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41)
[에피소드104]
2008년 3월 23일 H당의 M이라는 정치인이 당내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는 그동안 의정활동도 잘했고 지역 내의 여론도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공천에 탈락했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공천탈락에 항의하여 당에 대한 비난을 쏟아 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뒤엎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난 10여 년 간 후회 없이 일했고 부끄러움 없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한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떳떳하기에 미련은 없다”면서 “당은 제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주었지만 저는 당을 버리지 않겠다. 모든 것은 다 묻어 두고 가겠다” 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민적 여망을 안고 탄생한 XXX정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사명이라면서 “이제 한 명의 당원으로서 이번 총선 승리와 XXX정부의 성공을 위해 역할을 찾겠다” 고 밝혔다. M의원은 탈당의사를 밝힌 지지자들을 상대로도 “이번 총선에서 H당이 승리하는 것이 제가 이기는 것이고 제 명예를 되찾는 것”이라며 “탈당 결심을 거두어 달라. 그리고 H당 후보를 위해 뛰어 달라”라고 호소했다. 그는 기자회견 도중 감정에 북받쳐 두 차례나 눈물을 쏟았고, 옆에서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당원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동안 냉혹하고 배신과 술수가 난무한 우리 정치 현실을 지켜보면서 정치인들에 환멸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나 M의원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의 정치계에도 희망이 조금은 싹 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시인이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지만, M의원의 퇴장 모습을 순수하게 만 해석한다면 그는 혼탁한 정치풍토에서 한줄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이런 귀감이 되는 행동은 잘못된 조국의 정치관행을 광정(匡正)해 나가는 데 일조가 될지도 모른다.
[에피소드105]
내 친구 중에 K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중앙은행인 H은행을 거쳐 지금은 모 은행 자회사 감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필자가 대학 1학년 시절인 71년부터 교제한 이래 38년간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런데 최근 3~4년 전부터 그는 금전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의 케이스도 나처럼 부인 때문에 갑자기 큰 금전적 피해가 발생한 경우이다. 그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처지를 더 동정하여 나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나는 2001년 말경 생활에 여유가 있는 나의 가까운 친구인 N에게 약간의 물질적 도움을 요청한 바가 있다. 그 때는 내가 부천에서 개척교회를 막 시작하려는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 때 N은 나의 요청을 냉정히 거절했다. 그 후 나는 다시는 이 세상에서 가까운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을 지금까지 실천해 오고 있다.
그런데 K는 나의 도움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참된 우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인생이 지식과 지혜, 건강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기에 덧붙여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이 있어야 참된 인생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K는 지금 잠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하늘의 빈틈없는 슈퍼컴퓨터의 확인에 의해서 언젠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인생은 겉으로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이 의외로 파멸의 길을 가고 있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실패의 길을 가고 있는 듯 한 사람이 확실한 승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경우가 바로 그런 논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에피소드106]
2008년 3월 27일 그동안 여러 번 나를 도와주었던 친구 K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에게 또다시 금일봉을 건네주었다. 그도 물질적으로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나는 그의 형제애에 감복할 따름이었다. 그는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진정한 선한 사마리아인중의 한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에게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조금도 없지만,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량없는 축복을 부어 주실 것을 기도한 것이다. 그날 마침 세계의 명연설 중에도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링컨 대통령의 제2기 취임연설(남북전쟁을 끝낸 직후)을 읽었는데, 그 중 한 구절 “누구에게도 원한을 갖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 내 가슴에 깊이 인자(印字)되었다.
[에피소드107]
2008년 4월 3일 자서전 “다시 시작할 수 있다”의 내용을 추가하기도 하면서 통산 다섯 번째 수정에 착수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한다 해도 한 번 수정에 대략 한 달 반 이라는 긴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수정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과도한 긴장이 계속되는 때문인지 신체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 재채기와 콧물이 수시로 나오고, 눈이 침침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감기에 걸린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한 달이 넘도록 낫지 않고 상태가 심해가자 이비인후과 병원에 가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6시가 넘어 병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대신 가까운 약국에 들렀다. 마침 여 약사가 자신도 알레르기 때문에 여러 번 고생해 보았다면서, 설명을 잘 해 주었다. 그녀는 알레르기 반응의 원인은 세 가지 원인에서 온다고 하였다. 첫째 과도한 정신적인 활동, 둘째 급격한 온도차, 셋째 꽃가루에 의한 감염이라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첫 번째 원인에서 온 것 같았다. 내가 2006년 말 자전적 에세이 초고를 거의 끝낼 무렵에 심계항진(心悸亢進)이 왔는데, 지금 원고 수정하는 작업도 강행군을 해서 그런지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유발된 것 같았다.
