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종합 - 불만족에서 감사로의 여정
전삼용 요셉 신부의 코멘터리 성경 통독, 창세기 마지막회.
창세기 결론 · 코멘터리 성경통독
— 의심에서 예배까지, 창세기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돌아보다 —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 쉰 장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니(히브 10,1; 콜로 2,17),
마지막으로 실체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거슬러 창세기 전체를 한눈에 담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은 선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시며
동산의 모든 나무를 거저 내주셨고, 선악과 하나만 금하셨습니다
— 인색이 아니라, 받은 모든 것이 선물임을 기억하며 되돌려 드리라는 봉헌의 초대,
곧 십일조요 작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뱀이 속삭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너희에게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세 3,1)
뱀은 하느님을 아까워하시는 무자비한 분으로 그려 놓았고, 죄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 자비를 의심하는 불만족, 바칠 것을 삼키는 움켜쥠. 그러나 하느님은 그날로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선고하시고,
숨은 두 사람에게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세 3,21).
첫 희생 제물의 가죽으로 지은 그 '케토넷', 의로움의 옷이 창세기 전체를 관통합니다
— 스스로는 의로울 수 없는 인간에게 죽음의 값으로 입혀 주시는 옷입니다.
그 옷은 믿음으로 입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그 믿음은 봉헌으로 꽃핍니다
— 아브라함은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온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고,
모리야 산에서 외아들까지 내어놓으며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것이다"(창세 22,8)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악의 집에서는 그 옷의 신비가 드러났습니다.
에사우의 옷을 입고 선 야곱에게 아버지는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창세 27,22) 하시며 축복하셨으니
— 죄인의 목소리라도 맏아들의 옷을 입으면 맏아들의 복을 받습니다. 레베카의
"얘야, 그 저주는 내가 받으마"(창세 27,13) 속에는 우리 저주를 대신 지신 분의 목소리가 미리 울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속량해 주셨고"(갈라 3,13),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그리고 얍복 강의 야곱은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매달리며,
"야곱입니다" 하고 제 실상을 정직하게 고백한 뒤에야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 기도와 정직이 옷을 참 의로움으로 여물게 합니다.
그 완성이 요셉입니다.
아버지가 입혀 준 케토넷을 입은 사랑받는 아들이 형제들에게 팔려 구덩이와 감옥까지 내려갔습니다.
형제들이 그 옷을 염소 피에 적셔 "이것이 아드님의 저고리인지 살펴보십시오"(창세 37,32) 하고 내밀었을 때
— 아들을 죽인 죄인들의 손에 쥐어진 그 피 묻은 옷이야말로
우리가 아버지 앞에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5,9).
타마르도 죽음 앞에서 성령의 증표들을 내밀며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살펴보십시오"(창세 38,25).
요셉은 죄를 짓지 않으려 겉옷마저 벗어 주고 감옥으로 내려갔으니,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내어주는 길은 죽음뿐입니다
— 예수님께서도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영을 넘겨주셨습니다(요한 19,30).
그 죽음을 지나 서른 살에 들어 올려진 요셉은 온 세상의 빵이 되었고,
파라오의 말은 카나의 성모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창세 41,55).
형제들에게 요셉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솔직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창세 42,21) 하는 고백이 터지자
양심이 깨어나고, 양심이 깨어나자 감사의 예물이 꾸려졌으며,
마침내 유다가 "이 종이 저 아이 대신 나리의 종으로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창세 44,33)
하고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솔직함에서 감사로, 감사에서 봉헌으로, 봉헌에서 남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으로
— 이것이 창세기가 가르치는 구원의 순서이며, 바로 그 순간 감추어졌던 얼굴이 열렸습니다.
"내가 요셉입니다!"(창세 45,3)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니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입니다(마태 5,8).
그리하여 창세기는 시작과 정반대의 자리에서 닫힙니다. 자비를 의심한 불만족으로 시작한 책이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 50,20)
라는 만족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구덩이도 종살이도 감옥도 다 은총이었다는 고백 앞에서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창세 50,19)
—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7).
그리고 그 믿음은 예배가 됩니다.
야곱의 장례가 어찌나 장엄했던지 그 땅 사람들이 그곳을 '아벨 미츠라임'이라 불렀듯(창세 50,11),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예배는 세상이 바라보는 표징이 됩니다. 우리의 미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 에덴에서 바쳤어야 할 빵과 포도주를 이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받아 모시는 제사,
그 이름부터가 '감사'인 성찬례. 창세기 쉰 장이 걸어온 길의 종착지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는 우리 각자의 이야기입니다. 뱀의 속삭임에 자비를 의심하던 우리가,
거저 입혀 주신 의로움의 옷을 믿음으로 받아 입고, 야곱처럼 정직하게 기도하며,
아벨처럼 아까움 없이 봉헌하고, 유다처럼 남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는 데까지 자라나
— 마침내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고 고백하며 그분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관 속의 요셉이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창세 50,25) 하고 맹세하게 했듯,
이 여정의 끝에는 반드시 찾아오시는 분, 죽음의 관을 열고 부활하신 유다 지파의 사자께서 서 계십니다.
의심에서 믿음으로, 불만족에서 감사로, 움켜쥠에서 봉헌으로, 두려움에서 예배로
— 이것이 창세기이고,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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