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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 아홉 번째 달 이십사일이었습니다. 선지자חַגַּיHaggai로부터 여호와의 책망을 전해들은 성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중단하고 있던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한 지 삼 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여호와께서 “한 사람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쌌다. 떡, 익힌 음식, 포도주, 감람기름 등 다른 음식이 희생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싼 옷자락에 닿았다. 그러면 그 음식들이 희생 제물처럼 거룩해질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거룩해 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주검을 만졌다. 부정하게 되었다. 그가 그 음식들 가운데 하나를 만졌다.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이번에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받은 즉시 모든 음식들이 부정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게 접촉된 모든 사람과 무슨 부정이든 사람을 더럽힐 만한 것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부정하다.”(레22:4b-6a)라는 율법 규정에 대해서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 율법을 삶에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은 부정했습니다. 나라도 부정했습니다. 백성도 부정했습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도 하나같이 부정했습니다. 사실, 성민 이스라엘의 생활은 완벽해 보였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죄를 흠모했습니다. 죄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죄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보다 자신의 집 꾸미는 것을 즐겼습니다. 부정했습니다. 당연히 드리는 희생제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정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燔祭로 드렸습니다. 천 천의 수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렸습니다.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양의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실제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돌아선 하나님의 마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분신分身같은 맏아들은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까지도 얼마든지 제물로 드릴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같이 그들이 드릴 수 있는 최상, 최고, 최대의 정성이었습니다. 의식적儀式的으로 볼 때는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드리는 제물에는 마음이 빠져 있었습니다. 양심이 빠져 있었습니다. 전심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빠져 있는 종교 행위는 당신에 대한 경멸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라는 증거에 따르면, ① 여호와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이 공의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는 모든 관계들 속에서 반드시 구현되어야할 사회적인 책임을 가리킵니다. ② 사랑חֶסֶדḤeseḏ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성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담겨 있는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떠난 성민 이스라엘이 때로는 범죄하고, 때로는 대적하고, 때로는 가증스럽게 여기는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에도 아주 버리지는 못하시는 이유입니다. ③ 당신과 동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겸손한 교제와 순종을 가리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허물과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라는 증거대로, 죄 사함의 은혜는 반드시 거룩하게 구별된 희생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이 녹아 있는 희생 제물을 받기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세 가지 삶의 자세는 성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삶 속에서 반드시 구현되어야할 규범입니다.
모범입니다.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윤리가 실행되지 않는 상태에서 드리는 희생 제사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완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만족을 위한 가증하고 또 불신앙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나같이 거부하는 제사 행위에 불과합니다. 어떤 용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로부터 떠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부정합니다. 그들로부터 파생하는 모든 행위들 역시 하나같이 부정합니다. 그들이 최대, 최상, 최고라고 자부自負하며 당당하게 드리고 있던 희생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가 중단했던 주전 536년부터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한 주전 520년까지 약 16년 동안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살펴보고 또 깊이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3개월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성전보다 자신의 집을 꾸미는 일에 마음을 더 많이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죄였습니다. 부정했습니다. 드리는 제사는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부정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복福보다는 화禍를 불렀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몸부림치면서 수고했지만 주어진 결과는 언제나 신통치 않았습니다. 흘린 피와 땀과 눈물에 걸 맞는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막으로부터 곡식과 나무를 완전히 마르게 만드는 뜨거운 열풍熱風이 불었습니다. 농작물의 잎이나 어린 열매 따위에 자낭균류子囊菌類가 기생하여 겉면이 흰 가루를 뿌린 것처럼 변하면서 죽게 되는 백분병白粉病이 창궐했습니다. 농작물에게 절대적인 피해를 입히는 우박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간절하게 바라던 만족과 평안과 안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초한 화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을 혹독한 고난 속으로 몰아붙이거나 아주 진멸시키려는 여호와의 징계였다기보다는 그들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서도록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때리신 사랑의 매였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진 은혜였습니다. 그들을 어떻게든 축복해서 거룩한 성전을 재건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서야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부정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을 재건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 재건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외부적인 조건이 분명히 존재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부정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시 “너희는 오늘 이전以前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학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과 “성전 지대를 쌓던 날”은 동격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세우던 날을 가리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을 따라서 귀환한 다음 처음 성전 재건을 위해 터를 놓았던 B. C. 536년을 가리킵니다.
