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 하는 것은 이 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고, 마지막으로 이 육신이 묻힐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내 가슴을 부풀게도 하고 아프게도 한 아슴푸레한 영상이 간직된 곳이다. 고향을 찾아간다는 건 처음의 기억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우리 집 아래 영구네 집까지의 백 미터 남짓 되는 골목길이 별나게도 그립다. 여름과 가을이면 양쪽 언덕 위의 나무들로 잎새들의 터널이던 골목, 봄이면 민들레꽃이 하늘의 금단추인 양 다문다문 피어나던 흙길. 때론. 쇠똥이 펑퍼짐하게 뉘어져 있기도 하고 간혹 화사한 능구렁이가 쉬엄쉬엄 들고 나던 돌담이며….
장에 가신 엄마를 목 빼서 기다렸고, 해 질 무렵 살구나무 위에 올라가서 노을을 바라보면 왠지 슬퍼져서 눈물을 글썽이며 내다보던 골목길. 고향의 그 골목길은 기다림의 씨앗을, 그리움의 씨앗을, 아득함의 씨앗을 파종시켰던 첫 작물 밭이었다.
고향을 떠나던 날, 뒤돌아보게 하던 그 무엇이 지금에도 그 골목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제 고향의 골목길은 황량하기만 하다. 푸른 나무도, 풀꽃도 사라지고 돌멩이만 구르고 있을 뿐. 저 좁은 공간에서 동무들과 어떻게 술래잡기 했고, 어떻게 공놀이했을까. 비 내리는 밤이면 무서워서 아빠 담배 심부름조차 겁내던 길이었다. 지금은 개들조차도 짖지 않는 적막한 골목이 되었다. 오늘 농촌의 메마른 인정도 기실 우리네 고향의 골목길이 황폐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때 농부들에게는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라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다. 아버지는 퇴비를 만들기 위해 매년 들에 벼이삭이 팰 때면 일꾼들을 데리고 마을 뒷산인 징광산 기슭 가파른 산길을 올라 풀을 벤 후 마르면 지게로 져 날라 작두로 썰어 마당에 산더미 같은 퇴비 더미를 만들었다. 그 퇴비 만드는 일은 풍년을 기약하는 동네의 연례행사로 거름 자리 크기는 곧 그 집 살림살이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퇴비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거리'라는 말이 있다. 과실이 한 해에 많이 열리면 그 다음 해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 걸 말한다. 그때는 이모작이라 해서 논에 벼를 수확한 후 보리나 밀을 재배했다. 아버지는 4, 5년마다 벼를 수확하고 보리를 재배하지 않고 자운영을 심어 땅심을 높인 다음 햇벼를 심어 해거리를 방지했다.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등 많은 과실나무도 해거리한다. 한 해 많은 열매를 키우고 나면 다음 해는 반드시 쉼이 필요했다. 한 해를 쉬는 건 나무들의 안식년이기도 했다.
2천여 평의 감나무에서 과실을 수확해야 하는 아버지의 처지에선 수확량 감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해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이 가지치기이다. 썩은 가지는 물론이고 잔가지를 미리 잘라 주면 이듬해 감나무 가지마다 둥근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해거리'와 '가지치기'는 '힘과 쉼'이다. 이는 자연이 베푼 비움의 지혜이다. 힘과 쉼 역시 그렇다. 얼핏 정반대 성질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힘을 빼고 멈춘 상태가 '쉼'이기 때문이다.
1965년쯤, 나의 고향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 덕분이다. 이때쯤 가난을 퇴치하자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심었다. 농부들은 다수확 품종이라는 말에 퇴비로 농사짓던 재래의 방식을 바꾸어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힘들게 퇴비 만드는 일도 사라졌다. 이 신품종 벼가 재배되면서 쌀 수확량은 늘었으나 자연에 순응하는 순박한 시골의 기존 질서와 가치는 사라지고 말았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면서 고향의 옛 정취도, 더불어 살아가는 인정 있던 사회가 삭막하고 메마른 사회로 바뀌어 갔다. 오직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이 대폭으로 늘어났다. 특히 통일벼는 병해충에 취약해 농약 사용이 해마다 급속히 늘어났다. 바람 부는 날에는 독한 농약 냄새가 집안으로 날아들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인분과 천연 퇴비로 몇천 년 이어져 온 자연 친화적인 농촌은 생산 극대화를 위한 기계적 농촌으로 날로 삭막해졌다. 도시에 공장이 들어서고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시골의 공동화 현상은 심해져 갔다.
그 시절 봄이 오면 농촌에는 남쪽 나라에서 제비, 뜸부기, 따오기 등 여름 철새들이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제일 반가운 손님은 제비로 사람들은 그 철새가 행운을 물고 온다고 믿었다.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전선줄에 앉아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정겹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의 한 단면이었다. 그 철새들의 먹이가 논밭의 해충인 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그러나 다수확을 위한 과도한 비료나 농약 사용은 병해충만 잡는 게 아니라 철새들마저 죽이고 말았다. 자연은 조력자를 잃고 역습을 당한 것이다. 해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그 철새들은 이 땅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웅덩이에서 헤엄치던 풍뎅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땅강아지, 가을이면 황금 들판 벼 이삭에 붙어 깡충깡충 뛰어 날던 메뚜기, 새들을 쫓던 허수아비도 사라졌다. 오월이 오면 무논에서 밤새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고 개울의 피리, 메기 등 물고기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 동물이나 곤충이 살 수 없는 이 땅에 사람인들 온전히 살 수 있을까?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싸리 울타리에 소변을 누다 미루나무에 걸친 달을 보면 문득 슬픔이 치밀던 새벽녘, 일그러진 달을 보고 놀란 강아지 짖는 소리에 닭들이 '꼬끼오' 하며 새벽을 깨우던 사람 냄새나는 그 풍경이 영영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늦가을, 이 나무는 이상하다.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주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 '아낌없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 살까지 떼어 먹일 정도로 눈물겹게 섬겨 왔다는 헌사가 더 어울린다. 하지만 고향의 이 나무가 내년 봄에도 다시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리라는 기약은 어디에도 없다.
첫댓글 고향을 그리워하는 글이지만 매우 뛰어난 생태수필이기도 한 수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