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바라기 법문
9월 일요가족법회 지안큰스님 법문
大藏千函說一心(대장천함설일심)
대장경 전체가 마음 하나 설했을 뿐인데
木魚聲裏轉庭陰(목어성리전정음)
목어 소리에 뜰에 그늘이 지네
天花亂落何年事(천화난락하년사)
하늘 꽃 어지러이 지던 것 어느 해 일이던가
惟見飛檐兩兩禽(유견비첨양양금)
처마 밑에 쌍쌍이 나는 새만 보이구나
아직 더위가 남아있습니다만, 9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세월이 가고, 세월이 가면 계절도 바뀌고 그러다가 살아온 날이 많아지고... 산다는 것은 시간을 경과하면서 가는 세월 보내고 오는 세월 맞이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조 말엽에 兒庵惠藏(아암혜장 : 1772~1811)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전남 해남 대흥사는 옛날에는 대둔사라고 불렀는데 그곳에 계시던 분으로 해남 출신이십니다. 마흔 살에 일찍 돌아가신 참 아까운 스님이셨습니다. 그 당시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하고 교류를 깊게 하면서 만나고 또 정약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고 알려진 스님이에요. 이 스님이 남기신 시가 한 편 전해지는데 내가 가끔 역대 선사들의 시를 찾아서 번역해 본 적이 있는데 오늘 한 번 소개해 봅니다.
大藏千函說一心(대장천함설일심)
大藏(대장)이란 大藏經(대장경)을 말하고, 책을 보관하는 상자를 函(함)이라 합니다. 일천 상자에 들어 있는 팔만대장경 전체가 한 마디로 마음을 설해 놓은 법문이라는 말입니다. 불교의 모든 법문이 결국 마음 하나 설해 놓은 법문입니다. 부처님 법문 전체가 그렇고, 역대 선사들의 법문이나 또는 화엄종이나 천태종 등 이런 종파에 속해 있던 큰 고승들 법문의 요점은 결국 마음 하나 설해 놓은 법문이에요. 그래서 이 말을 첫구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木魚聲裏轉庭陰(목어성리전정음)
목탁 소리에 뜰의 그림자가 깃든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법문 듣고 나름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세월은 점점 흘러가고, 앞서 말했지만 40살에 돌아가셨으니까 이 시는 30대에 지은 시로 보여집니다.
天花亂落何年事(천화난락하년사)
봄꽃이 어지럽게 날리던 그때가 언제 일인가? 어제가 봄 같았는데 앞서 말했듯이 벌써 지금 가을이잖아요. 세월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자연을 느끼는 사람의 정서도 달라지지요.
惟見飛檐兩兩禽(유견비첨양양금)
兩兩(양양)이란 ‘한 쌍씩’이라는 뜻으로 마지막 구는 처마 밑에 새만 몇 마리 쌍쌍이 날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은연중에 불교의 유심론의 대의를 설해 놓았고, 또 한편으로는 인생무상을 읊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이 스님께서 다산의 초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많은 대회를 나눈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이 이 스님의 비문을 직접 썼는데, 碑銘(비명)에서 아암을 性理(성리)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 없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또 강진에 가면 백련사라는 절이 있는데, 옆에 다산초당이 있어서 나도 서너 번 방문했어요. 그곳에 녹차가 자연적으로 많이 생산됐습니다. 그래서 兒庵惠藏(아암혜장)스님도 다산에게 제다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초익(草衣: 1786~1866)선사는 불교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茶聖(다성)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초의선사도 다산 정약용에게 제다법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는 마음 하나를 설하는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 하나로 다 오고 가는 것이고, 마음 하나로 이 일 저 일을 하는 것이고, 마음 하나로 말을 하는 것이고, 마음 하나로 생각을 하는 것이고, 마음 하나로 행동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華嚴經(화엄경)』에서는 전체 법문 대의를 一心法(일심법) 혹은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내세워서 유심 법문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우리가 배워야 되는 공부의 과제, 닦아야 될 수행의 과제예요. 우리는 ‘내 마음이 이미 제대로 되어 있다.’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의지를 키워서 무엇을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지요. 말하자면 마음을 가지고 밖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지만, 마음을 선가(禪家)에서 쓰는 말로 해보자면 回光返照(회광반조)를 잘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마음을 잘 비추어 보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佛緣(불연) - 불교와의 인연이라는 것이 있어요. 여러 가지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있지요. 사람의 인연이 참 묘합니다. 어제 비가 오는데도 절에 와 우비를 입고 풀을 베어준 설거사 경우를 생각해 보면 원효 스님의 후손입니다. 