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바라보지 말라
영문학자 C. S. 루이스는 「신학은 시(詩)인가?」(『영광의 무게』)라는 글에서 기독교 신앙을 태양에 비유해 표현한 적이 있다.
저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빛으로 세상 만물을 본다는 말이다. 밀턴 연구자이기도 한 그의 말은 『아레오파기티카』(1644)에서 밀턴이 한 말과 매우 흡사하다. 밀턴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확립된 프로테스탄티즘이 향후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충고한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태양을 지혜롭게 바라보지 않으면 태양은 우리를 후려쳐서 어둠 속으로 빠뜨립니다. … 우리가 보는 빛은 영원히 쳐다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빛에 의해 우리의 현재 지식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토록 하고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빠진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밀턴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밝혀준 빛을 영원히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되며, 그 빛으로 앞을 밝게 비춰 진리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밀턴은 ‘우리가 츠빙글리와 칼뱅이 비춰 준 섬광을 너무 오래 바라본다면’ 완전히 눈이 멀어버릴 거라고 경고한다.
밀턴은 ‘교회 문제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인 가정과 정치 두 분야’에서의 삶의 규범을 주의 깊게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개혁해야 할 분야가 어디 ‘가정과 정치’뿐이겠는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특히 고학력 사회인 현대 세계에서는 각 개인의 전문 영역에서 ‘개혁’이 필요하다. 밀턴의 말대로 ‘그 빛에 의해 우리의 현재 지식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종교개혁자이자 무교회주의자인 밀턴의 당부를 실천한 인물이 김교신과 함석헌이다. 지리학자 김교신과 역사학자 함석헌은 「조선지리소고」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통해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
김교신은 절대자 앞에서 산 신앙인인 동시에 역사 앞에서 산 지식인이었다. 기도로 믿음의 중심을 잡았고, 독서로 사상을 형성했다. 성경을 연구한 신앙인이자,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을 전공 영역으로 확장한 학자였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제62호(1934년 3월)에 「조선지리소고」를 게재한다. 제61호부터는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한다. 30대 중반의 젊은 지리학자와 역사학자가 같은 시기에 나란히 무교회 기독교 신앙을 바탕에 둔 학문적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신앙과 학문의 합금을 보란 듯이 성취했다. 두 사람의 업적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진기한 사례에 속한다. ‘지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면 목사들부터 사색이 되며 ‘지적 교만’이란 딱지를 붙이곤 하는 ‘무지성’ 한국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성취다.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우물 안 개구리’ 교회주의자에게 우물 밖의 일상생활과 전공 학문 영역은 신앙과 아무 관련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따로국밥 신앙’이다.
신앙과 전공의 합금을 20세기 전반기 무교회 그룹 젊은 학자들이 이룩했다. 교회주의자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성취를 거둔 이들을 ‘무교회학파’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교회 안에 갇히지 않은 신앙, 우주와 역사를 교회로 삼는 무교회주의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선지리소고」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전적 기독교’의 첫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하나님 공부는 신학밖에 없고,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있다는 교회주의자들과는 그릇이 다르다. 현대 한국은 고학력 사회다. 인구 상당수가 대학 또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각기 전공이 있으니,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자기 영역에서 적용하고 구현하려는 노력이 뒤따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교신과 함석헌이 그랬듯이.
김교신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척박한 시대 상황에서 ‘학자’보다는 ‘기독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열악한 시대 조건 속에서 온몸을 던져 진지하게 학문을 연구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성서조선』 발간 이외의 일은 사치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조선지리소고」라는 명논설을 남겼다. 만일 그가 살던 시대 조건이 식민지 조선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였다면, 전공 학문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신앙과 학문의 합금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 더 큰 업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