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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회 집회서 1장-19장
집회서 - 벤 시라의 올바른 삶에 대한 가르침
집회서(Ecclesiasticus)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되거나 집필된 구약성경(또는 히브리성경)인 70인역 성경의 일부분이다. 70인역에서 제목은 "시라크의 지혜" (소피아 세이라크, Σοφια Σειραχ)이며, "시라크 아들 예수의 지혜"라는 제목이 붙은 사본도 있다. 히브리어 사본의 제목은 "시라크 아들들의 지혜"(세페르 벤 시라) 로 젂해짂다.
현재의 책제목이 "집회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초기 서방교회 교부들이 신앙에 도움이 되어 교회에서 사용하기 좋은 집회 문헌이라는 의미로 "집회의" 또는 "교회의 책"이라고 라틴어로 부른 명칭에서 유래했다.
정경: 70인역에서 성문서로서는 총51장이 되는 많은 양의 저작이며, 구약 문헌 중에서 유일하게 저자가 알려졌고, 사해 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제2경전 혹은 외경 중에서 유일하게 히브리어 사본이 존재하였던 문헌이다. 개신교회에서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는 구약의 제2경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시라크의 아들"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벤 시라크"를 저자의 이름으로 주로 사용하며 "벤 시라"를 사용하기도 한다.
지혜문학 작품: 집회서는 본래 히브리어로 작성되어 성문서인 지혜문헌의 영향을 받아 작성된 종합적인 지혜문헌이다. 주요한 구약의 지혜문헌인 잠언, 전도서, 욥기 등과 같이 다양핚 지혜와 생활의 방침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지혜의 분야별로 구분하여 저술되었고, 술, 잔치 등과 같이 세부적인 생활에 담긴 지혜까지도 기술하였다.
원본과 사본: 집회서는 코이네 그리스어 사본과 히브리어 사본이 동시에 전해지는 문헌이다. 코이네 그리스어 번역본은 70인역을 통해 전해지고, 히브리어 사본은 근대에 들어 사해 문헌 중에서와 이집트 카이로의 에스라 회당에서 두루마리로 발견되어 전해진다.
저자: 집회서의 저자인 벤 시라크는 "시라크의 아든, 예수"로 알려졌으며, 학자들은 그를 기원전 2세기 경에 구약 성경을 잘 이해하고, 유대교 전승과 다양한 중동지역의 지혜 전승, 헬라주의 사상을 이해했던 율법학자로 추정한다. 벤 시라크는 기원전 180-170년 경에 히브리어로 원본을 작성하였고, 이 문헌이 널리 알려졌다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벤 시라크의 손자가 기원전 132년 경에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번역자는 집회서 그리스어 번역본의 머리말에서 현대 번역가들의 번역 후기처럼 원본에 관련된 정보와 번역 의도를 기술하였다. 머리말에는 저자의 이름이 자세히 소개되었고, 저자가 율법과 예언서, 다양한 자료를 통달했다고 소개하며 번역은 에우에르게테스 임금 삼십 팔년에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번역 의도는 이국땅에서 살며 학문을 사랑하고 올바른 행실로 율법을 따르게 하고 싶어서였다고 밝혔다.
집회서는 유대인 뿐맊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인든이 자주 읽었던 구약 문헌이며 코이네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헬레니즘의 로고스와 구약성경의 지혜가 유사한 것으로 기술되었고 유대교의 지혜 사상과 헬레니즘의 로고스 사상이 융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헌이다.
예루살렘의 현자 시라는 그리스의 종교와 사상이 전통적인 유다교에 대해서 커다란 위기를 가져 올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저자는 유다인의 동포들의 신앙과 생활면의 확신을 굳히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다인든이 절충주의의 입장을 취하거나, 유다교를 버린 자들을 날카로운 문장으로 비난하고 있다.
라틴어 명칭인 Ecclesiasticus는 성 치프리아노 시대 이후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새 입교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교회가 이 책에 부여하고 있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이 책이 예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록 유다인 정경에서 제외되었을지라도 이 책은 교회에서 읽혀 지는 교회론적인 것이다.
기원후 1세기말에 있었던 얌니아(Jamnia) 유다인 공의회에서 랍비들은 집회서를 정경에서 제외해 버렸고, 적은 숫자의 히브리 사본들이 유통되고 있었을 뿐이다. 이 히브리 사본으로부터 2세기에 한 신앙인에 의해 시리아어 번역본이 나타나게 되었다. 8세기에 집회서의 히브리 본문이 예리고 근처에 있는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히브리 본문의 보존상태가 나빠 읽기 어렵게 되어 히브리 본문에서 부족한 몇몇 내용들은 시리아 번역본에서 재번역을 하였다.
이처럼 이미 초대 교회 시대부터 공동체의 삶 안에서 대대로 보존되고 전해져 내려오던 집회서는 다른 책들(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바룩서, 마카베오 상·하권 그리고 에스델서와 다니엘서의 첨가부분)과 함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 의해 구약성서의 정경으로서 공적으로 확인되기에 이른다.
이 일련의 책들이 바로 ‘제2경전’(Deuterocanon)이다. 이 개념은 15세기 시에나 출신의 식스토(Sixtus von Siena)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는데, 가톨릭 교회가 성서의 경전 목록을 공적으로 확정했던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구약성서 가운데 히브리어 경전이 아닌 문헌들로써 70인역본 성서를 통해 그리스어로 전승되어 온 문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반면 히브리어 경전은 제1경전(Protocanon)이라 불리어진다. 제2경전이란 용어는 여기에 속한 작품들이 시기적으로 ‘후에 경전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할 뿐이지 제1경전과 비교하여 경전상의 우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한편 개신교에서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을 외경이라 부른다).
저자가 활동했던 시대는 알렉산더 대왕의 고대 근동지방 정벌이 끝나고 헬레니즘의 문화적 혼합과 종교적 통합주의, 인종과 종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보편주의의 경향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처럼 유다인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유다이즘의 종교적, 문화적 정통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에서 그는 먼저 지혜의 본질을 규명하고,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친 유다 전통의 총체적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신학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집회서는 근본적으로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로서 영원하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증언함으로써 전통신앙을 재정립하고 있다. 그러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집회서 전체의 중심주제로서 의인화되어 제시되고 있으며(24장), ‘참된 지혜의 근원이 주님을 경외함’이란 잠언의 사상(잠언 1,7)이 폭넓게 다루어지며 심화되고 있다. 집회서에 있어 ‘주님을 경외함’은 율법에 대한 충성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율법이 명시한 구체적 삶의 규범을 실천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나아가 집회서는 지혜의 특성과 기능을 한층 더 발전된 차원에서 상술하고 있다.
한편 집회서에 있어 의인에 대한 보상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이 전통적으로 견지해오던 것처럼 지상적이며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의인의 불사불멸 사상’이나 ‘부활 사상’은 구약성서의 마지막 시대에 저술된 지혜서(기원전 50-30년)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기 전에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고 자비를 가지라.’(27,30-28,7)는 가르침은 구약의 사상을 넘어 복음서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마태 5,23-24; 6,14; 18,35; 마르 11,25; 루가 6,37)
역사적 배경
예수 벤 시라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지혜의 스승이었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는 코일레 시리아 지역에 속했다. 안티오키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세금으로 바치는 돈 때문에 이 땅을 차지하고 싶어 했고, 이 땅은 기원전 198년에 안티오코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예루살렘에 어느 정도의 호의를 허락했는데, 의인인 대사제 시몬에 대한 칭송 첫 부분에서(50,1-4)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는 토비야 가문이라는 재산가 집안이 세금 징수 업무를 맡았는데, 물론 적지 않은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지지했던 그들은 기원전 198년부터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지했다. 세금 징수관인 히르카노스만 요르단 동쪽으로 성전의 금고에 보존되어 있었다. 기원전 190년에 안티오코스 3세는 스미르나 근처 마그네시아에서 로마 군대에 패배하고 많은 배상금을 내게 됐는데, 그의 후계자인 셀레우코스 4세도 아직 그 돈을 다 갚지 못한 상태였다. 2마카 3장에서 이야기하는, 기원전 175년의 헬리오도로스의 일화는 아마도 로마에게 갚아야 했던 이 빚과 연관될 것이다. 히르카노스의 재산은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곳이다! 이 사건들에 관해서는 다니 11,10-20을 보라.
이렇게, 벤 시라의 시대는 전펴 평온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본문은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왕권은 민족에서 민족으로 넘겨지는데 불의와 폭력과 재물 때문에 그렇게 된다”(10,8)
현인 벤 시라
그는 현재의 구약성경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현인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솔로몬처럼(1열왕 3,4-15) 주님께 지혜를 청하였고 주님은 그에게 이를 허락하셨으며, 그는 충실하게 지혜를 추구했다(51,13-17). 지혜로 채워진 그는 그의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전해 줄 학교 내지 학원을 열기로 했다(51,23-30). 오랫동안 율법과 예언서와 이스라엘의 영적 유산에 속하는 다른 책들을 묵상한 다음, 그는 그의 지혜의 가르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머리글).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지혜로 가득 채워진 그는 그 지혜가 넘쳐흐르도록 했다. 그를 통하여 제자들은 지혜에 이를 수 있게 되고, 그에게서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를 전달 통로로 삼았던 지혜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경계선과 세대를 초월할 것이다. 그는 예언자들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그들의 유산을 이어간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 어쩌면 언젠가는 그의 작품이 거룩한 책들 사이에 들어가게 되기를 기원했을 수도 있다(24,30-34; 33,16-18). 그는 군주들의 고문이었고(39,4) 그래서 외국에도 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다양성을 아는 데 매우 유익한 체험이지만, 위험도 없지 않았다(34,12-13). 중상을 받아 몰락할 뻔 하기도 했다. 오직 기도가 그에게 하느님의 도움을 얻어 주었고 그는 이에 대하여 그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51,1-12).