薛(설)씨는 아시다시피 원효 스님이 먼 조상이에요. 원효스님과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 아닙니까? 그래서 역대로 薛(설)씨들은 대부분 불교를 독실히 믿어온 분들이 많습니다. 조상이 인연으로 불심이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지요. 물온 불연의 계기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떻든 불자들에게 있어서 佛緣(불연)을 배우고 佛緣(불연)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 교리가 - 알고 계시겠지만 – 인연법이 주축입니다. 다른 말로는 緣起法(연기법)이라고도 합니다. 緣起法(연기법), 因緣法(인연법)! 쉽게 말하면,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은 緣起(연기)적인 관계로 살아가고 인연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인연이라는 게 묘해요. 인연도 깨닫는 것입니다. 흔히 배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 송나라 때입니다. 송나라 때는 거사불교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당나라 때도 있었으나 송나라 때 와서 거사불교가 크게 일어났어요. 요즘 부산 포교원에 가서 『書狀(서장)』 강의를 매주 한 번씩 하는데 『書狀(서장)』 내용이 대혜 스님이라는 당시의 간화선을 완성하신 큰 스님이 계셨는데 요즘 벼슬로 말하면 장차관급인 당시 고위 사대부들을 상대해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입니다. 『書狀(서장)』이란 말이 편지라는 뜻이에요.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이 42명이 있습니다만 그 중 두 사람은 스님이고 나머지 40명은 사대부들입니다. 전에 한 번 소개했습니다만 거기에는 劉彦忠(유언충)이라는 朱子(주자)의 장인도 있고, 劉彦忠(유언충)의 형이 劉彦修(유언수)인데 朱子(주자)가 어렸을 때 글을 배웠던 스승입니다. 이 두 사람에 쓴 편지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송나라 때 蘇東坡(소동파)는 유명한 悟道人(오도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뿐 아니라 많은 거사들이 불법을 통달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승상까지 지낸 無盡居士 張商英(무진거사 장상영 : ?-1122)이라는 유명한 분이 있었어요. 이분이 어떻게 佛緣(불연)을 맺게 되었는가 참 묘해요. 이 이야기가 『緇門(치문)』에도 소개되고 『사집』에도 가끔 소개됩니다.
당시 조정에서 불교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대표적인 인물이 歐陽修(구양수)로 불교를 왕명으로 금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도 排佛論(배불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와 반대로 排佛論(배불론)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장상영도 처음엔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불교를 금지시키야 한다는 배불론에 뜻을 같이 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불교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어느 절에 가서 불단에 모셔놓은 불경을 보고 반감이 생겼다고 합니다.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의 서적보다 불교의 경전을 너무 호화스럽게 만들고 또 보지도 않으면서 모셔만 두는 것에 못마땅한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보지도 않는 책을 고급스럽고 호화롭게 만들어 모셔만 두는 것 때문에 불교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배척하자는 歐陽修(구양수)의 주장에 동조를 하기로 했어요. 그러면서 부처는 없다 라는 無佛論(무불론)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풀묵을 챙겨 놓고 상소문을 쓰려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글을 지어려고 앉아 있었다 합니다. 생각이 쉬이 떠오르지 않아 글을 쓰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모먕입니다.
이때 부인 상(向)씨가 대감이 취침에 들지 않고 늦도록 서재에 불을 밝혀 놓고 있는 것을 보고 건너왔습니다.
“밤이 깊은데 무얼 하느라 취침을 안 하십니까?”
“글을 하나 쓰려 하는데 잘되지 않소.”
“무슨 글을 쓰려고 그러십니까?”
“불교가 못마땅해 부처 필요 없다는 무불론(無佛論)을 지을 참이었소.”
“없으면 그만이지 글을 써서 없다 할 것이 있습니까? 대감이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불교 경전이라도 한 번 읽어보았습니까?”
부인의 말을 듣고 대감은 글쓰기를 포기하고 취침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인근에 있는 사찰에 사람을 보내 경전을 빌려오게 했습니다. 어젯밤 부인의 말대로 불교 경전을 한 구절이라도 살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빌려온 경전이 『維摩經(유마경)』이었습니다. 『維摩經(유마경)』은 유마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으로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병문을 가 서로 문답하는 <문수보살문질품>과 <입불이법무품>이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설해져 있었습니다.
