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 해 한 해가 아까워서 나이 이야기는 하기 싫은데, 딸이 고희기념으로
진해 군항제에 가서 며칠 보내고 오자는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나이 이야기 하기 싫지만 사실은 나이 들어 그런지, 이제는 사람과 부대끼는 게
싫은데다 어딜 가나 꽉 막힌 도로를 생각하니 가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요.
그래도 딸이 애써 준비한 가족여행이라 싫다는 내색을 할 수는 없고, 타협 끝에
우리 부부는 따로 완행열차를 타고 느긋하고 편안하게 가고 오기로 했답니다.
차표예매를 위해 인터넷에서 코레일(이름만 영어로 바꾸면 뭐가 좋아지는지?)에
들어가 도착역을 넣으려니, 아차! 진해역이 나오지 않더군요.
진해역뿐 아니라 경화역 등 진해 시내의 모든 기차역이 폐역이랍니다.
생각해 보니 기차타지 않은지 꽤 오래여서 그런지, 예전에는 역마다 정차하면서
천천히 운행하던 비둘기호도 있었고 제법 빨리 달리던 통일호도 있었지요.
무궁화 열차는 제법 큰 역에만 드문드문 서는 비싸고 빠른 열차였고, 뒤에 나온
새마을호는 가장 비싼 최고급 열차였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낯선 이름의 KTX iTX SRT 등 외래 초고속열차가 등장하자
경쟁에 밀린 토속 완행열차들이 하나 둘 사라진 모양이지요.
더불어 어린 시절의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골역, 향나무 단풍나무가 아름답던
제 고향의 오래된 역들도 모조리 폐역이 되어 버렸더군요.
뭐가 그리도 급한지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다 더 빠른 열차
거기다 영어이름 붙은 외래열차만 좋아하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요.
아무튼 “남는 게 시간”인 저로서는 빨리 갈 필요도 없거니와, 초 고속 열차의
현기증 나는 경치보다는 완행 열차의 정겹고 느긋한 경치가 좋겠더군요.
이곳 저곳 찾아보면서 열차시각표를 샅샅이 뒤진 끝에 드디어, 서울에서 밀양역
그리고 밀양역에서 다시 마산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찾았지요.
나이 값은 제대로 못하지만 그래도 나이 들었다고 할인을 해주는데다, 지금에야
가장 느린 완행이지만 예전엔 고급 고속 열차였으니 좌석도 편안할 겁니다.
더구나 이 화사한 봄날에, 생각지도 않던 밀양에도 가 보니 더욱 더 좋겠지요.
혹시 무궁화 열차에는 지금도 “삶은 계란,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파는 홍익회
판매원이 있으려나 은근히 기대도 하고 있습니다.
거창하게 읊을 것까지야 없지만, 인생이나 여행이나, 목적지에 빨리 닿기보다는
오히려 가는 과정이 훨씬 더 재미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월에는 벚꽃 살구꽃 복사꽃 사이로 아지랑이 하늘하늘 피어 오르는 봄 들녘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달리는 남도의 완행열차여행을 다녀오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