이 작품에서 그의 인간성의 몇 가지 면을 알아볼 수 있다. 진정한 현인으로서 그는 균형과 상식을 추구했다. 그리스 문화가 중동을 매혹시키는 그때에 그는 유다교가 자신의 유산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 주려 했다. 헬레니즘에 개방적이었으나, 부자들이 이를 유다교의 오랜 전통을 무시하는 교만의 구실로 삼을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성전의 전례에 매혹되었고 사제들을 진정으로 공경했으며, 토라의 영적 가치를 확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들을 보였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사제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코헬렛보다 더 평온했던 그는 지혜에서 평화를 찾았고, 신비 앞에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겼다(3,17-24; 39,32-34 참조). 코헬렛과 마찬가지로 그도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빛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끝까지 품위 있게 산 인간 삶은 그에게 지극히 존경스럽고 풍요로운 것으로 여겨졌고, “인간의 희망은 구더기”(7,17ㄴ, 히브리어 본문)라고 고백했던 그는 죽음의 고통 때문에 그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긴 좋은 기억과 그 자신만큼이나 의로운 그의 후손 외에는 다른 어떤 응보도 없다고 생각했다(16,1-3; 44,8-13). 내세에 대하여 더 희망찬 전망을 여는 것은 수정판에서 이후에 첨가된 부분들이 될 것이다.
집회서의 구조
집회서는 현재의 구약성경에서 가장 긴 지혜문학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상당히 수고를 들였음은 명백하다. 그 자신이 먼저 첫 부분을 발표하고(1-24장 또는 1-23장) 나중에 본문 전체를 내놓았을까? 그런 가설이 논의되기도 한다. 24,34; 33,16-18; 49,14-16; 50-27-29과 같은 다른 단락들도 토론거리가 된다. 그러나 가장 근본 문제는 벤 시라가 그의 저서를 어떤 구조로 엮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주석가들은 아직까지 흡족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벤 시라가 잠언 10,1-22,16이나 잠언 25-29장(솔로몬의 잠언집)과 같이 단순히 잠언들을 모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오히려 잠언 1-9장과 30-31장처럼 다듬어진 숙고를 제시한다. 또한 그의 저서가 욥기처럼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책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집회서에도 단락의 순서가 있지만 독자가 파악하기는 어렵다. 특히 42,15 이전 부분이 그러하다. 그 후로 42,15부터 43,43까지는 창조의 놀라움을 노래하고 이어서 44,1부터 50,24까지는 성경의 역사를 오경과 예언서, 그리고 더 근래에 나온 몇몇 책의 순서로 훑어가면서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일으켜 세운 위대한 몇몇 인물, 특히 의인 시몬을 기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락의 순서 문제는 42,15 이전의 본문 전체와 마지막 장인 51장에 대하여 제기된다. 첫 번째 응답으로는, 벤 시라가 지혜와 현인에 대한 설명에 부여하는 중요성을 지적할 수 있다. 지혜는 1,1-30(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주님에 대한 경외와 연관하여), 4,11-19과 6,18-37(지혜를 얻기 위하여 요구되는 노력에 대하여) 14,20-15,10 (지혜를 얻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24,1-29(지혜의 찬미)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 집회서의 중심에 자리한 이 마지막 본문의 결론 이후로는, 현인 자신이 전면에 등장한다. 24,30-34(벤 시라에게는 지혜가 넘친다). 37,16-26(참된 현인에 대하여), 38,24-39,11(다른 직업들과 대비되는 율법 학자의 지혜), 51,13-30(지혜를 청하고 받은 벤 시라가 학교를 연다)을 보라.
이러한 첫 번째 응답은, 지혜와 현인 사이의 관계가 책 전체를 특징짓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벤 시라는 지혜와 현인에 대한 이 단락들 사이에 들어 있는 다른 단락들을 어떻게 조직했는가? 주석가들이 아직까지 부분적인 대답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질문이다.
1,1-30과 51,13-30 사이에 수미쌍관의 관계가 있고, 51,1-12(시련을 벗어난 벤 시라의 감사 기도)가 2,1-18(현인은 시련에 준비해야 한다)과 역시 수미쌍관 관계에 있을 수 있다.
그 밖에는 특히 벤 시라가 삽입해 놓은 짧은 서술이 있다. 몇 가지를 보면, 9,17-10,18은 민족들을 교만하게 지배하는 이들에 대한 서술이고, 참된 행복에 관한 시인 10,19-11,16은 이를 반영한다. 15,11-16,14과 16,17-18,14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하느님의 용서에 관한 상보적인 두가지 논의이다. 22,27-23,27에서는 두 개의 기도가 말하는 방법과 성욕에 관한 두 가지 설명을 도입한다. 25,1-26,18은 부부의 화합을 다루고, 29,1-20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돈을 사용하는 방법을 다룬다. 31,12-32,13은 잔치 때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36,23-37,15는 아내, 친구, 조언자 등 신뢰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밖의 다른 모음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벤 시라가 그의 책에 어던 질서를 부여하려고 했는지를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제기하고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집회서에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 준다. 앞서 다룬 지혜문학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우리는 이 예루살렘의 현인이 쓴 중요한 본문 몇 단락을 분석하는 데에 머물 것이다. 가능한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그리스어 짧은 본문을 기초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집회서의 수정판도 사용하여, 그 수정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자는 어려우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의 풍요로움을 온전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집회서의 올바른 삶에 대한 교훈들
집회서에 제시되는 벤 시라의 교훈들은 조직적인 구조의 틀에 따라 배열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집회서의 서두에 위치하고 있는 번역자의 머리글과 끝 부분에 첨가되어 있는 부록(51,1-30)을 제외한 본문(1-50장)에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가르침들이 산재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올바른 삶에 대한 저자의 교훈들을 주제별로 모아 살펴보기로 한다.
①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
벤 시라는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을 계승하여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만이 유일하고 영원하신 분임을 가르치고 있다. 즉 야훼께서는 한 처음 당신의 작품들을 창조하실 때 영원한 질서를 주셨으며 당신의 좋은 것들로 세상을 채우셨다.(16,24-30) 그러므로 야훼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홀로 의로우시며, 당신의 권능으로 만물의 임금이 되신 하느님으로서 그분과 같은 존재는 결코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18,1-7)
나아가 저자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밝히고 있다. 즉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분으로부터 ‘일곱 가지 능력’인 분별력, 맛을 보고 말을 하는 능력(혀), 보는 능력(눈), 듣는 능력(귀), 지식을 얻는 능력(마음) 그리고 지성과 이성을 부여받았으며, 이와 함께 땅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만물의 영장으로 내세워진 존재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께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시어 당신 업적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선포하고 찬양토록 하셨다고 가르침으로써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17,1-10)
다른 한편 저자는 인간의 피조물로서의 유한성을 직시하고 있다. 즉 인간은 영원의 날수 안에서 불과 몇 해의 수명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18,8-10), 삶 가운데서도 선물로 받은 자유를 오용하여 죄에 빠져들고 만다.(15,11-14) 이러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죽음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이며(15,15-20),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은 하느님의 부족한 인간에 대한 인내심과 자비 그리고 용서이다. 실상 모든 생명체에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꾸짖으실 뿐 아니라 훈육하고 가르치시며 목자처럼 당신 양떼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18,11-14)
② 지혜
지혜에 대한 가르침은 집회서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써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전통적인 지혜사상에 따라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옴을 밝힌다.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된 지혜의 근원은 바로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지혜를 선물로 내리신다.(1,1-10)
그리고 온전한 지혜는 하느님을 경외함이니 온전한 지혜 안에 율법의 실천과 그분의 전능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다고 설명하는 가운데 저자는 지식이 부족하지만, 경건한 이가 학식은 넘치지만 율법을 어기는 자보다 더 낫다고 역설함으로써 지혜와 율법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강조하고 있다.(19,18-30; 그 외 4,11-19; 6,18-37; 14,20-27; 21,11-28; 24장; 51,13-30)
③ 하느님을 경외함
하느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은 지혜와 관련하여 제시되고 있다. 즉 하느님을 경외함은 지혜의 시작이고, 지혜의 충만이며 화관이다. 따라서 진정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은 영광과 자랑이 되며 즐거움과 환희의 화관으로서 그 결과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장수를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1,11-21) 나아가 저자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그분의 길을 지키며, 그분께서 즐겨하시는 바를 찾고 그분의 법으로 만족하며,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어 그분 앞에서 스스로 낮추며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2,15-18).
이렇게 사는 이에게는 하느님이 희망이며, 든든한 방패, 힘있는 버팀목, 쉼터, 그늘로써 그들이 비틀거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넘어지지 않게 부축해 주신다.(34,14-20)
④ 올바른 삶의 자세
구약성서에 있어 정의란 ‘관계에 충실함’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할 것을 가르칠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충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하고 자신을 낳아준 이를 상전처럼 섬긴다고 전제하면서 무릇 자녀들은 말과 행동으로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며, 특히 연로하셨을 때 잘 보살펴드리고 슬프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3,1-16; 그 외 7,23-28; 16,1-4; 30,1-13; 41,5-10)
또한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 세 가지라고 제시하는 동시에 잘난 체하는 가난한 사람과 거짓말하는 부자, 지각없이 간음에 빠진 늙은이 등의 세 부류를 혐오의 대상으로 경계하고 있다.(25,1-12)
그 외에도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꾸짖지 말며, 듣기 전에 대답하지 말고, 남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지 말라는 ‘신중함’(11,7-11), 커질수록 스스로를 더욱 낮추어야 하고, 자신을 올바로 평가해야 한다는 ‘겸손’(3,17-25; 10,26-31), 자신을 단련시켜 나쁜 것에 넘어가지 말며, 사치와 음식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라는 ‘절제’(37,27-31; 18,30-19,3) 등이 올바른 삶을 위해 요구되는 기본 자세로서 제시되고 있다.
