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선교 (3)
셋째 날. 지난밤엔 오늘을 대비해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마지막 날은 체육관에 도착하여 교회성도들 치료 일정이 잡혀 있어 인근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호텔(하위급 호텔)을 나서니 아직은 컴컴하다.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삼십 여 분 정도 지났을까 방갈로르 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은 밝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지방 기차역을 떠올리듯 우리나라 80년대 모습처럼 수수했다. 각자 열차승차권을 소지하고 플랫폼으로 향했다. 열차표는 이재구 선교사가 미리 예약했다. 일행은 선교사와 현지 선교사를 포함하여 열 한 명이다. 기념이라 사진 몇 장도 촬영했다. 이기선 장로님이 뱃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역무원에게 설명하니 약간의 약을 받을 수 있었다.
삼십분 정도 기다리니 열차가 도착했다. 차창 밖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팔구십 년대 우리나라 통일호 수준의 열차다. 좌석 표였으므로 차량 칸을 옮겨 다니며 자리를 찾아 착석할 수 있었다. 열차 안은 이층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세 명이 마주보며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 다락처럼 이층에는 회전식 선풍기가 돌고 있다. 승객들은 우리가 좌석번호를 가지고 자리를 내 달라고 하니 누웠던 몸을 일으키며 순순히 자리를 내 주었다. 입석으로 타고 왔던 승객들은 빈자리가 있으면 이층이건 아래층이건 두러 누워 자고 있었다. 하기야 밤 열차 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덧 새벽이 밝아 차창 밖은 해가 떠올랐다. 전날 이재구 선교사 사모님이 준비 해준 김밥으로 일행들은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인도에서의 김밥이다. 방갈로르 현지에 도착하여 다른 일행보다 먹는 것에 적응 하지 못한 나는 김밥이 구세주였다. 배가 고파도 적응 하지 못했다. 항상 반 정도 먹다가 중지하곤 했다. 맨 손에다 먹는 것이 계속 내 비위를 건드리는 형국이었기에 말이다.
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다. 본격적인 열차여행의 시간이었다. 차창 밖에 날씨는 쾌청했다. 방향은 마치 남행열차 처럼 달리는 모습이다. 열차에 창문을 모두 열려져 있어서 상쾌한 기분으로 달렸다. 좌우로 펼쳐지는 농촌의 풍경은 높지 않은 야산조차 전혀 보이질 않는 대평원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농촌처럼 옥수수와 밀 들을 경작하는 대평원의 모습이 아닌 군데군데 농가도 나타나며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펼치는 평원이다. 먼 곳에서 두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끄는 모습도 보인다. 어릴 적 우리들이 살던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인도 소(가축)에 대한 느낌은 이러했다. 방갈로르 시내에서 본 소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시내 소들의 모습은 먹을 것이 부족한 듯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뒤져 먹고 있다. 길거리 소의 배변물이 항상 지저분하게 있다. 그래도 전염병엔 아무 상관이 없나보다 보다. 도심 한가운데인도 말이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인도국민이 마치 우상 섬기듯 소를 보호한다. 힌두교 국가 이니 그런가 보다.
열차 안에서 본 바깥에 쟁기 끄는 두 마리의 소들을 보면서 행복하게 느껴졌다. 시내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 모아 놓은 쓰레기를 뒤져 먹는 소들 보다야 일한 소의 노동의 대가는 먹을 것을 충분히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두 시간 동안 나는 바깥 창을 내다보며 감상의 글을 수시로 탭에 담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펼쳐지는 초록 빛 농촌풍경이 내 가슴을 확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인도의 9월은 약간 더운 기후였지만 땀을 별로 나지 않았다. 날씨 때문에 몸이 지치고 힘든 것은 없었다. 인도는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북적거렸다. 땅도 넓지만 역시 사람도 많았다. 특히 도시는 더 했다. 많은 인구 관계로 국가의 평균 소득은 낮지만 사람들만은 순수하다는 느낌이었다. 방갈로르에 출퇴근길을 비롯해 이곳에 도착한 지방 도시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기차로 두 시간 정도를 왔나 보다. 목적지에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지금도 살고 있는 황금빛 첨탑 모양에 건물 안에서 현지 지도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관광이다.
황금빛 건축물은 첨탑까지의 높이가 15층 정도의 아파트 높이처럼 높다. 맑은 햇살에 정말 번쩍번쩍 빛났고 신발을 벗고 입장해야 했다. 인도사람과 다른 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기독교가 아닌 힌두교 사원이다. 그런데 현지 족장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했다. 앞 사람을 따라가며 관광했다.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이 온다는 선교사의 설명이다. 이곳에 오기 전 이재구 선교사가 이야기 한 것이 생각난다. 절대 은혜는 되지 않고 관광하고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들이 옛적에 성장하면서 조상들한테 자정이 가까워 제사를 지내면서 향이 타는 냄새처럼 머리가 아프다고 말이다. 그런데 역시 머리가 아팠다. 영적인 면이 너무도 다르기에 그렇다. 이런 체험 때문에 이곳을 들린다고 했다. 기분 전환 한다고 인력거에서 파는 야자나무 음료수를 마셨다. 밋밋한 맛이지만 여행의 한 면이니 조그마한 추억의 한 면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커브 길을 내려오는데도 머리가 지근지근 거리며 띵하다.
정오가 지나니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선교사께서 여행지 호텔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땀도 좀 흘렸기에 시원한 것이 더욱 생각났다. 닭을 메뉴로 하는 식사가 나왔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음료수도 마시며 인도에 와서 제대로 된 식사였다. 일행 모두가 만족한 모습이었다. 식사 후 화장실을 들렸다 온 일행 한 분이 킥킥대며 웃으며 나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남자 화장실 변기가 적당한 높이가 아니라 상당히 높았다. 인도사람들이 신장이 커서 그런 것이다. 잘못 하다가 물기가 뛰어 오를 것 같았다. 남성 일행 모두가 나오면서 한 마디씩 했다. 또 다른 힌두교 사원 관광지로 향했다. 그곳에 나무 한그루를 보았는데 얼마나 오래된 나무인지 그 뿌리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나무였다. 엄청난 인파로 대충 그 힌두교 사원을 둘러보았다. 안팎으로 본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건축물의 예술적으로 본다면 정말 대단했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오랜 세월을 벗 삼아 건축한 심오한 건축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