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18,1-15; 마태 8,5-17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하반기가 시작되었네요, 빠르죠? 나머지 절반도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기쁜 날들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1독서는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에 이콘 나눠드리며 말씀드렸던 바로 그 장면인데요,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대접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나리”라고 부르는데, 본래 ‘나의 주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듬해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식에 사라가 웃고서는 안 웃었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아들 ‘이사악’의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사악’은 ‘이사악 엘’의 줄임말로서, ‘하느님께서 웃으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3주 동안 평일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 5-7장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제부터 마태오 복음 8장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서 하느님께로부터 계명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직접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세보다 위대하시다고 선언하며 시작하는 것이 산상설교입니다. 또한 모세는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 이어(마태오 복음 8-9장에서) 열 개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첫 번째 기적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어제 복음이고, 오늘 세 개의 기적 이야기를 더 들었는데,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가장 버림받은 나병 환자에서 시작해서, 이방인의 종, 여인,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그 대상이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당연히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 불러야 하는데, 자기들이 통치하던 이스라엘의 청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두 번이나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접촉이 금지되어 있던 나병 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서 치유해 주신데 이어,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종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또한 베드로의 장모에게 손을 대서 열병을 고쳐주시는데, 여성에게 손을 대 고쳐주시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치유해 달라는 청원도 없었고, 신앙 고백도 없었지만,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시고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앓는 사람을 고쳐주실 때는 모든 제약이나 규정들을 뛰어넘으십니다. 나중에는 안식일법 곧 율법을 무시한다는 얘기까지 들으며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저녁이 되자 마귀 들린 이들,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이사 53,4; 마태 8,17)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 중 한 구절입니다. 이사야서가 야훼의 종과 죄인들과의 연대를 노래했다면,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 요양병원에 가서 보례를 드리고 왔습니다. 형제님 한 분이 입원 중이신데, 부인께서 대세를 주셨습니다. 대세를 주시고 나서 남은 예식을 해 드리는 게 보례입니다. 어제 가서 보례, 영성체, 병자성사까지 다 해 드렸는데, 이 성사들을 받으시고 나서 해맑게 웃으시던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 당대에도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 만나고 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이유는, 앓는 사람들을 다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의 질병과 고통 한가운데서 그것을 당신께서 짊어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고통이 심해서 고통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곧 우리가 당신을 알아뵙지 못할 때라도, 당신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아픔과 연대해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병환 중에 계신 분들, 고통 중에 있는 모든 분들이 나의 병을, 나의 아픔을 당신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픈 분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알아 뵙고, 그분들을 섬기는 가운데 예수님을 섬기는 은총 얻기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로 인해 웃으시기를, 그리고 우리 또한 하느님 때문에 웃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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