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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 / 요 19:28
우리나라 점술가 숫자가 기독교 성직자 수의 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무당을 만나고 나오는 사람에게 ‘왜 이런데 오느냐?’고 물었더니 ‘답답해서 왔다’고 하더랍니다. 밥만 먹으면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돈 때문에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목마름 때문에 도박을 하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어떤 사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최고급 벤츠 승용차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로렉스 시계를 차고 다녔습니다. 드디어 로렉스 시계를 차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울고 서 있더랍니다. ‘내 벤츠 승용차, 벤츠, 벤츠’ 구조대가 ‘벤츠가 문제입니까? 당신 팔뚝이 달아났습니다.’ 이번엔 이 사람이 ‘아이쿠, 내 로렉스 시계, 로렉스, 로렉스’ 하더랍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물질에, 권력에, 정욕에, 예술에, 명예에, 인기에, 목이 말라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헛된 목마름은 세상 어디에서도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희랍신화에 탄타루스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탄타루스 왕이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는 제우스 신의 음식을 훔쳐먹었습니다. 그 죄로 그는 평생 배고프고 목말라야 하는 고통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시고 싶어서 앞에 있는 물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물잔이 뒤로 쓱 물러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앞에 있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그 나무 열매가 하늘로 휙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마시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하나도 입에 넣을 수가 없는 고통을 영원토록 겪어야 했습니다. 이 탄타루스 왕의 신화에서 영어 단어 ‘텐터라이징(Tantalizing)’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감질나는, 애간장을 태우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마시지 못하고 먹지 못합니다.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는데 얼마나 안달이 나겠습니까? 얼마나 감질이 나겠습니까? 사람들이 쉬지않고 추구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목마름은 다 이런 것입니다. 텐터라이징!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주간을 용서하는 계기로 삼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두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부탁해오는 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고 결국 구원을 허락받았습니다. 구원이 자신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까?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 구원의 확신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아들로서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씀입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아들의 마지막 도리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부모님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주간을 부모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께 버림받은 아들의 절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버림받으심으로 우리가 택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주간이 하나님께 선택받았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은 십자가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네 번째 말씀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영적 고통의 절규였다면, “내가 목마르다”는 다섯 번째 말씀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의 절규였습니다. 영적인 아픔 이후에 육적인 아픔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적인 아픔이 먼저이고, 영적인 아픔은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고서는 잊고 지냅니다. 죽을 지경이 돼서야 영적인 고통을 생각합니다. 육체가 형통하고 편안할 때는, 영적인 고통에 대해 무딥니다. 큰일을 당하고 나서야, 영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여섯 시간 가까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많은 출혈은 반드시 심한 두통과 극도의 갈증을 동반하게 됩니다. 주님이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끼신 것은 당연합니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목마르시다니 이해가 됩니까?
어떤 병리학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과다 출혈과 극도의 피로, 노출, 충격, 그리고 질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은 탈수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기본적으로 죄수를 서서히 탈수시켜서 죽게 하는 형벌인 것입니다. 장장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피땀을 다 쏟으셨으니 얼마나 기진맥진했겠습니까? 중동 지방의 불볕 더위는 또 얼마나 혹독했겠습니까? 입술이 바싹 바싹 말랐을 것입니다. 목안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이 마르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 4: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자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영생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전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사 55:1절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요 7:37-38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무리를 향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니,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 분이 어떤 분입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그분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신 분입니다. 천하의 물을 한곳으로 모아, 뭍을 드러나게 하신 분입니다. 오대양을 만드신 분입니다. 모든 크고 작은 강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창세기 7장에 보면,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을 열어, 땅에 비를 사십 주야나 쏟아지게 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목마름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는 실화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병사들이 사막을 걸어가는데, 목이 너무 말랐습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신기루가 보였습니다. 저 사막 끝에 강물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가, 첨벙첨벙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껏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다 죽었습니다. 얼마후 정찰대가 그들을 찾았는데, 그 병사들은 모두 입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래를 물인 줄 알고 퍼 마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모래가 목에 가득 차서 죽고 말았습니다.