⑤ 그 밖의 여러 교훈들
집회서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교훈들이 제시되고 있다. : 기도(22,27-23,6), 말(5,9-15; 28,8-26), 사회 정의(4,1-10; 7,32-36), 술(31,25-31), 식탁에서의 예절(31,12-24; 32,1-13), 시련(2,1-9), 죽음(38,16-23).
집회 1,1-10 지혜의 신비와 주님을 경외함
집회서의 첫 페이지는 매우 다듬어진 글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히브리어 본문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어 본문을 사용할 것이다. 여기에서, 짧은 본문은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벤 시라의 생각을 가장 잘 증언해 준다. 이 단락에 대해서는 긴 본문에 첨가된 부분을 다루지 않겠는데, 그 첨가문은 몇몇 성경의 각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회서의 저자인 예수 시라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를 상세하게 전개하기 전에 먼저 지혜문학의 두 가지 기본 주제를 다룬다. 1-10절에서는 하느님의 선물인 지혜의 신비에 관해서, 11-21절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함에 관해서 다룬다. “1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1). 여기서 지혜는 이 세상에서 축적된 규범들이나 인간의 체험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뒤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계획을 뜻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모든 축적된 지식을 능가한다. 심지어 바다의 모래와 빗방울과 영원의 날들까지도 능가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전의 현인들과 달리 벤 시라는 일상의 체험과 현세의 실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의 첫 주장은 신학적이다. 그에게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지혜로 주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은 전혀 없다. 따라서 지상에 어떤 지혜가 있다면 그 원천은 주님이시다.
“누가 바다의 모래와 빗방울과
영원의 날들을 셀 수 있으랴?
누가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이를,
심연의 깊이를[심연과 지혜를] 헤아릴 수 있으랴?”(1,2-3)
2-3절의 역설적 질문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우주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하물며 지혜를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벤 시라의 암묵적인 추론이다. 우주를 안다는 것은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땅과 바다 위에 떨어지는 모든 빗방울과 같은 –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떨어진 빗방울을 포함하여 – 우주의 요소를 셀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 위에 태양이 몇 번이나 떠올랐는지도 알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세상의 광할함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다. 벤 시라가 공간의 두 차원이 수직과 수평을 언급할 때 그는 그 전체성을 나타내고자 한다(아페 3,18 참조). 우리 시대라 하더라도, 누가 우주의 크기를 측량했다고 주장할 수 있으랴?
1,3에서 “심연과 지혜를”라는 말에서 지혜를 언급하는 것은 벤 시라의 생각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파악할 수 없다면 하느님의 지혜는 더더욱 파악할 수 없다. 이 두 절의 수사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한 가지 대답만이 예상된다. 독자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듯이, 아무도 그 양이나 거리 때문에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것을 헤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고 명철한 지각도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었다”(1,4). 지혜는 우리가 그렇게 잘 알 수 없는 이 세상보다도 먼저 있던 것이기에(잠언 8,22-26 참조) 더더욱 파악할 수 없다. 지혜는 세상보다 훨씬 먼저 존재했다. 그리스어본은 지혜가 창조되었다고 말하지만, 벤 시라는 잠언 8,22에서처럼 “태어났다”, “형성되었다” 같은 덜 추상적이고 더 즉각적인 표상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수동태는 하느님의 작용을 전제한다. 주님께서 지혜를 존재케 하신 것이다. 지혜는 명철한 지각이라고도 불리는데 우주보다 먼저,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
1,6.8절에서 지혜가 어떻게 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졌는지 설명한다.
“지혜의 뿌리가 누구에게 계시되었으며
지혜의 놀라운 비밀을[업적을] 누가 알았느냐?
지극히 경외해야 할 지혜로운 이 한 분 계시니
당신의 옥좌에 앉으신 분이시다”(1,6.8).
다시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대답이 예상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떤 인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머무는 지혜의 계시에 대해 말한다(1,1). 더 정확히 말해 이 질문은 지혜의 뿌리와 그 비밀들의 계시에 관한 것이다. 지혜가 자신 안에 내밀하게 지니고 있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보인다. 그렇다면 뿌리와 비밀은 동의어가 될 것이다. 누가 숨겨져 있는 지혜의 깊은 속을 알 수 있는가? 대답은 다음 절들에서 나올 것이다.
예루살렘 현인 벤 시라도 주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미카야 예언자(1열왕 22,19)와 이사야(이사 6,1 이하)가 직관했듯이, 두렵고 높으신 그분은 천상의 당신 옥좌에 앉아 계시다. 벤 시라에게는 주님만이 지혜로운 분이시다(로마 16,27 참조). 그는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기원전 8세기에 주님의 지혜를 말했던 이사야보다(이사 31,2) 더 멀리 바라본다. 벤 시라에게는 주님만이 지혜를 충만하게 소유하시며 그분만이 지혜의 숨겨진 비밀들을 아신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초월성이 바로 그분의 통교의 원천이다. 주님은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소중한 것을 주신다. 실상,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알아보며 헤아리실 뿐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모든 일에,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 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1,9-10).
이 단락의 첫 행은 욥 28,27에서 영감을 얻는다. 욥 28장 전체는 하느님만이 지혜를 완전하게 아신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지혜를 만드셨을 때, 주님은 그 지혜를 보시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셨다. 벤 시라의 다음 구절은 지극히 중요하다. 실상, 주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지혜를 쏟아 부으셨다’는 생각은 곧바로 베드로가 성령 강림 때에 인용했던(사도 2,17) 다음의 유명한 본문을 상기시킨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요엘 3,1). 이미 이사 11,2는 주님의 영과 지혜를 연결시켰다. 이 사이의 그루터기에는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벤 시라는 더 나아간다. 그에게 지혜는 영의 질서에 속한 영적인 지혜이다.
또한 벤 시라는 주님 선물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밝힌다. 그분은 당신 지혜를 “당신의 모든 일에” 쏟아 부으셨다. 그분의 모든 업적 안에 어떤식으로 지혜가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뜻하신 질서가 들어 있다는 사상을 다시 만나게 된다(잠언 3,19-20 참조). 주님께서는 또한 당신 지혜를 “모든 살덩이에게[모든 피조물에게]” 부어 주셨다. 모든 인간이 지혜를 받는 것이다. 잠언 8,31은 지혜가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주시는 선물을 헤아리시며 지혜를 부어 주신다. 여기서 모든 지혜의 보편적 차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모세는 주님의 백성이 모두 예언자가 되기를 기원했다(민수 11,29). 요엘도 선택된 백성의 모든 사람, 남자와 여자, 자유민과 종 모두에게 영이 주어지리라고 말했다(요엘 3,1-2). 벤 시라는 더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님께서 당신 지혜를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후하게 주셨다는 말로 끝맺는다. 그리스어 사본의 대다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되어 있으나, 필자는 몇몇 사본과 시리아어본에 따라 다른 번역을 택한다.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가 원래의 본문일 가능성이 더 크고, 또 이렇게 보면 이어서 바로 주님을 경외함에 대해 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 또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탣하신 백성에 속하는 신앙인, 그분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다.
요엘과 벤 시라 사이에는 차이점이 또 한 가지 있다. 예언자는 미래를 생각했으나 현인은 주님의 선물이 이미 주어졌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벤 시라의 사상에서 몇 가지 주요한 노선을 요약해 보자. 이미 앞에서, 이 첫 단락에서 그의 숙고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라고 말했다. 첫 부분에서는(1,1-4) 창조의 차원에 머문다. 지혜는 창조 이전부터 있었고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 둘째 부분(1,6-8.10)에서 벤 시라는, 피조물에게 특히 이스라엘에게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계시에서 받은 것임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너그러이 허락해 주지않으시면 현인은 지혜를 누릴 수 없고 알 수 없다.
또 벤 시라는 성경 저자들이 다른 형태로, 다른 관점에서 말했던 것을 독창적으로 종합한다. 우리는 그가 잠언 8장, 욥 28장, 이사야서, 요엘 3,1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보았다. 현인으로서 그는 예언자들의 사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의식한 것이 아니겠는가?(24,33)
집회 1,11-20 주님을 경외함과 지혜
벤 시라의 두 번째 시는 주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또 그 경외와 지혜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벤 시라는 주님을 경외함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보여 준다.
“주님을 경외함은 영광과 자랑이요
즐거움과 환희의 화관이다.
주님을 경외함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거움과 기쁨과 장수를 허락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끝이 좋고
죽음의 날에 복을 받으리라”(1,11-13).
