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을 구한 이스라엘 (삼상 8:1-22)
영적적용:완고한 자아
설명
본문은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정제도를 구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우리 안에도
언제든지 내가 왕노릇하려는 자아의 세력이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 먼저, 자아가 언제 살아나는가?
1. 믿음이 약화될 때
1절 "사무엘이 늙으매"
☞ 사무엘이 늙어 약해짐에서 문제가 생겼듯이 신앙이 약해질 때 자아가 출현
함을 기억하자.
2.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일 때
1절에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 육신의 세습을 통한 사사가 되므로 문제가 되었듯 우리의 행위의 기원이
영적인가 육적인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분별해야 한다.
3. 세상을 가까이 할 때
2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 브엘세바는 애굽과 근접한 최남방 한계선에 위치한 곳으로 세상을 가까이
할 때 작은 일에도 내가 나타나 시험들게 된다.
4.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을 때
3절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로 모본을 삼아야 온전해진다(히12:2-3).
5. 말씀이 없을 때
4절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 마음에 말씀으로 충만할 때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
6. 왕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
6절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 왕 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늙고 또 제 역할 못하는 아들들만 바라보았
고 또 열국의 제도만 눈에 보였다.
☆ 자아 출현의 결과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가 온다(7절).
2). 불신앙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8절).
3). 자아를 위해 살면 엄중한 결과가 온다(9-10).
4). 불필요한 부담을 해야 한다(11절).
5). 크나 큰 수고가 있다(12-13절).
6). 가장 좋은 것도 빼앗긴다(14절).
7). 수고해도 칭찬도 축복도 없다(15절).
8). 도움의 손길도 사라진다(16-17).
9). 모든 것이 괴롬이 된다(18절).
10). 심판이 따른다(19-22).
강해
오늘은 '왕을 구한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이스
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정제도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
님이신데 그들은 인간의 왕을 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영적
교훈은 자아의 문제점입니다. 자아란 나를 내세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자아처
리 문제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에서 자아가 언제 살아나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1. 믿음이 약화될 때입니다.
1절에 "사무엘이 늙으매" 그랬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사무엘의 육신의 늙음을 배경으로 신앙이 늙어서는 안됨을 교훈
하고 있습니다. 자아란 것은 믿음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지고 포기하고 참고 나가는 것은 온전히 신앙 때문입니다. 그
런데 신앙이 약해진다는 것은 바로 자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2.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일 때 자아가 나타납니다.
다시 1-2절에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
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했습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는 두 아들로 보조 사사를 삼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사라는 용어와 장자와 차자라는 용어를 사용함은 그들의 사사의 기원이
신령한 차원이 아니라 육신의 세습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율법을 보면 제사장은 세
습이 있어도 사사는 신령한 차원이었습니다. 즉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일 때 자아
가 드러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의 행위의 기원이 중요합니다. 비슷한 행위이지만 이것이 영적인가 아니면 육적
인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씩 하나씩 깨닫고
십자가에 넘겨져야 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면 요엘과 아비야의 이름의
뜻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들이 육에 속했을 때는 자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이름의 뜻을 들어 보세요.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아를 부인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하는 이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행위의 기원이 육신에 속했을 때 자
아는 나타나게 됩니다.
3. 자아는 세상을 가까이 할 때 더욱 나타납니다.
2절에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했습니다.
여기 브엘세바가 어떤 곳입니까? 삿20:2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한 것처럼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최남방 한계선에 위치한 곳으로 애굽과 맞붙어 있는 경계선
입니다. 이처럼 애굽은 세상인데 세상과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내 안에 예수는 사라지고 내 뜻 대로 살려는 자아가 나타나
게 됩니다. 그래서 보면 세속의 때가 묻어 심령이 찹찹할 때 꼭 어김없이 자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작은 문제에도 가정불화가 생긴다든가 기타 작은 일에도 인내
하지 못하고 시험들게 됩니다.
그런데 도리 없이 육신은 세상에 처해 있기 때문에 브엘세바에서 살 수밖에 없
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브엘세
바라는 이름의 뜻에 그 비밀이 들어 있는데 브엘세바란 '맹세의 우물, 일곱 개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즉 '맹세의 우물'이라 했듯이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
에 빳지 않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우물물이 쉬지 않고 솟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 저를 세상에서 지켜 주십시오.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기
를 원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중심에서 솟구치는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그 뜻이 '일곱 개의 우물'인데 일곱은 온전수요, 우물은 말씀과 성령으로 이처럼
날마다 말씀과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에 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별도리 없이 세상을 살 수밖에 없지만 이 브엘세바의 정신
으로 살 때 비로소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화되지 않아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을 바라보지 않을 때 나타납니다.
3절에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
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온 나라에 알려진 귀한 모본이었건만 그들은 아버지로 본을 삼
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본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
제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본 삼아 마음에 간직해야 하
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본을 생각하며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자 흠모하는 사람은 자아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히12:2-3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5. 마음에 말씀이 없을 때 자아가 나타납니다.
4절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했습니다.
여기 장로들이 잘못된 제안을 한 것은 그들에게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은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말씀으로 충만하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에서 다투기라도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속담에 무식이 똑
똑이라고 말씀이 없으면 용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를 우리는 사울과 다윗에
게서 봅니다. 사울은 마음에 말씀이 없었기에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씀이 있었기에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아를 상징하는 시스
라가 누구에게 당합니까? 말씀의 선지자인 드보라에게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겠습니다.