[에피소드108]
2008년 5월 1일 연세대 송복 교수가 쓴 “위대한 만남, 서애 유성룡”을 읽었다. 내가 어릴 때 읽은 책 레미제라블과 쿼바디스를 제외하고는 가장 감동을 받은 책이었다. 그런데 레미제라블과 쿼바디스는 상상력을 극대화한 픽션 소설에 불과했지만, “서애 유성룡”전기는 누란에 처한 조국 조선을 지켜내려는 서애 선생의 피땀 어린 노력의 역사적 기록이다. 비록 조국의 역사가 세계역사에 비추어 볼 때 자그마한 반도에 불과한 나라의 역사이지만, 임진란을 맞아 전시수상(戰時首相)으로써 국난을 타개하는데 바친 서애 선생의 족적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한 인간의 발자취를 보여 주고 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6년 7개월 중 만 5년을 정무, 군무 겸직의 전시 수상(영의정)과 4도 도체찰사(군 최고위직)직을 맡아 두 가지 전쟁을 함께 치러냈다. 그 하나는 명ㆍ왜의 4년에 걸친 물밑 강화협상을 통한 조선분할 획책을 막아내는 “분할저지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식량이 완전히 고갈된 나라에서 식량을 모아 명군과 조선군에 군량을 대는 “군량전쟁”이었다.
당시 피폐한 백성의 살림살이에서 많은 군량을 조달해내는 것은 전쟁보다도 더 어려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전란을 겪고 있는 조선 백성의 사정은 세금이 너무 가중되어 몽둥이로 뼈를 쳐서 골수를 뽑아내는 추골박수(椎骨剝髓)의 형국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대도 그는 전쟁기간동안 그 막중한 일을 잘 수행해 냈다. 특히 유성룡의 탁월했던 점은 군량을 조달해 내는 데 있어서, 동서고금의 전쟁의 역사에서 많이 사용해온 백성을 수탈하는 강압적, 약탈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모속(募粟), 공명첩(空名帖), 무속(貿粟)을 통해서 백성들이 자원해서 군량용 곡식을 바치게 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영국의 처칠수상이라도 흉내를 내지 못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놀라운 지혜였다. 그는 또한 인재발굴에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문신인 권율을 육군으로 등용해서 행주산성 싸움에서 대 승리를 가져오게 했고, 육군으로만 평생 경력을 쌓아온 이순신을 전혀 경험이 없는 수군으로 발탁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인사였다. 그러나 앞날을 내다 본 그의 인사는 의표를 찔렀으며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유성룡은 또한 무능하고 자존감이 없는 선조임금과, 말이 구원 군이었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횡포를 자행하는 명나라 장수와 관리를 상대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일례로 왜와 화친을 맺고자 한 명(明)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군 장수 이여송은 유성룡을 그의 군영으로 불러들여 비가 오는 바깥에 반나절이나 세워 두었다 한다. 이여송이 조선 대신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존경한다는 대신에 대한 대접이 이정도 이었으니 다른 대신들과 조선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천부적인 정치 리더십으로 만난(萬難)을 극복했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그가 가진 맑은 인품, 유약한 듯 하면서도 곧고 인내심 강한 성품, 항시 진정성이 드러나는 대화, 온몸으로 품어내는 충성심, 학자적인 높은 소양과 은은히 풍겨오는 서권기(書卷氣),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온유한 성격에 있었다. 그는 명민한 지혜와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그 횡포한 명군 장수들을 꺾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공리공론과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조 정치인들과 달리 너무나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시내각을 이끌어 나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와 백성에 헌신한 서애 선생을 조선조 조정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것이 사리사욕과 당파에 물든 조선의 현실이었다. 전쟁의 종식을 한 달 앞두고 조정의 명나라를 추종하는 반대파들은 그를 탄핵했고, 그가 마침내 파직 되는 날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그가 전사하기 전 유성룡의 탄핵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큰 충격을 받고 “나라일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순신의 노량해전에서의 전사는 적에 의한 죽음이었다기보다는 삭탈관직에 몰린 유성룡의 처지를 보면서 아마도 자신의 장래도 우려했던 데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싸움이 끝나갈 무렵 갑판위에서 스스로 적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하는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 자강파와 의명파로 나누어 졌다. 자강파는 스스로 힘을 길러 그 힘으로 적과 싸우며 나라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것이었고, 의명파는 명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자는 것이었다. 자강파(自彊派)에는 유성룡과 이순신 그리고 의병들이 있었고, 의명파(依明派)에는 선조를 필두로 한 대다수 조신들이 속해 있었다. 의명파가 득세한 이 후 조선은 3백년에 걸쳐 서서히 쇠망해 져 갔다.
유성룡은 파직된 후 고향 하회로 돌아왔다. 선조가 그 후 몇 차례 다시 조정에 출사하라는 소명을 내렸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을 만큼 현명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국상 때도 동대문 밖 길가에서 곡송(哭送)하고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날로 바로 향리로 내려갔다. 고관대작을 했는데도, 말할 수 없이 청빈했던 그는 향리 삼간누옥에서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붓을 멈추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후세를 경계하는 엄청나게 많은 값진 기록들을 남겼다.
그것은 임진왜란을 정리한 “징비록” 진사록(辰巳錄), 군문등록(軍門謄錄), 근폭집(芹曝集)을 위시한 많은 저술들이었다. 이 저술들의 주제는 하나 같이 “우리가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우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다시 중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었다. “남을 믿어서도 의뢰해서도 안 된다. 바로 우리가 독립해야 한다.”가 이 저술들의 핵심이고, 줄기이고, 요체였다.(송복著 “서애 유성룡” 참조)
나는 이 책을 읽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고, 사나이 대장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도 앞으로 서애 선생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참으로 서애 선생처럼, 헛된 명예나 부귀는 일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깨끗하게, 품격 있게, 강직하게, 그리고 오직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치는 값진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