주님을 경외함은 축복이 넘치는 낙원이다. 벤 시라는 그 중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영예롭고 성숙한 삶을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충실한 사람은 사랑으로 자신을 내놓는 태도로 주님 앞에 있을 때, 억압을 받거나 무시를 당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자랑을 맛본다. 다음으로, 그에게는 깊고 넘치는 기쁨이 있을 뿐이다. 신앙인들의 기쁨을 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벤 시라는 이 두 번째 축복에 장수하는 세 번째 축복을 덧붙인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면 약속된 땅에서 오래 살게 되리라고 보증했다(예로 신명 4,40; 11,21). 거기서 계명 준수의 바탕이 되는 태도는 바로 주님을 경외함이다(신명 6,2). 또한 벤 시라는, 그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주님에 대한 경외가 그 자체로 이미 장수의 보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사실로 입증되는가? 벤 시라는 의인의 때 이른 죽음이라는 문제를 회피하지만, 지혜 4,7-16은 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전망이 문제의 상황을 변화시켜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벤 시라가 아는 것은 오직 주님께서 당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선조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선조들처럼 장수를 누리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으며 명성을, 축복받은 기억을 남길 것이다.
다음 절에서 벤 시라는 그가 지혜와 하느님을 경이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믿는 이들과 함께 모태에서 창조되었다.
지혜는 사람들 가운데에 영원한 기초를 세우고
그들의 자손들과 함께 존속하리라”(1,14-15).
잠언 1,7; 9,10의 유명한 격언을 반복하면서 벤 시라는 새로운 숙고를 시작한다. 여기서도 복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그것이 실상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인간 안에서 지혜의 근원 내지 시작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원숙한 지혜까지 도달하고(1,16-17.18-19), 끝맺기 전에 다시 시작한 성숙의 시간이라는 두 때를 언급한다(1,20). 표상들은 주로 농경 세계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인용된 첫 구절(1,14-15)들은 본문상의 난점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1,11-13) 집단적 차원으로 건너간다. 1,10ㄴ에서처럼 벤 시라는 주님께서 지혜를 풍부히 베풀어 주신 자기 만족을 생각하고 있다. 모든 유다인 신자는 모태에서부터 지혜를 받는다. 그리스어본은 ‘둥지와 기초’라는 표상으로 이 생각을 반복하는데, 이 둘을 서로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번역자가 잘못 읽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어 본문은 아마도 “믿는 이들과 함께, 그것은 과거에 태어났다”(1,5; 잠언 8,22ㄱ참조)였거나, 과거에 주님께서 지혜에게 믿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허락했다는 내용일 것이다. 벤시라는 선조들을, 모세와 모세 세대를 생각하고 있고, 하느님의 지혜가 그들의 후손들과 함께 거처하며 그들과 신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덧붙이며 이 생각을 보충한다(잠언 8,31참조).
“지혜의 충만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제 열매로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지혜는 그들의 온 집을 보물로 가득 채우고
제 수확으로 곳간을 채워 준다”(1,16-17).
이 두 절은 이스라엘에서 지혜의 기원을 묘사하던 것에서 그 충만한 성숙을 묘사하는 것으로 건너간다. 사용된 표상은 수확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지혜가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 주는 여러 효과로 가득 채워진다. 지혜를 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지혜가 역시 후하게 그들에게 베풀어 주는 특별한 은혜를 누린다. 그렇다면, 정확히 말해서 그 은혜는 무엇인가?
“지혜의 화관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평화와 건강을 꽃피운다.
지혜는 슬기와 명철한 지식을 비처럼 쏟아 붓고
자신을 붙드는 이들의 영광을 들어 높인다”(1,18-19).
앞의 두 절을 보충하는 이 절에서 주님을 경외함은 믿는 이들로 하여금 지혜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여러 복을 받을 수 있게 준비시킨다. 첫째로 평화 즉 안녕, 조화, 평온함, 영혼과 육체의 활력의 복이 있다. 더 나아가 복으로 받는 깊은 지식은 믿는 이들에게 그들의 삶과 활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마지막 복으로 영광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로 그렇게 채워졌음에 대한 자랑스러움(1,11 참조)과 죽음 후의 명성(44,1-15 참조)을 모두 뜻한다.
“지혜의 뿌리는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의 가지는 오래 삶이다”(1,20).
끝맺음으로 벤 시라는 앞 절들에서 나온 두 주제를 다시 취한다. 그것은 시작, 또는 그 시작의 근원(1,14 참조)과 성숙의 시간(1,16.18 참조) 이라는 주제다. 이들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다시 뿌리와 가지라는 식물의 표상을 사용한다.
1,6에서 현인은 지혜의 뿌리가 누구에게 계시되었는지 물었고, 그 대답은 오직 주님만이 그 비밀을 아신다는 것이다. 여기 1,20에서는 관점이 달라진다. 이제는 믿는이들이, 그들에게는 주님을 경외함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지혜의 선물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 지혜가 그들 안에서 성숙하게 되면 지혜는 자기를 받아들인 이들에게 오랜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오랜 삶의 복에 대해서는 이미 1,12에서 말한 바 있다.
1,1-10과 1,11-20의 두 단락 사이에 상호 보완 관계가 있다. 한편으로 지혜는 인간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갖고 계신 주님께서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그 지혜를 허락하셔야 한다. 벤 시라는 높은 데에서부터 출발한다(1,1-10). 다른 한편으로, 지혜를 받기 위하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수용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취하고 유지해야 한다. 지혜가 그들 안에 심어지고 거기에서 자라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오직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지혜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응답으로 가져다줄 복들을 체험케 될 것이다. 이 복들은 지혜가 주는 것이기도 하고 평생 흠 없이 주님을 경외해 온 삶의 보상이기도 하다(1,11-20).
집회 2,1-6 시련 속에서 주님을 경외함
2장에 담겨 있는 훈계들은 기원전 2세기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자행한 유다교 박해 직전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2마카 1,2-4). 그러나 이 훈계들은 또한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것들로서 구약 성경에서 자주 발견된다. “1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2,1-3).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시련이나 고통을 악인에 대한 주님의 징벌로 이해했다. 하지만 저자는 의인도 시련이나 고통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재난" (2,2)과 “질병과 가난" (2,5) 등을 통해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단련시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를 잘 대비하여 주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라고 가르친다.
“얘야" (2,1)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테크논’은 ‘아이’ ‘자식’ ‘아들’이라는 뜻이며 특히 친자(親子)를 가리킨다. 따라서 “얘야”라는 말은 ‘아들아”라고 옮길 수도 있지만 집회서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마치 자식처럼 여기는 제자를 부르는 칭호이다.
저자는 제자에게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1) 하고 이른다. 이는 주님께서 시련을 통해 당신을 섬기는 이들을 가르치신다는 뭇이다. 시련은 믿음을 정화하고 단련시키며(2,5) 주님을 더욱 경외하게 만들고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계기
가 된다(참조: 33,1; 44,20).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이는 시련을 거부하거나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 이겨내야 한다. 그러려면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시련에 대비하여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져야 한다’(2,2).
“네 마음을 바로잡고" (2,2)라는 명령과 “너의 길을 바로잡고”(2,6)라는 명령은 병행을 이룬다. ‘바로잡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동사 ‘유튀노’는 ‘곧게 펴다’ ‘유지하다’라는 뜻을 지녔다. 마음과 길을 바로잡으라는 말은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항구하게 유지하라는 뜻이다.
“재난"(2,2)은 의인이 겪는 개인적 불행이나 역경을 뜻하기도 하지만 신앙을 위협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 또는 그 유혹에 빠져 율법과 신앙을 버리는 악한 세태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1마카 1,10 -15 참조). 저자는 그러한 이방문화의 위협이나 일부 유대인들의 그릇된 모습 때문에 당황하지 말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확고히 다지라고 가르친다.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2,4)라는 표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시련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이들인 옵의 신앙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이러한 신앙으로 시련을 이겨낸 욥은 처음보다 더 풍성한 보상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욥의 교훈처럼 주님을 섬기는 이는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고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번창하는 길이기 때문이다(2,3).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 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2,6)는 가르침은 주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단련시키기 위해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그것을 이겨낼 힘도 함께 주신다는 뜻이다. 주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없으면 결코 시련을 이겨낼 수도, 시련 속에서 주님을 경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믿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동사 ‘피스튜오’는 본래 ‘의지하다’ ‘신뢰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을 지녔다. 이는 믿음이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에서 믿음은 과거에 체험한 주님의 구원에 근거한 것으로 그분께서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과거와 동일하게 당신 백성 또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이자 신뢰이다.
집회 2,7-11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2,11).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경외하는 이는 결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도 버림받지도 않는다(2.10). 이것이 바로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2,7).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특별히 그분의 자비를 ‘기다리고’(2,7) ‘바라야’(2,9) 한다. 저자가 묘사하는 주님의 자비는 현세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2,9). 마찬가지로 “영원한 즐거움”(2,9)과 “영원한 선물"(2,9)도 내세의 즐거움이나 상급이 아니라 현세에서 누리는 지상적 행복과 은총을 가리킨다.
“자비" (2,7; 2,9)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엘레오스’는 칠십인역에서 대부분 히브리어 ‘헤셋’을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헤셋’은 상호 계약관계에 충실한 태도와 상대에 대한 호의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헤셋’은 시나이 계약을 통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신뢰와 호의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헤셋’ 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다. 이 때문에 ‘헤셋’은 ‘사랑’ ‘자비’ ‘신의’ ‘충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후대 유대교에서 ‘헤셋’은 주님의 진노에 반대되는 그분의 지고한 사랑과 자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는 2,7.9에서처럼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저지는 주님을 ‘너그럽고 자비하신 분’(2,11)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계시해 주신 그분의 속성이기도 하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탈출 34,6).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그분의 두 가지 속성,곧 너그러움과 자비에서 나온다.
집회 2,12-14 불행한 죄인들
저지는 주님과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한 이틀을 향해 불행을 선포한다.
