라는 요리는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환희와 눈물 재료가 조화롭게 섞여져야 제 맛이 납니다.
오늘을 말씀으로 만나는 욥이라는 사람은 인생의 기쁨과 눈물을, 성공과 실패를, 단맛과 쓴맛을 멋지게 요리하여 맛있는 인생의 요리를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저는 갈릴리 모든 가족들이 인생의 눈물과 실패와 쓴맛을 믿음의 양념으로 잘 썩어서 맛있는 인생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욥을 시련 가운데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 인내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상하게 여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욥기 3장을 보면 이 점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절친한 친구들은 욥이 형편없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든 일을 젖혀두고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욥의 형편을 본 친구들은 한 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욥은 친구들이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습니다. 자기의 아픔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만나 일 주일 만에 입을 연 욥이 가장 먼저 했던 말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 버려라(욥 3:3).”라고 했습니다. 욥은 이 말을 그냥 지나가듯이 한 것이 아닙니다. 욥기의 기록에는 욥이 울부짖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절친한 친구들을 만난 뒤 가장 먼저 했던 말이 울부짖으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자신이 직면하고 있던 현실에 대해 얼마나 가슴 아파해 하고, 아픔을 깊이 삼키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욥은 우리에게 인생에는 여러 가지 맛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한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자식이 열 명에다 열 명 모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욥의 재산은 동방에서 가장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건강도 괜찮았고, 신앙도 돈독했으며, 세상 사람들 역시 이런 욥을 존경했습니다. 재난을 당하기 전 욥의 인생은 누구나 꿈꾸는 ‘장미빛 인생’ 내지 ‘성공한 인생’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욥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식도 다 잃어버렸고, 재산도 다 날렸으며 건강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평판 역시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장밋빛 인생’이 졸지에 ‘잿빛 인생’이 되었습니다. 건강이라도 남아 있다면 재기를 꿈꿔보겠지만 건강까지도 잃어버렸으니 재기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불행을 당한 욥이 미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욥기의 주제는 악이 난무한 세상, 의인이 고난 받는 현장 가운데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이것을 신정론이라 하는데, 신정론. 하나님이 다스림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욥기의 저자가 이와 같은 상황을 설정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욥을 통해 우리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만이 아니라 불행도 겪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 욥의 삶은 기쁨이었고, 환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한 뒤 욥의 인생은 쓴 맛이었고 절망이었으며, 눈물의 골짜기를 걷고 있었습니다.
욥이라는 인물의 위대한 점은 인생의 한 면만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욥은 자녀들이 다 죽고 재산을 다 잃어버렸지만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했습니다(욥 1:21). 건강을 잃어버리고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으로 가려운 상처를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하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재기할 가능성이 없는 욥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욥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욥인들 왜 자기가 당한 일이 당혹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욥은 믿음이 돈독했다지만 그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는 말을 방금 했습니다만 이 구절 이외도 욥기를 읽어보면 그가 이해 못할 일로 인해 얼마나 절망하고 당황스러워 했으며 몸부림을 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읽어내야 합니다. 욥의 위대한 점은 그가 삶의 한 면만을 바라보고 않았다는 점입니다. 삶에는 단맛과 쓴맛, 신맛과 짠맛, 매운 맛 등 갖가지 맛이 있음을 욥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한 가지 맛 즉 인생의 단맛, 행복한 면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 자신들의 삶이 뒤틀리고, 쪼그라들고 깨지고 금이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든지 성공하고, 돈도 풍족하고 신앙도 좋으며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불행이 없는 이런 완벽한 삶은 그저 꿈일 뿐입니다. 세상에 부자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산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학교에서 공부 일등 하는 학생은 계속 일등 한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성공한 사람은 계속 성공한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좀 가난해졌다고 죽고, 공부 3등 했다고 자살하고, 한번 실패했다고 좌절합니다. 누구 맘대로 죽고, 누구 맘대로 자살하고 누구 맘대로 좌절합니까?
어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는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말해 보아라.” “예.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마음씨 착하고, 재산 많고 가문이 좋으며, 자식들에게 본이 되고, 건강하고, 음식 잘하며, 남편 잘 섬기며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며 …. 이런 여자에게 장가들고 싶습니다.” “그으래? 그런 여자가 있더냐? 있다면 자네가 여기에서 염라대왕 노릇 해라. 내가 그 여자한테 장가들란다.” “………”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만 이 이야기는 완벽한 삶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이든지 삶에는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의 양면이 있습니다. 비록 크고 작은 것, 기간의 길고 짧음은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삶의 양면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삶에는 양면이 있다는 점을 알았기에 한쪽 눈만 가지고 쉽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일을 놓고 함부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양면성을 인정하고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 바로 이것이 욥의 위대한 점입니다.
