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자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와 소우주,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유교에서의 인본주의, 도가사상에서의 무위(無爲), 과학과 종교, 그리고, 철학에서 우리는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과연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본질을 알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당신은 지금의 내 삶을 선택한 신성(神聖)한 존재입니다. 뿐만아니라 스스로의 운명과 삶을 창조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중립적인 측면에서 너그러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양자역학은 "이것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없다." 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이론입니다. 그래도 간략히 말해본다면 원자의 행동을 설명한다고 보면 됩니다. 양자역학은 원자를 기술하는 학문입니다. 원자는 모든 것에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원자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역시 그러합니다. 양자역학은 모든 물질의 근원을 알아보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둘의 간격은 텅 비어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이 원자들이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파동이기도 하면서 입자이기도 한 원자, 이중성를 띤 원자는 관측 전과 관측 후로 나뉩니다. 관측 전에는 파동이었지만 관측 후에는 입자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본다'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을 통해 무언가를 보게 되는데, '빛'이 관측 대상을 부딪힌 후 반사되어야 우리 눈에 그 사물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빛이 어떤 대상에 부딪혀야 인간의 눈에 그것이 인식되는 것입니다. 파동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 그것은 입자화 되는 것잊니다.
양자역학을 설명한 닐스 보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인간에게는 없고, 이런 개념과 경험이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우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주적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본질이지만, 인간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부분에서는 왜 그럴까에 대한 의문이 계속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관찰자인 인간이 빛을 통해 파동을 입자로 바꿉니다.
우주적으로 볼 때, 이것은 왜 라는 것이 없는 것이고 그저 그러한 것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인 존재나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신앙 공동체를 말합니다. 우주적인 절대적 진리의 추구와 신에 대한 숭배를 함으로써 인간이 겪는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의미와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 있습니다.
종교가 영성(靈性)을 포함한다고 해서 영성이 모두 종교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신론자지만 영적 성장을 전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듯이 무엇은 좋고 뭐는 나쁘다 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천지와 인류를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는 모든 만물에 존재합니다. 종교적 예배와 믿음, 그리고, 감사, 사랑의 봉사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나눕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창조하신 아버지시며,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이기에 사랑으로 봉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잉태된 자식들이며, 어느 한 사람에게만 고통을 주는 법이 없이 공평하게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바쳐라 하는 것이 '진실된 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자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깨달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즉, 인간의 내면에는 창조주의 힘이 있고, 절대적인 존엄성과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바로 소우주이며 소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절대적으로 경배하고 복종해야 할 특정한 절대자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또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경전상에 나오는 부처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가 부처인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공(空)'입니다. 「악(惡)을 짓지 말고, 선(善)을 행하라」
우주적인 인식론의 출발이 인간의 감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불교는 연기설을 바탕으로 자비를 베풀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연기설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무수한 인연에 의해서 생성하고 소멸된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자비란 생멸의 과정에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과 더불어 기뻐하고 슬퍼하는 불교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자기 안에 내재된 부처의 참성품을 직관(直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이상 중 하나입니다. 즉, 어리석음을 해탈(解脫)하여 내 안에 부처가 있음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공자(孔子)의 유교사상 특징 중 하나는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며, 인간의 내면에는 하늘의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살아있을 때의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은 뒤의 삶을 어떻게 알겠는가?" 라며 사후의 문제를 천기누설(天機漏泄)로 간주하여 비밀시 하였습니다. 선행의 댓가를 생각치 말고 지금의 현재에 살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유가사상의 인(仁)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남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남을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나와 같이 동등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仁)은 무궁무진한 선의이며 가장 큰 잠재능력이라 하였습니다.
노자(老子)는 도가사상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본래 순수하고 자연의 덕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사물의 겉모습 만으로 판단하게 되었고 오해로부터 시작된 사물의 겉모습에 이끌려 진실된 본질의 가치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고 자연히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때라야 비로소 어떠한 고통이나 혼란 없이 '초연한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나라고 하였지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간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승려였던 도겐이 이런 말을 했죠. "나 자신을 배열한 것이 세계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점과 삶의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배열하는 주체는 물론 나 자신입니다. 내가 배열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물이 그러합니다. 명상(瞑想)은 생각을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명상이라는 말 자체가, 생각에 눈을 감는다 (瞑想) 라는 의미를 가졌지요. 실제 눈을 뜨고 하든 감고 하든간에 '생각에 눈을 감는 것'이 명상입니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내려놓고 자연 그대로를 느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낸 의도와 주관적 판단없이 그저 느낌으로 내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명상입니다.
철학자인 니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연의 풍경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고 유쾌한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스것은 가장 아름다운 '분신 현상'이다", "자연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는 자는 위대한 본질을 만나게 되리라."
뿌린대로 거둔다는 카르마의 법칙, 같은 성질끼리 끌어당긴다는 끌어당김의 법칙, 성격이 다를 수 있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본질, 철학과 과학에서 말하는 관조와 관찰, 그리고 주관을 내려놓는 명상, 우리는 보이는 것에 연연하고 살지만 실제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부처가 있고, 우주가 있으며,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허상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주관적 판단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들다는 감정을 부여하고 내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자연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족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안 좋은 감정과 의미를 그것에 부여했기에 드는 생각이지 실재가 아닙니다.가족은 그대로 존재하지 나를 불행 속에 집어넣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어떠한 사물도 현상도 주변의 사람들도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나를 괴롭히고 내 앞길을 막는 것은 내 마음일 뿐입니다. 내가 부여한 의미이고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한 결과물인 것입니다. 내가 힘들다고 하는 그 생각이나 느낌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거기에 주관적 힘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의 실재는 세상에 없습니다.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내려놓고 보면 그 존재 자체가 보입니다.
"자연을 걷고 자연을 느끼고 자연에서 나를 만나보라", "놓아보라", "힘을 빼고 살아라",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초연한 관찰자가 되어라" 라는 말들의 의미가 그런 뜻입니다. 육체의 힘을 빼면 정신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육체 힘이 빠진 상태인 잠자리에서 얼마나 다양한 꿈을 꾸고 많은 경험을 하고 있는가요? 없다 있다, 라는 것은 내 주관입니다. 되고 안되고는 내 주관이죠. 옳고 그름도 내 주관입니다. 내 주관은 '틀릴 수도 옳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핵심은 '내면의 나'인 것입니다. 내가 스승이고 내가 제자입니다. 내가 우주이고 내가 부처입니다. 창조의 힘이 나이고, 내가 원자이고 내가 에너지입니다. 내가 지혜이며 내과 과학이고 내가 철학입니다.
절대 하찮게 대할 수 없는 우주적 위대한 존재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고, 위대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불평만 하며 살 수도 있고, 내가 실재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끌어당길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관계가 달라집니다. 배열하는 주체는 물론 나 자신입니다. 내가 배열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신가요? 내가 내 딛는 방향대로 길은 이어집니다.
길을 막는 건 내 자신일 뿐, 외부적 방해는 없습니다. 「I AM~, 나는~ 」 이말의 뒤에 무엇을 말 할 것인가요? 그것이 곧 내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나 스스로를 새롭게 배열하고 창조하는 내 인생의 절대자 소창조주가 되시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