“12 불행하여라, 비겁한 마음과 게으른 손, 두 길을 걷는 죄인! 13 불행하여라, 믿지 않는 까닭에 나약한 마음! 그 때문에 보호를 받지 못하리라. 14 불행하여라, 인내심을 잃어버린 너희! 주님께서 벌하러 오실 때 너희는 무엇을 하리오?”(12-14).
‘비겁한 마음’(2,12)은 ‘약한 마음’ 또는 ‘소심한 마음’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시련·고통·위험·싸움 등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마음을 가리킨다. 마음이 나약하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분의 도움에 희망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경외히는 이는 삶의 역경 앞에서 나약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2,1-2.4 -5). 굳건한 미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매달려야 한다(2,3.6).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2,9)가 아니라 ‘불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게으른"(2,12)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파레이메나이스,는 ‘게으르다’ ‘나약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파리에미’의 분사이며,2,13에서는 “나약한”이라고 번역되었다. 저자는 “비겁한 마음과 게으른 손”을 가진 사람을 “두 길을 걷는 죄인" (2,12)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에서 갈등히는 일부 유대인들, 곧 주님의 백성이면서도 주님을 믿지 못하고 다른 데서 도움과 행복을 기대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길을 걷는”이라는 표현은 주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스라엘에게 엘리야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18,21).
“믿지 않는 까닭에 나약한 마음”(2,13)이라는 표현은 “비겁한 마음과 게으른 손”(2,12)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주님을 불신하는 이가 불행하다는 주장은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랴." (이사7,9)는 이사야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듯하다.
저자는 “인내심을 잃어버린"(2,14) 이들도 불행하다고 선언 다. “인내심”은 주님의 도움과 자비를 확신하면서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한 인내심이 없으면 “주님께서 벌하러 오실 때" (2,14)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구원을 위한 주님의 개입이 아니라 심판과 정벌을 위한 개입을 가리킨다. 이는 주님을 떠난 이들이 심판의 날에 이방민족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뜻이다.
집회 2,15-18 주님을 경외하는 삶
저자는 주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2,15-16). “15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길을 지킨다. 16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찾고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율법으로 만족한다”(15-16).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2,17) 그분의 가르침(말씀 · 길 · 율법)에 순종히는 것이라고 소개한다(2,15-16). 이러한 삶이 바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린다(2,16).
주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한 저자의 마지막 권고는 주님의 크신 자비를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라는 것이다(2,18). “인간의 손에 내맡기지 말고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자. 정녕 그분의 위엄이 크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도 크시다”(18). 이는 다윗이 인구조사에 대한 주님의 정벌을 선택할 때 내린 지혜로운 결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2사무 24,14)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직접 주도하시는 징벌을 선택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다윗의 본보기가 주님을 경외하는 이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준다고 생각한 듯하다. 곧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언제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손”(2,18)은 통상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가리키지만(민수 11,23; 1사무 7,13) 때로는 당신에게 불충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을 상징하기도 한다(판관 2,15).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의 능력을 가리키기도 한다(이사 66,2). 이는 창조와 구원이 모두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집회 3,1-16 부모에 대한 의무
3장은 고대 근동에서 지혜의 스승들이 사용하던 전형적인 호칭으로 시작한다. “얘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라. 그대로 실천하면 구원을 받으리라”(1절; 참조: 2,1)라는 말로 스승은 자신을 독자들의 아버지처럼 소개한다. 잠언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아들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귀를 기울여 예지를 얻어라.”(잠언 4,1) 하지만 예수 시라에게는 이러한 형식적인 호칭보다도 가족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였다.
1-16절에서 예수 시라는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 이 점에서는 십계명에 들어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룻기와 토빗기 역시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강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엄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2절)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당연히 공경하라고 명하셨다는 뜻이다. 심지어 보모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3절).
‘장수를 누리는 것’(6절)은 예수 시라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집회서에는 아직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게 장수를 누리는 것이 부모 공경에 대한 큰 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부모를 상전처럼 섬긴다.”(7절)는 말은 마치 종이 제 주인을 대하듯, 자녀들이 부모를 대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10절은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아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13절의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하는 교훈은 가정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예수 시라는 가족 간의 문제에 종교적인 관점으로 답을 제시한다. “아버지를 버리는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와 같고 자기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자는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16절)
집회 4,20-31 일상생활에서의 바른 처신
이 대목에서 예수 시라는 특별한 삶의 상황에서 지녀야 할 올바른 자세에 관하여 가르친다. 정치 세계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유다인들은 “때를 살피고 악을 경계하여 너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여라”(4,20) 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때이든지 항상 조심하라고만 충고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고 너를 파멸로 이끄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마라”(22). 그리고 필요한 때에 말을 삼가지 말아야 한다(23절). 왜냐하면 말에서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24절). “강물의 흐름”(26절)을 거스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싸워라. 주 하느님께서 네 편을 들어 싸워 주시리라” 것이 훨씬 낫다(28절). 주 하느님께서 편을 들어 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시라는 일상생활에 관한 세 가지 강한 권유로 바른 처신에 대한 교훈을 끝맺는다.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큰소리만 쳐서는 안 된다.’(29절:“오만하게 말하지 말고 게으르고 부주의하게 행동하지 마라”). ‘집안에서 사자처럼 굴지 말고 종들을 닦달해서도 안 된다.’(30절:“네 집 안에서 사자처럼 굴지 말고 종들을 닦달하지 마라. ”) 마지막 31절은 관대한 처신에 대한 가르침이다. “받아 내려고 손을 내밀지 말고 갚아야 할 때 손을 거두지 마라”(31).
집회 6,18-22 지혜를 얻기 위한 수고
“얘야, 젊을 때부터 교육을 받아라. 그래야 백발이 되어서도 지혜를 찾으리라. 밭가는 사람처럼, 씨 뿌리는 사람처럼 지혜에 다가서서 지혜의 온갖 좋은 열매를 기대하여라. 정녕 지혜를 가꾸는 데는 적은 수고를 들이나 곧 지혜의 소출을 맛보리라”(6,18-19).
여기서도 예수 시라는 “애야”라는 말로 젊은이를 부르며 그에게 젊은 시절부터 백발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지혜를 찾도록 애쓰라고 권유한다(18절). 이어서 지혜를 찾는 일을 농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19절). 마치 농사를 짓듯, 지혜를 찾으려면 수고를 들여야 하지만 그 결과는 큰 소출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벤 시라는 젊은이들을 향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배움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런 가운데 괴로움도 자주 겪게 된다. 다가올 수확을 아직 전혀 볼 수 없으면서 밭을 가는 농부처럼, 결실이 아직 식탁에 올라와 있지 않지만 씨를 뿌리는 사람처럼, 젊은 제자는 현인이 그에게 보증해 주는대로 노력을 쏟아 마치고 나면 풍부한 지식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만으로 수고스런 일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야고보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비유를 사용하여 “참고 기다리십시오”(야고 5,7)하고 말할 것이다.
“무지한 자들에게 지혜는 얼마나 어려운가! 미련한 자는 지혜 안에 머무를 수 없다.
이런 자에게 지혜는 무거운 들돌 같아서 이내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다.
지혜는 이름 그대로 지혜이니 많은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는다”(6,20-22).
미련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무거운 들돌 같으므로 쉽게 떨어뜨릴 수도 있다(21절). 많은 이가 맹목적으로 항구하기를 포기한다. 그들은 즉시 드러나는 결과를 보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엄격한 교육은 부담스러워 그것을 거부한다. 근본적으로, 히브리어 단어 무사르는 이미 명확하게 이를 말해 준다. 명사로서 그 단어는 ‘교육, 가르침, 훈육’을 뜻하지만, 과거분사로서는 ‘거부당했음’을 뜻한다.
집회 6,23-31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임
“얘야, 들어라, 내 의견을 받아들이고 내 충고를 거부하지 마라.
네 두 발을 지혜의 차꼬에 밀어 넣고 네 목을 지혜의 큰칼에 밀어 넣어라.
어깨를 낮추어 지혜를 짊어지고 지혜의 사슬을 귀찮게 여기지 마라“(6,23-25)
지혜로운 이는 모름지기 있는 힘을 다하여 지혜를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24-27절). 벤 시라는 더 놀라운 표상들을 사용한다. 처음 보기에 그리고 외관상, 제자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새처럼 갇히고 행동이 불편한 짐바리 짐승처럼 되어 예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진지한 배움에는 그런 면이 있다. “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는 것이 사나이에게 좋다네”(아가 3,27). 그러나 배우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그 수고를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 청하지 않는다면 참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을 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온순해져야 함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데 달려 있다. 주님과 계약을 맺는 것은 이미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호세 11,4) 끌어 당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너는[나는](마소라 본문은 “너는”이지만 가톨릭 공용<성경>은 본문을 수정하여 “나는”으로 읽었다:역주) 오래 전에 네 멍에를 부러뜨리고 그 줄을 끊었다”(예레 2,20)라고 고발한다. 기원후 1세기의 한 라삐는 “토라의 멍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기존 권력의 멍에와 현세의 근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무엇의 지배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가? 벤 시라는 자신의 학교를 열면서, 지혜에 관해 다시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목에 멍에를 씌우고 그 무게를 져라. 그것은 찾는 이에게 가까이 있고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는 이는 그것을 발견한다. 나 자신이 얼마나 적은 노력을 기울여 큰 안식을 얻게 되었는지 너희 눈으로 눈여겨 보아라”(51,26-27). 스스로 그러한 고행을 받아들인 그의 모범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를 마음을 갖게 해야 할 것이다. 무거운 짐처럼 보였던 것이 가르침이라는 것,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결국 큰 안식을 가져다준다. 예수님도 이러한 생각을 되풀이하실 것이지만, 벤 시라가 지혜에 대해 말했던 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실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이러한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벤 시라와 같은 지혜의 스승을 능가함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지혜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목숨을 다 바쳐 지혜에 다가서고
온 힘을 다해 지혜의 길을 지켜라.