<문수보살문질품>은 문수보살이 유마거사를 찾아가서 문병하는 내용입니다. 『維摩經(유마경)』에는 부처님께서 유마거사 문병을 가라고 했더니, 부처님의 10대 제자나 보살들이 전부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문수보살에게 문병 가도록 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문수보살문질품>입니다. 여기 보면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문병을 하면서 “거사여, 병을 앓고 있다는데 몸이 아픈 겁니까? 마음이 아픈 겁니까? 4대 중에 어디에 병이 걸렸습니까?”라고 묻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유마거사가 “나는 몸에 병이 걸린 것도 아니고, 마음에 병이 걸린 것도 아니요, 지수화풍의 4대(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에 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無盡居士 張商英(무진거사 장상영)이 이 대목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하였습니다. 불경이 참으로 심오하다는 걸 늦게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무불론을 지으려던 마음을 바꾸어 『호법론(護法論)』을 지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좋은 일을 참 많이 합니다. 여러 스님들을 찾아다닙니다. 절에 시주를 참 많이 해요. 그리고 兜率 從悅(도솔 종열)선사 같은 분들을 찾아가 도를 배웁니다. 兜率 從悅(도솔 종열)선사는 寶峰克文(보봉극문) 스님의 제자인데 이런 스님을 찾아다니면서 나중에 悟道頌(오도송)도 짓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부인의 성이 向(상)씨인데 向은 방향을 나타낼 때는 ‘향’으로 읽지만 성을 나타낼 때는 ‘상’으로 읽습니다. 부인 向(상)씨와 만난 인연에도 참 묘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거사가 19세 때 과거를 보러 가다 어느 주막집에 들려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 주막집 주인이 상(向)씨였습니다. 주인이 전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내일 장차 정승이 될 사람이 찾아올 것이니 잘 대접하라는 것이었어요. 이튿날 주인은 어떤 객이 올런지 궁금하여 종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드디어 객이 한 사람 찾아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초라한 시골 선비 차림이었고 몹시 궁색해 보였습니다. 이 객이 하룻밤 묵기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간밤의 꿈이 생각나 호의를 가지고 객을 맞아들이고 후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거사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할 때 주인이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후한 대접에 고마움을 느낀 거사가 엉겁결에 들어드릴 테니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인이 12살짜리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을 나오게 해 자기 딸과 결혼을 약속해 달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사가 보니 매우 예쁜 소녀라 보는 순간 마음이 끌렸습니다. 거사는 다음에 다시 찾아와 꼭 따님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한 후 다시 찾아와 상씨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無盡居士 張商英(무진거사 장상영)이 불교를 옹호하는 護法論(호법론)을 써서 불교를 보호한 큰 인물로 역사적인 자취를 남겼다고 전합니다.
요즈음 매일 만보 걷기를 한다고 극락암 반야암 갈림길인 삼거리까지 산보를 하는데 오늘 아침에도 손상좌 여환이와 걷었습니다. 여환이가 휴대폰을 꺼내 “스님 법문하는 것 한번 들려드릴까요?” 하고 들려 주었는데 요즘은 1분 정도 하는 것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옛날 마산 있을 땐데 러시아를 한 번 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한 분들이 몇 명 모여서 1주일 동안 같이 갔다. 그 때 모스크바에서 상뜨페테르부르크까지 기차 타고 가다가 느낀 해바라기 얘기를 법문에서 한 적이 있어요. 이것을 여환이가 들려 주었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들어보니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해바라기 밭만 나타나는 곳이 있어요. 철로 변이 전부 평원처럼 되어 있는데, 전부 해바라기밭이었습니다. 해바라기는 원래 해를 보고 있다고 하여 해바라기라 하지 않습니까? 햇빛이 쨍쨍 나니까 전부 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2~3분 더 달리니 구름을 끼어 햇빛이 숨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해를 보고 있던 해바라기들이 제멋대로 해를 안 보고 있고 방향이 전부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걸 비유해서 해바라기가 구름이 끼면 해를 바로 안 보더라 라는 말을 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비유하냐? 우리가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이 있어야 자기 생활이 바르게 정리가 됩니다. 부처님을 향해서 해바라기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불심이 떨어지고 부처님 생각이 멀어지면 해바라기가 제멋대로 꽃송이가 뒤틀리듯이 엉망진창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불자들도 부처님을 향한 향일성이 해바라기가 해를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법문 중에 한마디 한 것인데 요즘은 그것만 딱 따가지고 한 30여 초 동안 이야기하는 것이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우리도 일요법회를 통해서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법회에 참석한 거 아닙니까? 번뇌망상은 신심이 없어집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신심이고 해를 향하다가 제 마음대로 방향이 뒤틀어진 것은 신심이 떨어진 것입니다. 신심을 잃지 말고 부처님 법을 잘 믿고 잘 따라 행하는 불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법문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_()_
고맙습니다 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
감동입니다🙏🙏🙏
태양 향한 해바라기 처럼
신심을 잃지 않고 부처님 법 믿고
행하는 불자가 되겠습니다
🙏🙏🙏
_(((성불하십시요)))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아직도 독일에 계시나봅니다.
바쁜 와중에도 귀한 법문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해바라기처럼 부처님을 일심으로 믿고 따르겠습니다.
엊그제 와서 지금 시차 때문에 헤롱헤롱 중입니다
독일에서는 예쁜 간판들을 찍어보았습니다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