6. 왕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 자아가 나타납니다.
5-6절에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
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
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늙고 또 제 역할 못하는 아들
들만 바라보았고 또 열국의 제도만 눈에 보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왕 되신 하나
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할 때 내가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
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여쭙고 하자고 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결재 받
고 하는 습관을 가지십시다. 그 때 그 성과도 좋지만 그보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되어집니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예수만 믿지 말고 그리스도까지 믿어야 합니
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는 '구원'이란 뜻이요,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즉 왕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은 내 방법이 아니라 예수 믿는 주의 방법
으로 잘 받는데 살기는 내 방식대로 살아버립니다. 이것이 왕이신 그리스도를 삶
에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단체 각계 각층 나라 우
주 모든 면에서 왕이십니다. 이 왕 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
다. 다윗은 왕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이 왕 되심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어떻게 내 자아가 왕노릇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자아가 살아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먼저, 가장 큰 죄인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가 옵니다.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죽여 순복시켜야 합니다. 내가 살아 왕이 되면 하나님을 버리는 행
위가 됩니다.
다음에, 불신앙과 우상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8절에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
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했습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이 곧 자아처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애굽을 나온 국민들이 모두 즉고, 가나안의 칠족들이 다
정복되었듯이 우리도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아로 돌아감은 과거의 불신
앙과 우상으로 돌아가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에, 자아를 위해 살면 엄중한 결과가 오게 됩니다.
9-10절에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
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그랬습니다.
그래서 롬8:13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
실을 죽이면 살리니" 했습니다. 성경은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는 역설적인 진리
입니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므로 엄중히 경계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래서가 자아의 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자아를 죽이지 못하면 불필요한 수고를 하게 됩니다.
11절에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
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했습니
다.
이 세상에 가장 불필요한 것이 전쟁에 쏟는 것입니다. 좀 이상론이긴 하나 속히
인류가 합의하여 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평화를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전쟁을 위
해 준비함이란 얼마나 돈들고 힘들고 못자고 죽고 상하고 파괴되고 원수되고 이
얼마나 수고로운 일입니까? 이처럼 자아가 살아 있으면 내가 나를 지키고 염려해
야 하니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다음에, 자아가 주장하면 크나 큰 수고가 있습니다.
12-13절에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
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했습니다.
이는 왕국을 관리하거나 유지하는 많은 수고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은 힘들고 고달픕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염려해 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자아가 살아 있으면 가장 좋은 것도 빼앗깁니다.
14절에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
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랬습니다.
여기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 등은 천국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또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천국이란 하나님이 왕이 되
어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내가 왕이 되어 있으니 어떻게 그런 축복은 있겠습
니까?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 손해가 큽니다.
또, 자아는 아무리 수고해도 칭찬도 축복도 없습니다.
15절에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
에게 줄 것이며" 했습니다.
여기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왕을 위한 세금을 뜻합니다. 이
왕의 십일조는 아무리 내어도 하나님의 칭찬도 없고 하늘의 문이 열리는 축복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금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므로 도리어 안 내면 강제 차압이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원리가 그렇다는 뜻입
니다. 또 아무리 그 십일조를 잘 바쳐도 천국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
아의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또, 자아로 행하면 도움의 손길도 사라집니다.
16-17절에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했
습니다.
그 귀한 일군들도 왕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14:52에 "사울
이 힘있는 자나 용맹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했습니다. 좋은 인재
는 왕이 다 빼앗아 갑니다. 어여쁜 여인도 왕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서 인재가 사라집니다. 이처럼 자아로 행하면 천사같은 일군들도 실망하고 떠나갑
니다. 하나님께서도 돕지 않으십니다.
또, 자아가 있으면 모든 것이 괴롬이 될 것입니다.
18절에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
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결국 포악한 왕 때문에 부르짖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
고 남북으로 분단 후에도 양국이 수 십명의 왕을 세웠지만 악한 왕이 더 많았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아로 말미암아 다
가오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잘 암시해 줍니다. 우리의 생애는 자아가 죽어야 평탄
합니다. 그랬기에 이삭은 그 생애가 평탄했습니다. 그러나 자아로 가득찬 야곱은
그 자아 때문에 일생 동안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아를 끝까지 버리지 않을 때는 심판이 따릅니다.
19-22절에 백성들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끝까지 왕을 구할 때 하나님
께서는 그 제안을 수락하십니다. 그러나 이 수락은 바로 심판을 뜻합니다. 즉 이
수락은 심판의 성격을 띤 허용적 수락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옥신각신 싸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집을 부리면 허락하시긴 하십니다. 허락 뿐만 아니라 사울을 선택해 주셨듯 돕
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자아의 결과가 얼마나 쓰디 쓴 것인가를 깨
닫게 하십니다. 자아로 시작한 일도 처음에는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에 온갖 정성과 노력과 물질을 다 투자해 놓으면 그때 허물어 버리십니다. 그러므
로 속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왕이신 대도 왕을 구하는 어리석은 이
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봅시다. 내 뜻 내 자존심 이
나라는 자아를 철저히 내려 놓으십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겸
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진실로 우리 자아를 처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
사 우리를 온전히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