찾고 구하여라, 그러면 지혜가 너에게 알려지리라.
지혜를 얻으면 놓치지 마라.
마침내 너는 지혜의 안식을 찾고
지혜는 너에게 기쁨이 되어 주리라”(6,26-28).
벤 시라는 다시 새로운 표상들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제자는 마치 지혜를 사냥하러 나서는 사람과 같다. 그 앞의 절들에서 그는 마치 한 자리에 붙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냥꾼의 민첩함과 끈질김을 본받아야 한다. 추격당하는 새끼 암사슴처럼 지혜는 그의 앞에서 도망친다. 암사슴이 재빨리 도망치는 그 땅이 아무리 거칠어도 상관없다. 쫓아가라! 너는 그것을 찾아낼 것이고 결국 붙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꼭 붙잡고 놓치지 마라!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온순함만이 아니라 진취적 정신과 항구함도 필요하다. 사냥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냥꾼은, 그가 잡은 짐승으로 훌륭한 음식을 먹을 즐겁고 편안한 저녁식사를 마음속에서 미리 맛본다. 지혜를 붙잡아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게 될 때까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혜의 차꼬는 너에게 든든한 보호막이 되고
그의 큰칼은 영광의 옷이 되리라.
지혜의 멍에는 금장식이고
그의 사슬은 자주색 끈이다.
너는 지혜를 영광의 옷으로 입고
지혜를 기쁨의 왕관으로 쓰리라”(6,29-31).
이 단락을 끝맺기 위하여 벤 시라는 23-25절에서 사용되었던 차꼬와 멍에의 표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앞에서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들이, 처음에 그 괴로움을 견디었던 사람에게는 이제 영예와 영광이 된다. 전에는 차꼬였던 것이 이제는 보호막이 되고, 멍에는 머리 위의 금장식이 되며, 멍에를 고정시켰던 사슬은 자주색 끈이 된다. 자주색은 다른 장신구들과 함께, 그것을 지닌 사람이 임금 또는 사제임을 표시해 주는 드문 색깔이다.
벤 시라가 제안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젊은 제자는 스승이 묘사한 엄한 교육과 고된 훈련에 보상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집회 6,32-37 네가 원하면…
“얘야, 네가 원하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마음을 쏟으면 현명하게 될 수 있다.
듣기를 좋아하면 이해를 얻고
귀를 기울이면 지혜롭게 되리라”(6,32-33).
표상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제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충실하고 꾸준한 노력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실천해야 할 첫 번째 규칙은 들음이다. 들음은 온순함, 주의를 기울임, 복종을 내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도 지혜는 무엇보다도 말을 통해 전달된다.
“원로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서라.
그들의 지혜에 너 자신을 맡겨라.
하느님에 관한 온갖 담화를 즐겨 듣고
지혜로운 금언이 너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지각 있는 이를 보거든 이른 새벽부터 그를 찾아다니며
너의 발에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려라”(6,34-36).
다른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아 경험이 풍부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은 그들의 지혜를 배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은 연장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 가운데에서도 유능한 사람들을 더 찾게 된다. 고대의 지혜에서 노인들의 지혜는 그들이 말할 때에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숙고나 묵상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단순한 금언이 아니라 예컨대 욥기와 같은 긴 숙고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혜의 가르침일 수도 있었다. 오늘날이라면 듣는 이들에게 숙고하고 자신의 의견을 갖도록 하는 강좌, 수업, 세미나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젊은이는 스승을 택하는 데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다. 스승은 그의 지적 발달을 동반하며, 제자는 스승의 지도 아래 처음으로 연구를 하고 첫 저서를 쓰게 될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스승을 찾아가라는 벤 시라의 초대는 오늘날의 이와 같은 실제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벤 시라 자신도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봉사를 했다(51,23-30 참조).
“주님의 법령을 되새기고
언제나 그분의 계명을 묵상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을 든든히 잡아 주시고 갈망하는
지혜를 너에게 주시리라”(6,37).
벤 시라는 여러 차례,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주님을 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조언자를 택해야 할 때 맨 먼저 할 일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문의하는 것이다. 벤 시라는 그의 설명의 마지막에서야 이를 강조할 것이지만(37,15), 여기도 그 말을 하고 있다. 같은 노선에서, 병든 이는 의사를 불러어야 하지만 또한 주님께 기도하고 기분과 화해해야 한다(38,1-15). 율법 학자의 경우에 그는 그의 일을 하지만 또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39,1-11).
이 절의 첫 부분을 번역할 때 다른 이들과 함께 히브리어 본문과 시리아어본을 따랐다. 독자는 이미 벤 시라에게 주님을 경외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1,11-20 주해 참조). 그것은 바로 주님 앞에서 온순과 경청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주님의 계명들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며 실천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을 찾는 이유는 벤 시라가 그의 책 첫 장에서부터 이미 설명해 놓았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이 그분이기 때문이다(1,10).
집회 10,19-11,6 가난한 사람의 지혜
9,16에서 벤 시라는 “의로운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주님 경외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아라”고 말한다. 이로써 거짓된 영예와 참된 영예에 대해 긴 설명을 시작한다. 그가 교만에서 시작하여 거짓된 영예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민족들의 통치와 관련해서였다(9,17-10,18). 좋은 통치자도 있고 나쁜 통치자도 있지만, 어떤 경우이든 “세상의 권력은 주님 손에 달려 있다”(10,4). 나쁜 통치자에 대하여 벤 시라는 “오만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혐오스럽고 불의는 둘 다에게 역겹다”(10,78)고 선언한다. 인간은 “먼지와 재”이므로(10,9; 참조 창세 18,27; 욥 42,6) 인간의 오만은 본성에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오만한 통치자들의 권좌를 무너뜨리시고 그들의 자리에 양순한 자들을 앉히심으로써(10,14) 오만을 벌하신다. 저자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이 분석의 결론은, “오만은 사람들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0,18). 이러한 부정적 설명에 이어 벤 시라는 대조되는 긍정적 설명을 제시한다(10,19-11,6). 이것이 이제 읽을 본문인데, 여기에서는 카이로의 두 사본으로 알려진 히브리어 원문을 기초로 할 것이다(설명에 필요한 경우 외에는 가능하면 그리스어본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 공용 <성경>의 번역을 따랐다.
즉시 벤 시라는 일반 원칙을 세운다.
“어떤 후손이 영예로운가? 인간의 후손이다.
어떤 후손이 영예로운가?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다.
어떤 후손이 치욕스러운가? 인간의 후손이다.
어떤 후손이 치욕스러운가?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다”(10,19).
우리 지혜의 스승에게, 영예로운 이들은 오직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를 드러내는 이들이다(1,25-27 참조).
집회 10,20-29 사회 질서의 참된 기준: 주님을 두려워함
“형제들 가운데에는 그 지도자가 영예롭고
주님의 눈에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이 영예롭다.
개종자와 이방인과 가난한 이
그들의 자랑거리는 주님을 경외함이다.
지각 있는 사람을 가난하다 하여 멸시하는 일은 의롭지 않고
죄 많은 인간을 존경하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
고관과 판관과 권력가는 존경을 받겠으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주님을 경외하는 이보다는 높지 못하다.
자유민이 지혜로운 종을 섬겨도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불평하지 않으리라”(10,20.22-25).
벤 시라 시대에는 민주주의적 사고가 중동에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굳이 필요할까? 예루살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전쟁과 위기 속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로 넘어 갔다. 권력에 기초하고 권력을 쥔 사람을, 즉 왕실의 맏아들과 그의 편인 사람들을 존경하는 사회 질서, 이것이 첫 절과 넷째 절이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서 배제된 이들 즉 외국인들, 가난한 이들, 종들도 있다. 그들의 영광은 주님을 경외함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와 슬기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소외된 이들을 섬기고, 슬기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는 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절과 마지막 절은 바로 그러한 대조를 말한다. 그래서 벤 시라는 이 연의 한 가운데에 근본적인 계명을 배치시켰다. 억압자는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 가난하고 지각 있는 사람이 무시당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영예의 문제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함이다. 주님을 경외함이 외국인, 가난한 이, 사회 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이를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일할 때 재간을 부리지 말고
재난을 당할 때 허세를 부리지 마라.
온갖 것을 갖춘 노동자가
먹을 것도 없이 허세를 부리는 건달보다 낫다.
얘야, 너 자신을 겸손하게 들어 높이되
너에게 걸맞게 자신을 올바로 평가하여라.
자신을 거슬러 범죄하는 자를 누가 옹호해 주겠느냐?
자신의 삶을 수치스럽게 하는 자를 누가 존경하겠느냐?”(10,26-29).
이 절들에서 벤 시라는 앞 단락에서 제시했던 일반적인 가르침을 제자에게 적용시킨다. 거기에서 두 가지 계명을 도출한다.
첫째 계명은 부정문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일을 할 뿐인 때에 지혜로운 사람인양 내세울 필요도 없고, 먹고 살 것도 없는데 지혜를 자랑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인 척하는 노동자나 상인은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38,24이하 참조),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지혜로운 척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둘째 계명은 긍정문으로 되어 있다. 벤 시가라 다시 직접적으로 “애야!”하며 제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사실도 이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해 준다. 자신의 참된 가치에 따라 겸손하게 자신을 평가하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반대쪽 올가미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 신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는 한도를 넘지 말고, 지나치게 스스로 자랑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비굴해지지도 말아야 한다.
