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하는 삶
이 명 주/글무늬 문학사랑회
오래 전 이야기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는 의사요, 음악가요, 선교사였다. 노벨상 상금 전액을 나병환자 병원에 기증을 했고, 그 자신도 아프리카에서 남은 생애를 나병환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삶을 쏟았다.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는 폐허가 된 땅 위에 전쟁고아들과 중상을 입은 상이용사들이 부산통합병원에 많이 입원되어 있었다. 나의 시어머님은 부산통합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매 주 목요일마다 찾아가 위로해 주었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곤 하셨다. 어머님은내가 쓸 것 다 쓰고 남을 돕는 일은 할 수 없으며 봉사는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라며, 사람은 더불어 도우며 사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존경하고 본 받아야 할 의사가 있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카톨릭성가복지병원 내과의사 박용건 내과 과장이다. 그는 14년 전에 보령 의료봉사상, 인본주의 봉사상을 받았다. 그가 개인병원 의사로 9년쯤 되었을 때 병원 확장 공사를 하게 되었다. 기간은 2개월이었다. 그 기간 동안 봉사할 곳을 찾다가 아내의 주선으로 성가복지병원에 발을 딛게 되었다. 카톨릭 성가복지병원에 온 지 한 달 되었을 때였다. 아침마다 직원들과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데, 그날의 성경구절이 마가복음1장 17-18절 말씀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었다."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어부에게 있어 그물은 생업의 전부다.
카톨릭성가복지병원에서의 하루하루가 고달팠고, 힘겨웠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왔고, 자기를 끌어 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 박용건 박사가 부인에게 기도를 부탁했더니 3일간 철야하며 기도했는데 답을 못 들었다고 한다. 박용건 박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봉사는 젊음과 시간과 건강이 있을 때 해야한다." 그 뒤로 14년째 이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다. 18년 된 차를 몰고 다니는데 차 안에서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박용건 박사에게는 마음씨 고운 아내와 두 딸이 있다. 둘째 딸은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집에는 TV도 없다. 아내를 도와 집안 일도 하고 다림질, 청소, 설거지, 시장 보는 일까지도 아내와 같이한다.
카톨릭성가복지병원은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중환자실(요양병동), 일반치료병동, 호스피스병동(암환우들)인데 환자 대부분이 알콜중독자, 외국인 노동자, 행려환자(노숙자), 호스피스 환자들이다.
하루는 46세 된 남자(행려환자)가 눕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구급차에 실려 와 산소호흡기를 꽂고 왔다. 알콜성 간경화에다 꼬리뼈 부분이 욕창으로 살이 썩어가고, 중증 폐결핵까지 있어 너무 큰 중환자였다. 큰 병원으로 옮겨 대충 치료 받은 후 다시 데려오기로 결정 후, 수녀 간호사가 앰블런스에 환자를 태워 서울 시내에 있는 큰 병원 네 곳을 찾아 갔으나 가는 곳마다 행려환자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박용건 박사는 다시 돌아온 환자를 매일 기도하며 정성을 다해 3개월 동안 치료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욕창도, 간경화도, 결핵도 다 나았다. 하나님이 낫게 해주셨다고 모두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카톨릭성가복지병원은 선량한 분들의 마음이 담긴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종종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휴지가 떨어졌을 때, 이튿날 트럭에 휴지를 가득 싣고 병원을 찾아 오기도 했고, 약품이 모자라거나 환자들이 입을 옷이 부족할 때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고 한다.
6.25 동란 이후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계셨던 장기려 박사도 월급을 받으면 고스란히 금액 전부를 병원에 내어 놓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의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볼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뿐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누군가의 필요한 손길이 되어 기쁨을 안겨주고, 아픈 마음을 함께 보듬어주면서 남은 날들을 살게되기를 소원해본다.
오래 전 이야기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는 의사요, 음악가요, 선교사였다. 노벨상 상금 전액을 나병환자 병원에 기증을 했고, 그 자신도 아프리카에서 남은 생애를 나병환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삶을 쏟았다.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는 폐허가 된 땅 위에 전쟁고아들과 중상을 입은 상이용사들이 부산통합병원에 많이 입원되어 있었다. 나의 시어머님은 부산통합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매 주 목요일마다 찾아가 위로해 주었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곤 하셨다. 어머님은내가 쓸 것 다 쓰고 남을 돕는 일은 할 수 없으며 봉사는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라며, 사람은 더불어 도우며 사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존경하고 본 받아야 할 의사가 있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카톨릭성가복지병원 내과의사 박용건 내과 과장이다. 그는 14년 전에 보령 의료봉사상, 인본주의 봉사상을 받았다. 그가 개인병원 의사로 9년쯤 되었을 때 병원 확장 공사를 하게 되었다. 기간은 2개월이었다. 그 기간 동안 봉사할 곳을 찾다가 아내의 주선으로 성가복지병원에 발을 딛게 되었다. 카톨릭 성가복지병원에 온 지 한 달 되었을 때였다. 아침마다 직원들과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데, 그날의 성경구절이 마가복음1장 17-18절 말씀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었다."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어부에게 있어 그물은 생업의 전부다.
카톨릭성가복지병원에서의 하루하루가 고달팠고, 힘겨웠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왔고, 자기를 끌어 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 박용건 박사가 부인에게 기도를 부탁했더니 3일간 철야하며 기도했는데 답을 못 들었다고 한다. 박용건 박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봉사는 젊음과 시간과 건강이 있을 때 해야한다." 그 뒤로 14년째 이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다. 18년 된 차를 몰고 다니는데 차 안에서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박용건 박사에게는 마음씨 고운 아내와 두 딸이 있다. 둘째 딸은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집에는 TV도 없다. 아내를 도와 집안 일도 하고 다림질, 청소, 설거지, 시장 보는 일까지도 아내와 같이한다.
카톨릭성가복지병원은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중환자실(요양병동), 일반치료병동, 호스피스병동(암환우들)인데 환자 대부분이 알콜중독자, 외국인 노동자, 행려환자(노숙자), 호스피스 환자들이다.
하루는 46세 된 남자(행려환자)가 눕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구급차에 실려 와 산소호흡기를 꽂고 왔다. 알콜성 간경화에다 꼬리뼈 부분이 욕창으로 살이 썩어가고, 중증 폐결핵까지 있어 너무 큰 중환자였다. 큰 병원으로 옮겨 대충 치료 받은 후 다시 데려오기로 결정 후, 수녀 간호사가 앰블런스에 환자를 태워 서울 시내에 있는 큰 병원 네 곳을 찾아 갔으나 가는 곳마다 행려환자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박용건 박사는 다시 돌아온 환자를 매일 기도하며 정성을 다해 3개월 동안 치료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욕창도, 간경화도, 결핵도 다 나았다. 하나님이 낫게 해주셨다고 모두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카톨릭성가복지병원은 선량한 분들의 마음이 담긴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종종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휴지가 떨어졌을 때, 이튿날 트럭에 휴지를 가득 싣고 병원을 찾아 오기도 했고, 약품이 모자라거나 환자들이 입을 옷이 부족할 때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고 한다.
6.25 동란 이후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계셨던 장기려 박사도 월급을 받으면 고스란히 금액 전부를 병원에 내어 놓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의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볼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뿐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누군가의 필요한 손길이 되어 기쁨을 안겨주고, 아픈 마음을 함께 보듬어주면서 남은 날들을 살게되기를 소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