목마름의 고통 앞에서는 주님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그런 목마름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맘만 먹으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샘을 터뜨려 목마름을 한순간에 해결하실 수 있는, 그분이 친히 목말라 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의 고통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마셔 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목마른 존재입니다. 어려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목마른 존재로 살아갑니다. 목마른 인생은 갈증을 해갈해보려고, 무엇엔가 미쳐보려고 합니다. 무엇엔가 몰두해보고, 무엇엔가 탐닉해 보고, 무엇엔가 빠져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 어떤 것에 미쳐봅니다.
미국에서 깡패 두목으로 악명 높았던 니키 크루스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뉴욕의 깡패 두목이었을 때, 돈과 술과 여자를 원하는 대로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부하를 죽이고 살리는 일도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잠을 잘 때는, 자기 방의 방문을 몇 겹으로 채우고, 권총을 베개 밑에 놓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밤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몸부림 쳤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협박 공갈하고 경찰관과 총격전을 벌이고, 밤이면 불안과 공포에 떠는 것이 인생인가? 난 좀 의롭고 올바르게 살 수 없을까? 나에게는 참된 삶이 없을까?' 이런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는 밤이면 베개가 젖도록 울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날만 새면 지난밤의 후회와는 달리, 악랄한 깡패의 생활을 되풀이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뉴욕 거리를 지나다가 한 전도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이렇게 전도하는 월커스 목사님을 그는 실컷 때려 주었습니다. 다음 날도 그 길을 지나는데, 어제 그 전도자가 팔을 붕대로 감고 얼굴은 멍든 채로 여전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깜짝 놀란 니키 크루스는 침을 뱉으며 말했습니다. “야, 지옥이나 가라!” 그러자 전도자는 그를 붙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그리스도 앞에 서겠습니까?” 이때 니키 크루스의 마음에 강하게 부딪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니키 크루스는 전도자로 인해 영원히 목마른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목자로 모심으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처럼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전도자로 자기 삶을 드렸습니다.
지옥에서만 들을 수 있는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입니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간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눅 16: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타들어가는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계 7:16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천국엔 목마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와 답은 17절이 해줍니다. 계 7: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예수님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목마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목마른 여인을 찾아와 만나주셨듯이, 목마름에 지쳐있던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를 생명수 강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할 일이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니키 크루스처럼 아직도 목마른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목마름을 해갈해주실 분 있다고 말해주는, 예수 증인으로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신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단지 목마름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2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관심이 무엇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름을 겪고 있으면서도, 한 모금의 물에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성취에 있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주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제사장의 병사들이 가룟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을 때, 누군가가 검을 빼어 그의 귀를 쳤습니다. 그 때 주님은 검을 휘두른 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26:53-54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주님은 잡히시는 순간에도,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으시는 순간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삶의 목표에 충실하셨습니다. 성경을 이루시려는 목,표 말씀대로 살려는 목표에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요 18:37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주님께는 ‘이것을 위하여 태어났고, 이것을 위하여 살다가, 이것을 위하여 죽겠다’는, “이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셨습니다. 또한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성경이 살라고 할 때 사셨습니다. 성경이 죽으라고 할 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말씀에 붙들린 생애를 사셨습니다.