“기억하라.”는 외침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강조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성전 터만 닦아 놓은 상태에서 십 육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때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새겨질 정도로 반복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적으로 부정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일상생활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했었던 생필품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었습니다. 오늘, 성민 이스라엘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던 죄를 회개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언제든지 임하실 수 있는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났습니다. 우선순위도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던 자신에서 여호와로 바뀌었습니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듭난 그들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3개월 정도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동시에 여호와께서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2:19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은 오랫동안 미루어지고 있던 성전 재건이 시작된 바로 그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성민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성민 이스라엘은 성전 재건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웅크린 채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그들은 그때마다 아직 성전을 재건할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전을 재건하기에는 삶이 너무나 복잡하고, 피곤하고, 시간도 없다며 뒤로 미루곤 합니다. 그랬었던 그들이 달라졌습니다.
스스로 저지른 죄를 보았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멀리 떠나 있었던 여호와께로 돌아섰습니다. 마음 중심에 여호와 한 분만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하염없이 미뤄지고 있었던 눈에 보이는 성전은 이미 완벽하게 재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으로 충만한 성전으로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장소가 바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학개와...스가야의 격려를 받는 성전 건축은 형통하였다. 마침내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전 건축을 마칠 수 있었다...다리우스 황제 제육 년 아달월 삼일이었다.”(스6:14-15)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자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성전 건축은 그야말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공개적으로 음해하고 때로는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방해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형통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께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에 담긴 뜻대로, 여호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성전 건축에 참여했었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감격에 겨웠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즐거워했습니다. 성전 건축을 미뤄두면서까지 자신을 추구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경험해봤던 은혜입니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성전 재건을 주도하던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향해서 힘을 내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권면해 주셨습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강력한 세력이 방해를 하더라도 절대로 겁을 내지 말고 일을 시작하라고 독려해주셨습니다.
당신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항상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영 곧 성령으로 함께 동행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 역시 친히 성전 재건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재건된 성전에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가득 채우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고 친히 충분하게 공급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평강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우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평강으로 그들의 마음을 파수꾼처럼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야 할 당신 백성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안녕과 번영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우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 견디기 힘든 모진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안에서 이미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에게도 성민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은혜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부어지도록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 지금도 여전히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9b),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의 성전은 벽돌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쌓아올린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구별된 저와 여러분입니다.
또 성전의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이 영광은 더 이상 유형적인 건축물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아니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을 향해서 숨김없이 또 거침없이 계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다.”(시11:4a)라고 고백했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복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되었을 때 비로소 부어지고 누릴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같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영적으로는 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날이 오면, 내가 너를 높이 세우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너를 이미 뽑아 세웠으니, 내가 너를 내 옥새로 삼겠다.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학2:23b)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현실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그들을 높이 세워주십니다. 옥새玉璽처럼 여겨주십니다.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주십니다. 기뻐하는 종으로 여겨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세밀하게 돌봐주십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쳐도 얻을 수 없었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이 세상 그 무엇을 통해서도 누릴 수 없는 그렇지만 당신 안에서는 샘물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솟구쳐 올라오는 평강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고 있으면서도 심장이 터져 물과 피가 분리될 정도로 힘겨운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진 죽음 같은 삶을 살아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연약합니다.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신 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만 몰두하게 될 때 여호와로부터 떠날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죄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 역시 높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선하고 아름다우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해 주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당신을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통로입니다.
특히,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학1:6)라는 선지자의 외침은 여전히 하나님과 이웃을 등진 채 자신의 만족 하나만을 추구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무너진 채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언제까지 외면하고만 있을 것이냐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제 그만 부정한 삶을 버리고 나와서 거룩한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절규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부는 물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되는 복된 삶,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요구되는 온갖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복된 삶, 여호와께서 옥새처럼 소중하게 여기시는 복된 삶, 하나님의 평강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나는 순간부터 부어지기 시작하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