주님을 경외함이 권력 없는 이의 자랑이라면, 그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지나침이 없이 올바로 자신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집회 10,30-11,6 다른 이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일할 때 재간을 부리지 말고
재난을 당할 때 허세를 부리지 마라.
온갖 것을 갖춘 노동자가
먹을 것도 없이 허세를 부리는 건달보다 낫다.
얘야, 너 자신을 겸손하게 들어 높이되
너에게 걸맞게 자신을 올바로 평가하여라.
자신을 거슬러 범죄하는 자를 누가 옹호해 주겠느냐?
자신의 삶을 수치스럽게 하는 자를 누가 존경하겠느냐?”(10,26-29)
이 절들에서 벤 시라는 앞 단락에서 제시했던 일반적인 가르침을 제자에게 적용시킨다. 거기에서 두 가지 계명을 도출한다.
첫째 계명은 부정문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일을 할 뿐인 때에 지혜로운 사람인양 내세울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인 척하는 노동자나 상인은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38,24이하 참조),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지혜로운 척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둘째 계명은 긍정문으로 되어있다. 벤 시라가 다시 직접적으로 “얘야!”하며 제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사실도 이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해 준다. 자신의 참된 가치에 따라 겸손하게 자신을 평가하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반대쪽 올가미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 신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는 한도를 넘지 말고, 지나치게 스스로 자랑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비굴해지지도 말아야 한다.
주님을 경외함이 권력 없는 이의 자랑이라면, 그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지나침이 없이 올바로 자신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집회 10,30-11,6 다른 이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가난한 이는 자기 슬기로 존경받고
부유한 자는 자기 재물로 존경받는다.
가난하면서도 존경을 받는 이가 부유할 때는 얼마나 더 존경을 받겠느냐?
부유하면서도 경멸을 받는 자가 가난할 때는 얼마나 더 경멸을 받겠느냐?
비천한 이의 지혜는 그의 머리를 들어 높이고
그를 높은 사람들 가운데에 앉힌다”(10,30-11,1).
코헬렛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조그만 성읍이 있었는데 막강한 임금이 거기로 진군해 와서 그곳을 포위하고 거대한 공격 보루를 구축하였다. 거기에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지혜로 성읍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였다. “지혜는 힘보다 낫다.” 그러나 가난한 이의 지혜는 멸시당하고 그의 말은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다”(코헬 9,14-16).
벤 시라는 더 낙관적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자가 말하면 모두 잠잠하고
그가 하는 말을 구름에까지 치켜 올린다.
가난한 이가 말하면 사람들은 “저자는 누구냐?” 하고
그가 비틀거리면 그를 밀어뜨린다”(13,23).
지금 풀이하는 본문에서(10,30-11,1) 벤 시라는, 재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중받는 부자들과 함께 슬기와 지혜로 존경받는 가난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이 통찰력과 함께 재산까지 가졌더라면 얼마나 더 존경을 받았을까 묻는다. 그것은 영예의 절정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부자가, 부유하기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재산의 출처가 의심스럽다거나 재산을 악용하기 때문에 멸시를 받는다면, 그가 가난하게 될 때에는 얼마나 멸시를 받겠는가? 여기에서 벤 시라는 사회 질서의 뒤바뀜을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의 설명이 끝나는 11,4ㄷ-6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어쨌든, 벤 시라에게 지혜는 가난한 이에게 높은 품위를 주고 이 세상의 부자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암시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벤 시라가 넉넉지 못한 계층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를 포함하여 역사의 모든 시대에는, 가진 것은 없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한 중대한 선택에 관하여 통치자들의 의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말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혐오하지 마라.
꿀벌은 날짐승 가운데 작지만
그가 만든 것은 단것 중에 으뜸이다.
좋은 옷을 입었다고 뽐내지 말고
영광을 받을 때 자신을 높이지 마라”(11,2-4).
사회 계층이 뒤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아무도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 편이 낫다. 멋진 모습의 부자도 낡고 가난한 옷도 비관적인 불쌍한 사람도, 이 세 절의 중심에 들어 있는 꿀벌의 비유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잠언 6,8의 그리스어 번역에는 게으른 사람에 관한 첨가문이 있다.
“가서 꿀벌을 보아라. 얼마나 부지런하며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는지 보고 배워라.
임금이나 평민이나 건강을 위해 꿀벌이 만든 것을 사용한다.
모든 이들이 그를 찾는다. 꿀벌은 높이 여겨진다.
힘으로는 대수롭지 않지만
지혜를 존중하는 것으로 뛰어나다.”
벤 시라도 같은 생각이다. 겉모양을 본다면 꿀벌은 예컨대 독수리에 비해 보잘것없다. 그러나 벌꿀은 인간이 자연에서 모을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가장 달콤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 그도 깊은 지혜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통 속에 앉아 있던 디오게네스가 생각난다.
“좋은 옷을 입었다고 뽐내지 말고 영광을 받을 때 자신을 높이지 마라
주님의 위업은 놀랍고
그분의 위업은 사람들 눈에 감추어져 있다.
수많은 군주들이 땅바닥에 앉아야 했고
생각지도 않은 이가 왕관을 썼다.
수많은 권력가들이 심한 모욕을 당하였고
영화로운 지위에 있던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다”(11,4-6)
이 마지막 절들에서 벤 시라는 경험을 토대로 앞에서(11,2.4) 제자에게 주었던 계명들을 설명한다. 저자가 10,31에서 조심스럽게 암시했던 사회 계층의 뒤바뀜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성급히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벤 시라에게 이로한 뒤바뀜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주님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소외된 이들에게 왕관을 주시고 굳건한 권력을 가졌던 이들을 넘어지게 하시어 낮은 계층의 사람들 손에, 사회 계층의 반대쪽 끝에 있던 사람들 손에 넘겨 주신다. 마리아의 노래에서도 주님께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다”(루카 1,52; 참조 욥 12,19)라고 말하지 않는가?
집회 11,12-28 오로지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께서는, 능력이 없어 도움이 필요한 이를 비천한 처지에서 들어 올리시고 그의 머리를 높여 주신다(12-13절). 좋은 일과 궂은 일, 삶과 죽음, 가난과 부,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며 지혜와 슬기와 율법에 대한 지식 역시 주님에게서 온다(14-15절). 애를 쓰고 인색하게 굴어서 부유해진 자들은 자기 재산으로 먹고 즐기리라고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죽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지 못한다(18-19절). 따라서 주님을 신뢰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히 전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20-21절). 복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인간에게 재산을 늘려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재앙을 내리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22-25절).
28절의 “그의 자식들을 보고”라는 말은 문맥상 이해하기가 힘든 표현이다. 26-28절은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그가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심판을 받아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의 자식들을 보고” 대신에 ‘그의 마지막 날에’라고 알아듣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실제로 많은 현대 번역본들은 칠십인역보다는 히브리 말이 의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날에’ 또는 ‘그가 죽을 때에’로 옮기고 있다. 곧,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죽을 때에 이미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집회서의 번역자는 집회서에서 내세에 대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자식들을 보고”라고 옮긴 것 같다.
집회 15,11-18,14 책임 있는 자유와 주님의 자비
스켐에서 계약을 갱신할 때(여호 24장) 여호수아는 회중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하는 그 행위에서 나오는 임무와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벤 시라는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자유에 대해 숙고한 사람일텐데,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이를 숙고했을 것이다.
벤 시라는 15,11-16,14과 16,17-18,14의 두 단계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그 단락 전체를 분석하지는 않겠지만, 17,1-14는 창조 안의 인간을 묘사하는 매우 유명한 본문이므로 그 문맥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집회 15,11-16,14 자유와 응보
“주님 때문에 잘못에 떨어졌다.” “그분께서 나를 빗나가게 만드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분께는 죄인이 필요하지 않기에 인간을 악한 길로 이끄시는 일이 없는 것이다(11-12절).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는 이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자유 의지를 주셨으므로(14절)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며 자신의 탓이다. 16-17절은 “물과 불” “생명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말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한층 더 강조한다. 이 사상은 신명기 30장 19절에 거의 같은 표현으로 들어 있다. 20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지으라고 명령하시거나 허락하신 일이 없다는 사실이 거듭 강조된다.
따라서 벤 시라는 두 가지 이의에서 출발한다. 하느님께서 내 죄의 원인이고, 그분이 나를 넘어지게 하셨나? 스승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하느님은 악을 미워하시므로,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또 하느님께는 죄인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상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15,11-13). 저자는 농축된 형태로 부조리에 의한 논증을 제시한다. 그러나 곧이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슬기다.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5,14-17).
