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돼지 갈빗살*에 대한 몽상 외 1편
- 프란시스 베이컨에게
이성렬
강남 양식집 <오딧세이>의 일렁이는 불빛에 잠겨
고대 로마 범선의 용골을 닮은 흰 뼈들 사이에
물갈퀴처럼 돋은 붉은 고깃점을 들여다볼 때에,
나의 슬픔에는 한 자락의 깊숙한 근원이 없음을
통지한 살점들의 탄식이 하나씩 육신을 벗고
은빛 인력거에 실려, 금이빨도 녹인다는 왕수가
가득한 지하동굴로 돌이킬 수 없이 출항할 때에
머나먼 지평선으로 멸종된 유인원의 굵은
척추를 장착한 유골들이 어느 순간 몹시도
순진무구했던 이노센트 10세**의 교황복을 입고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에서 일어서는 지난 밤
꿈속의 느린 장면을 떠올리기도 끔찍하거늘,
모래시계에 넣은 나의 손가락뼈 하나가 시간의
모래알들에 마모되어 천 년 후 종말의 버튼으로
태어나는 백일몽마저 벗어버리기 힘겹거늘
그러나 돼지의 얇고 쫀득쫀득한 뱃살을 포크로
꾹꾹 찌르는, 건너편에 앉은 나의 귀여운 그대여
그 시간의 잔해들을 이제 안식처로 보내지 않고
날파리들이 들끓는 연옥에 남기자면 어쩌란 말이냐
수십조 가닥 염색체의 고단한 나선들을 풀지 않고
그 오랜 매듭들의 뒤틀린 장력을 한 칼에 끊어
헐지도 않고, 문밖 뜨거운 불판으로 걸어 나가자면
*baby pork ribs: 양식당에서 흔히 주문할 수 있는 요리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제목 <Study After Vela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에서 가져 옴
식물의 사생활 8
-그레고르 수사修士의 유전학 교실
중세의 어느 흐린 가을날, 아무리 기도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죄상들에 낙심한 그레고르 수사의 긴 묵상 끝자락에, 콩깍지들의 부르짖음이 광야로부터 들려왔다. 그 야생식물은 먹을 수 없는, 딱딱하고 쭈글쭈글한 씨앗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었다. 오직 세상에 유익하기만을 소망하는, 볼품없는 콩깍지들의 애원에 깊이 공감한 그레고르 수사는 잠을 줄여가며 식물의 유전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도 끝에 씨앗의 양분을 모두 흡수하여, 먹을 수 있는 부드럽고 탐스런 깍지를 가진 완두를 만들었지만, 그 비밀을 오직 들판의 풀꽃들에게만 강의했다. 그레고르 수사는 그 깍지완두에게 ‘눈 속의 완두*’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씨앗 없이 전해져 온 식물의 내력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다만, 한겨울 눈보라에 묻힌 작은 들꽃들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snow p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