대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에게 쓸개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그건 일종의 마취제였습니다. 잠시라도 고통을 잊게 해주는 사형수에 대한 작은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마저 거절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견딜만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기분 나빠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포도주를 싫어해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보통 때 포도주를 잘 마셨습니다. 포도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상적인 음료수였습니다. 물이 너무 귀했기 때문에 포도주는 흔히 마시는 음료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도 목마르다고 해서 주었는데 마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장면을 떠올려보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막 14:25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과 잔을 나누시며 잔의 의미를 설명하신 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은, 바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말씀도 이루셨지만, 자신의 예언도 성취하셨습니다. 오직 말씀에 목마른 삶, 말씀에 붙들린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붙들려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에 목마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에 목이 말라 합니까? 그 사람이 무엇에 목이 말라 있느냐를 보면, 그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목이 말라 있느냐를 보면, 그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목이 말라 있느냐를 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시 42:1-2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우리가 갈급해 하는 것과, 시인이 갈급해 하는 것이 같습니까? 우리가 갈망해 하는 것과, 시인이 갈망해 하는 것이 같습니까? 아니면 좀 차이가 납니까? 아니 현저하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시인은 지금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될 정도의 상황입니다. 낙망할 수밖에 없고,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원래 사슴은 그 자태가 곱고 귀족풍으로 생겼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참 순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한번 목이 말라 물을 찾을 때는 바락 바락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는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예수를 너무 젊잖게 믿으려고 합니다. 너무 고상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물론 예수를 천박하게 믿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습니까?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을 때, 부흥이 찾아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할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부흥은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성령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에도 그랬고, 지금 2022년에도 그렇습니다. 부흥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부흥에 목마름을 가질 때,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통해, 성령님께서 부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19세기말 미국의 유명한 부흥운동가 스미스 목사님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신앙부흥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스미스 목사님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분필로 당신이 앉아 있는 마루 둘레에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부터 먼저 신앙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이러한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때 드디어 신앙부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종려주일이 돌아왔고, 고난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삶의 자취를 묵상하고,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놓쳤던 말씀과 기도를 다시 붙잡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는 어떤 책에서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60년대 말 오하이오의 신씨네티 대학에 다니던 어떤 독실한 크리스천의 간증입니다. 이 학생이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인 촬스 머레이(Charles Murray)라고 하는 올림픽 다이빙 선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머레이에게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이 다이빙 선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를 갖고 친구의 전도를 들었습니다. 이제 어는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기독교인 친구가 머레이에게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머레이가 얼굴을 밑으로 떨구면서 죄책감에 가득 찼습니다. 그러더니 자기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날이 있은 후부터 머레이는 말수가 적어지고 전도한 친구를 자꾸만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독교인 친구는 머레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경 어느 곳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 전화였습니다. 기뻐한 친구는 즉시 구원에 도움이 될만한 성구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것은 싫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또 머레이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머레이가 드디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머레이는 올림픽 다이빙 선수였기 때문에 대학 내의 실내 수영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날 밤 10시 30분부터 11시 사이에 머레이는 수영장에 가서 수영도 하고 다이빙 연습도 하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10월의 아주 맑은 밤으로 큰 달이 밝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학교 수영장은 창유리로 된 천장 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깃불을 켜지 않아도 벽 꼭대기로부터 수영장 주변까지 밝은 달빛이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머레이는 첫 번째 다이빙 연습을 하기 위해서 가장 높은 다이빙 단까지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께서 머레이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가 친구로부터 들었던 모든 성경 말씀과 일체의 간증이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랐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첫 번째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높은 다이빙 단에서부터 밑으로 떨어져 내리기 위해서 뒤로 물러서면서 균형을 잡기 위하여 두 손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머레이는 달빛에 자기의 그림자가 벽에 비추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모습이었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호흡을 고르는 모습이 달빛에 반사되어서 십자가 그림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 십자가 그림자를 본 순간 머레이는 더 이상 자신의 죄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깨어져서 다이빙 대 위에 주저앉아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달라는 기도였지요. 이렇게 머레이는 지상 20피트 상공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수영장 안에 전깃불이 갑자기 켜졌습니다. 수영장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수영장 안을 점검하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깃불이 환한 수영장 밑을 다이빙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이 다 빠져서 시멘트 바닥이 훤히 내다보이는 빈 수영장이었습니다. 수영장 수리를 위해서 물을 다 빼냈던 것이지요. 머레이가 밑으로 뛰어 내려 죽을 수밖에 없었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구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육체적인 목마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목마른 인생을 대신하는 목마름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주님이 담당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목마름 때문에 우리가 생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생수를 먼저 마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성경을 응하게 하는 목마름입니다. 주님은 죽으시는 순간까지 말씀에 목말라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무엇에 목마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와 같이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 밑에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외치심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남은 인생을 말씀에 목마른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절규하시던 주님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말씀에 목마른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 진리에 목마른 자, 영원에 주린 자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세상과 육욕에 목마른 것이 아니라,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께 목이 마르게 하옵소서. 이제부터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우리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해지게 하옵소서.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서,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공급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