자기 죄에 대하여 책임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벤 시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한 처음의 행위로 돌아간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에게 자신의 경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인간은 무엇을 향해 갔는가? 문제는 바로 자유의지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선택이 세 번이나 상기된다.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며 그분께 순종하기를 택한다면 슬기 곧 지혜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신명기에서 이미 말했듯이(신명 10,15.19) 이 선택은 양자택일을 전제한다. 멸망하게 하는 불, 아니면 생명을 주는 물이다. 선택은 네 몫이라고 벤 시라는 제자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결과가 수반된다.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우리 행위에 대한 갚음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벤 시라는 자신의 논증을 보충하기 위하여 응보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설명한다. 분명 능력이 넘치시는 하느님께서 각자의 선택을 주의 깊게 바라보신다(15,18.20). 그들의 응보는 확실하다. 벤 시라는 자신의 경험으로도(16,1-5ㄱ), 또 이스라엘 백성의 옛 역사의 증언을 통해서도(16,5ㄴ-10) 이를 알고 있다. 그의 개인적 체험도 에제키엘의 주장과 일치한다(에제 18장). 각자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의인에게, 불경한 아들은 하나의 불행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기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의 운명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후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은 아니다. 그래서 “자녀 하나가 천 명보다 나을 수 있고 자식 없이 죽는 것이 불경한 자녀 여럿을 두는 것보다 나으리라”(16,3ㄷㄹ). 젊은 제자는 이에 대하여 숙고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누구나 제 행실에 따라 자기 몫을 얻는다”(16,14).
저자의 논증에서 모든 것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특히 그는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응보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분명한 개방성이 나타나지 않는다(특히 17,27-28 참조). 욥과 코헬렛은 지상에서의 응보가 현실에서 실제로 입증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걸려 넘어졌다. 수수께끼가 풀리기 위해서는 지혜서(지혜 3-4장)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집회 16,17-18,14 인간의 책임과 하느님의 자비
이의는 더 강해진다. 벤 시라에 따르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각자의 행동을 살피신다(15,18-19). 그러나 한없이 넓은 창조 세계에서 내가 정말로 작은 존재하면 어떻게 저 위에서 나를 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것이 무슨 중요성을 지닐 수 있는가? 내가 선을 행한다면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16,17.20-22, 히브리어 본문) 이러한 이의는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를 의문에 부치는 것이며, 악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하느님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의는 심각하다. 그래서 벤 시라는 대답하기 전에 목소리를 높인다.
“얘야, 내 말을 듣고 지식을 얻어라.
내 말에 너의 마음을 기울여라.
나는 정신을 쏟아 붓고
지식을 명확하게 전한다”(16,24-25).
이제부터 전할 가르침은 처음의 이의들에 대한 대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여러 이의에 대해 그는 더 충분하게(“쏟아 붓고”), 그러나 신중하고 분별 있게 대답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저자가 잠언 1,23에서 지혜가 사용했던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그 본문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집회 50,27도 보라). 그 자신 안에도 지혜가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일까?(24,30-34 참조)
이 다음 부분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본문이 전해지지 않아, 그리스어본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집회 16,26-17,14 창조 안의 인간
첫 이의들에 대한 대답(15,14)에서와 마찬가지로, 벤 시라는 창조주의 첫 행위로 돌아가 거기에서 몇 가지 의미를 끌어낸다. 처음에 그는 우주 특히 별이 창조된 의미를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한처음 당신의 작품들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것들을 지으실 때부터 제자리를 각각 정해 놓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작품들에게 영원한 질서를 주시고
제 영역을 세세 대대로 정해 놓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굶주리거나 지치지 않고
제구실을 그만두지도 않는다.
그들은 서로 부딪치는 일도 없고
그분의 말씀을 영원히 거역하지도 않으리라” (16,26-28).
벤 시라가 무엇보다 먼저 강조하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우주의 여러 구성 요소를 창조하실 때 각각에게 특정한 역할을 명확하게 할당해 주셨다는 점이다. 또 우주의 각 구성 요소는 지치거나 멈추지도 않고 이웃의 영역을 침입하거나 방해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충실하게 지켜 간다(바룩 3.32-35 비교).
이어지는 두 절에서(16,29-30) 벤 시라는 일시적 생명을 지닌 피조물로, 즉 주님께서 땅을 가득 채우신 식물과 “땅으로 돌아가는” 동물로 건너간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현인은 인간에 대해 말하게 된다. 인간 역시 땅에서 나와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생물 안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으시고
그들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17,1-4).
우리의 삶도 일시적이다. 그렇다. 일시적이다. 그러나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심으로써 주님은 인간을 피조물의 주인으로(창세 1,26-28 참조), 특히 동물의 주인으로 만드셨다. 동물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다. 특히 사람을 섬겨야 하는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동물의 경우가 그렇다. 인간의 삶이 덧없는 것이어도, 인간은 별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어떤 역할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그를 지상에서 당신의 모습으로, 당신의 대리자로 만드시며 그에게 권력을 주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거 혀와 눈과 귀들을 빚어 주시고
그들에게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
그들의 마음을 당신 눈으로 살피시며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신다.
그들은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며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리라”(17,6-10).
이 대목의 본문은 전수된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위의 번역은 본문상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저자의 생각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감각 기관들과 식별 기관, 즉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기관인 마음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이해력을 주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셨다. 이것은 창세 2,17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금령을 암시하기보다 아마도 양심의 소리를 암시할 것이다. 이러한 기관은 받은 이간은 홀로 내버려져 있지 않다. 주님께서 계속 그들을 지켜보신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그들에게 당신 업적을 보여 주심으로써 이를 행하신다. 그 업적은 그분 말씀에 충실하게 흠 없이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자유롭게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며 그들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도록 초대한다. 이렇게하여 인간은 업적을 통하여 발견하는 주님을 찬미하도록 부름받는다. 우주의 놀라움은 그것을 만드신 분을 찬미하도록 초대한다(시편 8편 참조). 벤 시라에게 찬미는 인간이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15,9-10; 39,14-15 참조).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판결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분께서는 “온갖 불의를 조심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17,11-14).
여기에서 벤 시라가 이스라엘이 시나이에서 체험했던, 이스라엘이 설립되던 체험을 언급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직접적으로 당신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였다. 시나이의 계시는 벤 시라에게 보편적 차원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인류 전체를 구체화한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바라보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시에서, 십계명을 통하여(탈출 20,3-17; 신명 5,7-21) 주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선을 선택하도록 자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이웃과 충돌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계명들을 주셨다. 아무도 이웃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별들처럼(16,28), 모든 인간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사명을 평화로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에 포함되어 있는 두 번대 이의에 대한 벤 시라의 응답(16,17.20.-22)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기에,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주님은 그에 맞갖은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거나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일류를 창조하신 행위로 돌아가, 현인은 그 기원이 단순히 시간적으로 머나먼 한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영원히 행하도록 결정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적 창조를 말할 수 있고, 우리에게까지 계속되는 하느님의 뜻을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주신 것을 지니게 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각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집회 17,15-18,14 회개와 자비
논박의 마지막 부분에서 벤 시라는 중요한 몇 가지 숙고를 덧붙인다.
“내가 계명을 행할 때에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16,22 히브리어 본문)라고 물었을 때 반대자는 기가 꺾인 듯했다.
이에 현인은 먼저 주님께서 사람들의 행실을, 그들의 죄를 살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도 그들의 선행을 중시하신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말한다(17,15-23). 그분은 그 선행들을 소중하게 간직하시고 선을 행한 이들에게 후에 갚아 주신다.
둘째 부분(17,24-18,,14)은 훨씬 더 길게 전개된다. 벤 시라는 여기에 스물두 절, 히브리어 알파벳 글자 수와 같은 절수를 할애한다. 이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 구절이 도입 역할을 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17,24).
그러니, 절망한 반대자는 교훈을 배울 것이다.
“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17,25-26).
여기세서 벤 시라는 토론하지 않는다. 그는 반대자에게 구체적인 입장을 취하라고, 기가 꺽이게 만드는 고민을 덮어두고 진실한 행위를 시작하라고 끈질기게 호소한다. 시간이 없고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명인 주님을 찬송하기 위해서는(17,10 참조) 살아있어야 한다. 찬양은 죽은 이들의 거처인 저승에서 올라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벤 시라는 아직 내세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본보기로서 또한 격려의 표지로 스승은 찬양을 시작한다. 이 찬가는 앞의 내용과 뒤에서 전개될 내용을 연결해 주는 말로 시작된다.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17,29)
실상, ① 인간의 비참함은 그가 사멸할 존재라는 사실에서 기인하고, 더욱이 그의 마음속에서 악을 계획한다는 데에서 온다. 그가 한계와 죄를 지닌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영원성과 정의에 대조된다(17,30-18,2).
② 주님의 업적 특히 그분 자비의 위업은, 인간이 그 업적을 행하신 분을 합당하게 찬송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찬송은 언제나 부적절하다(18,4-7).
③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도 짧다. 영원 앞에서 백 년이 과연 무엇인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내하시고 인간에게 넘치는 자비를 보여 주신다(18,8-11).
④ 주님께서는 인간 삶의 종말이 비참하다는 것을 이시고 많은 용서를 베푸신다. 이웃을, 특히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자비로워질 수 있는 인간과 달리(17,14 참조), 하느님께서는 가까이 있는 이들이나 멀리 있는 이들이나 구별 없이 모든 인간을 향해 자비를 보이신다. 그분은 목자처럼 교육자가 되어 길을 벗어난 이들을 다시 데려오신다(18,12-14).
이렇게, 벤 시라는 네 가지 숙고를 통하여 무엇보다도 다함없는 자비를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부각시킨다. 반대자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16,22 참조). 의심스런 이론의 뒤에 숨지 말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께서 그에게 열어 주시는 귀환의 길을 받아들일 것이다.
현인에게 성경의 메시지는 의심의 씨를 뿌리는 일부 이교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의미 있다. 실상 성경에 따르면 각자는 주님에게서 이 세상에서 할 어떤 역할을 받았고, 주님께서 당신 피조물의 약함을 아시니 피조물은 그에게 끊임없이 길을, 회개의 길까지도 알려 주시는 그분의 무한한 자비에 의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