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익스포져(Double Exposure), 삶과 죽음 그 사이/ 이 령
<들어가는 글>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왜 존재하는지 존재 가치를 모른다. 그래서 방황하고 좌절한다. 다만 누구나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면 곧 죽을 거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영원한 부재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 자신으로 하여금 헛되이 살지 않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태원 압사 사고를 비롯해서 지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하며 늘 근접해 있지만 의식적으로 늘 밀어내고 싶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대해 더욱 천착하게 된다.
’명랑하게 죽어가기 위하여 나는 살려고 한다.‘-게오르도의 명언이 다시금 각인되는 계절이다.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는 C다. 출생(birth)와 사망(death) 사이에서 사람들은 선택(choic) 하면서 살아간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명언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선택적 운명이 주어지지 않기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잘 죽어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고 삶의 모습 또한 각자의 선택과 그 선택에 부합하는 노력으로 결이 달라지는 것이겠다.
지난 호에 실린 작품들을 숙독하며 삶과 죽음, 선택의 장, 그 사이에서 사유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두 편의 시(詩),인들을 호명해 본다.
죽음보다 버겁고 두려운 삶에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리고
더는 밀려날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벼랑 끝에 선 여인
시퍼렇고 아찔한 강물에
아이를 먼저 던지고
자기도 뒤따라 투신하려고
후들거리는 두 팔로
아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데
공중에서 아이가
눈을 맞추고 해맑게 웃으며
엄마에게 말했다네
“엄마, 사랑해요.”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불현 듯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홀어미가 아이를 업고
기어 내려오는 벼랑길 내내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다네
-동반자살에서 동반살자로, 김정원, 월간 『우리 詩』 2022년 12월호
이 시는 제목에서 할 말을 다하는 작품이다. 비본질적 낯설게 하기 의 전형인 시적 구성으로 실재했던 사건을 시적 은유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전경에 배치함으로써 시인은 불필요한 감정 강요나 너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시인의 사유는 ’동반자살에서 동반살자로‘라는 아포리즘 적 제목을 가미하며 담백하게 감동을 추동한다.
우리가 살면서 선택의 순간은 부지기수다. 무엇이든 때를 따라서 움직이는 현상이 바로 생의 현장이다. 일어날 때가 있으면 잘 때가 있고 상처를 주면 그 상처를 되돌려 받을 때가 있으며 전쟁으로 폐허를 견디고 나면 평화가 도래하기 마련이다. 병들 때가 있으면 치유의 때가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때가 없다고 전도서에서 이른다. 아마도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대끼며 좌절하고 방황할 뿐인데, 그 지난한 삶을 견디게 하는 최상의 보루는 아마도 ’사랑‘ 이 아닐까 싶다. 홀어미가 어린 아이와 벼랑 끝에서 ’동반자살‘을 하고자 한 그 절명의 순간에 ’동반살자‘로 마음을 고쳐먹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벼랑길을 내려오게 한 것도 “엄마, 사랑해요.” 라는 어린 아이의 순하디순한 고백이었다.
제목과 내용의 고저장단(제목이 관념적일 땐 내용은 사실적으로, 내용이 관념적일 땐 제목은 사실적으로)이 잘 구성된 작품이다. 불필요한 비유체계를 지양하고 시인을 거쳐 삶의 애환과 감동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뒀다. 그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따뜻하고 깊고 정갈하다.
새 한 마리가
싸늘하게 도로에 누워 있다
어느 누구도 새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시한폭탄에 초점을 꽂고 질주하는 차량들
스쳐가는 굉음이 빛보다 빠르다
죽은 새의 일단이 건너편 나무에 앉아
억울한 울음으로 울다가
떠날 때까지
질주하는 것들은 새의 영혼까지 지우고, 떠난 새들도 그때쯤은 까마득히 잊고 있을지도 모를
정당방위일까 미필적 고의일까 어쩔 수 없는 사고일까
영역을 침범한 대가는 죽음이다
오로지 죽은 새의 과실로 평온하게 달리는 도로
나는 지금 어느 쪽의 영역인가를
항소 한다
- 로드킬의 새, 박봉준, 월간 『우리 詩』 2022년 12월호
’어느 누구도 새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시한폭탄에 초점을 꽂고 질주하는 차량들‘- 외연은 로드킬 당한 새의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내연은 인간사 삶과 죽음의 사이, 그 간극의 순간을 서늘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삶의 영역을 벗어난 순간 죽음의 영역이 열린다. 느닷없이 닥친 죽음과 그것을 목도하는 남겨진 시인의 눈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냉철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정당방위일까 미필적 고의일까 어쩔 수 없는 사고일까‘- 삶이 무엇인가를 규정하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없고 죽음은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사는 것 수(壽)를 가장 큰 행복으로 삼지만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라고 일컫는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인간의 인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의 영역인가를 항소 한다‘ -시인의 진술처럼 사람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영역, 그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느 누구도 새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시한폭탄에 초점을 꽂고 질주하는 차량들‘-비록 인간이 타인의 삶과 죽음에는 냉정할지라도 ’질주하는 것들은 새의 영혼까지 지우고, 떠난 새들도 그때쯤은 까마득히 잊고 있을지도 모를‘ 지라도 분명한 것은 어떤 죽음은 남아있는 이들의 삶에 길을 예비할 것이고 어떤 삶은 남아있는 이들의 삶에 빗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잘 죽어갈 것인가? 는 각자 선택의 몫이다.
(마무리 글)
이상 소개한 두 편의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서늘한 응시와 진중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사유 깊은 인식을 추동시키고 있다. 누구나 선택적 출생은 부여받지 못했으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각자가 선택한 그 삶의 길이 만들어낸 결을 통해 어떻게 잘 죽어갈 것인가? 에 대한 가치평가를 제시한다. 객관적 상관물로서 일련의 사건을 불러내고 그 골계를 이루는 사건들을 탄탄하게 묘사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일종의 더불익스포져(Double Exposure)로 사유의 폭포수를 선사한다. 마치 잘 죽어간다는 것은 잘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듯.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