저는 커피부터 보이차까지 차를 좋아합니다. 차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차가 지닌 쓴맛과 신맛과 떫은 맛 때문에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쓴맛과 신맛과 떫은 맛의 차를 자기의 침과 썩어서 혀 밑에 넣어두고 가만히 음미하기 시작하면서 단맛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아주 깔끔하고 은은한 단맛이 입안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 차를 마시고 다른 음식을 먹으면 모든 음식이 다 달게 느껴집니다. 맛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맛 때문에 차를 마십니다. 이 차 맛의 원리는 인생의 맛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보고서 쓰다고 내밷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품고 견디어 마침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은은한 단맛을 풍겨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인생의 미학입니다. 되풀이 됩니다만 사람들의 삶에는 갖가지 맛이 있습니다. 좋은 맛도 있고 나쁜 맛도 있습니다. 희망을 주는 달콤한 맛도 있고 절망이주는 매운 맛도 있습니다. 슬픈 맛도 있고 기쁜 맛도 있습니다. 웃는 맛도 있고 우는 맛도 있습니다. 어떤 맛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극단으로 지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삶의 맛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맛이 어울려 전체의 맛을 냅니다.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맛을 내는 식재료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 없는 맛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필요 없어 보이는 맛도 시간이 지나면 꼭 필요한 맛이 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던 맛도 시간이 지나면 필요 없는 맛이 되거나 밋밋한 맛을 풍기기도 합니다. 저와 우리 교우들이 인생의 맛이 쓰다고 뱉지도 말고, 달다고 그것만 붙들지 말고 하나님 주신 인생의 맛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는 줄로 믿고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욥은 사람이 맛보게 되는 삶의 갖가지 맛은 우리의 머리로는 예상할 수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욥이 이런 재난을 당했던 것은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믿음은 하나님마저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로 출중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만약 욥이라는 사람이 믿음이 없었더라면 이런 시험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이 시험을 당한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건 판돈과도 같았습니다. 욥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당했던 시험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할 아무런 죄가 없다는 점을 강력하게 이야기했지만 친구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의 삶에도 이런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때로 우리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러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내가 전혀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너무나 당황해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의 열쇠로는 도저히 열수 없는 육중한 철문이 나를 가로막아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항의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납득이 되지 않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라며 항의를 하게 됩니다. 복을 받는 대상자가 내가 되었을 때에는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내가 불행의 주인공이 될 때에는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이것을 Why meism 이라 합니다. 내 인생이 이해가되지를 않을 때 Why Me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당하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해가 가능한 일도 있지만 어떤 일은 우리 머리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을 이해하려고 하면 억지를 동원하게 되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당하게 되면 억지로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냥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지 않겠다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불평을 하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고통에 아파하더라도 믿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믿음을 두려워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해 두려워하셨습니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순종한 것입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증명이 되고, 머리로 완전히 이해되는 것을 믿는 것은 과학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해되지 않음에도 믿고, 증명이 되지 않음에도 믿습니다. 또 내 생각, 내 경험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것이 욥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셋째 욥은 인생의 여러 가지 맛을 신앙의 멋으로 통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닙니다만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욥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욥 40:7-8)”라고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질문을 받고 욥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지, 자기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고백하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한 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욥 40:4-5). … 알았습니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2-3, 5-6).”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욥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고백을 했다하더라도 죽은 자녀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었고, 잃어버렸던 재산을 다시 회복한 것도 아니었으며, 건강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 나간 마누라가 돌아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욥은 자기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하나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말했던 것을 모두 철회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뒤에 욥은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 지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어릴 때 저희 집에 잡종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요즘 말하는 똥개로 상당히 컸습니다. 하루는 이 개가 기분이 나빴는지 저를 물었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짐승이 사람에게 대들면 사정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개를 말뚝에 매어놓고 개패듯이 개를 때렸습니다. 말 못하는 그 똥개도 내가 다시 주인의 아들을 물다가는 보신탕 감 되는 일만 남아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후로 이 개는 제가 자기에게 어떤 행동을 해도 무는 법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제가 기분이 좋다 싶으면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지만, 기분이 나쁘다 싶으면 마루 깊은 곳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는 비로소 저를 자기의 주인으로 인정했고,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존재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욥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에 욥은 친구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하나님께 항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뒤 욥은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항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백기투항한 뒤에 비로소 평정을 되찾고 이전의 삶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내 형편이 어떻든지, 내 생각이나 지식, 경험이 어떻든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하나님께 대한 굴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신앙이 굴종이 아니라 참담하고 아픈 삶을 통해 이뤄낸 결과물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기까지 갈등하고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뒤에 비로소 욥은 자기의 의를 포기했고, 갈등을 멈췄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로 인한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기기까지의 과정은 신비입니다. 잠을 못 이루고, 밥을 먹지 못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머리로 따져도 이해되지 않던 일들이 하나님의 빛, 믿음의 빛 아래 놓이게 되면 비로소 납득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믿지 못해도 믿게 되고, 이해하지 못해도 믿게 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인생의 쓴맛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로운 출발을 꿈꾸게 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친구들의 말을 반박하고, 심지어 ‘하나님과도 한 판 겨뤄보겠다’며 기염을 토했던 욥에게로 다시 돌아갑니다. 친구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는 욥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나서고 있는 한 욥에게 하나님은 낯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뒤에 비로소 욥은 자신의 뜻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일들까지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고통 없는 완벽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없습니다. 살면서 당하게 되는 고통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통의 무게나 시간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은 오랜 기간 이어지지만 어떤 사람은 잠깐 동안만 고통을 당합니다. 어떤 사람의 고통은 고통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볍지만 어떤 사람의 고통은 삶을 완전히 비틀어버리고 망가뜨릴 정도로 무겁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맛보게 되는 어떤 맛이든지 그 맛은 우리의 삶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쓴 맛과 단맛을 통합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상처받고, 깨지고, 쭈그러지고 곳곳이 깨져 물이 새고 구멍이 나 있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로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눈으로 내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믿음으로 바라 본 것이 실상이 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서도 믿음을 통해 의미를 찾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신발 끈을 졸라맵니다. 이해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인생의 맛이요, 신앙의 멋입니다. 인생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꿀 줄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깊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우리네 인생에 항상 기쁨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내 인생을 잿빛으로 만들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동안 어디에서 어떤 맛을 보게 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맛보게 되는 것이 어떤 맛이든지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맛보게 되는 여러 가지 삶의 맛들은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혀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믿음 안에서 통합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멋입니다. 주어진 인생길에서 인생의 맛과 신앙의 멋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명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