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공추지(禹貢錐指)》란 누가 지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청나라 강희 연간에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편찬 작업에도 관여한 바 있는 호위(胡渭)가 쓴 지리저작이다.
이제 이 책을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바 있는 추일린(鄒逸麟) 선생의 글(1997. 10. 6 자 《인민정협보(人民政協報)》에 실렸다)을 정리하여, 호위는 어떤 사람이며 그가 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의미를 살펴 보기로 하자.
호위(胡渭)(1633~1724). 원래의 이름은 위생(渭生)이요, 자는 비명(胐明)이며 만년의 호는 동초(東樵)였다. 절강 덕청인이다. 명숭정 6년(1633)에 대대로 과거를 보던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증조부는 진사로 광동 순덕령을 지냈고, 조부는 제생(諸生)이었으며 부친은 거인(擧人)이었다. 그래서 호위는 어렸을 때부터 과거는 자기가 커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숭정 17년(1644) 호위가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따라 절서(浙西) 산간지대로 피란을 하였다. 모친은 그가 어렸을 때 가르쳐 준 선생으로 그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가르쳤다. 청순치 4년(1647) 호위가 15세 때 현의 학생이 되어 이윽고 제의(制義)를 전공하여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느라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았다. 희망이라고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는데 어찌하랴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라 그런지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번번히 낙방을 하고 말았다. 강희 15년(1676)에 그의 종질 호회은(胡會恩)은 진사 제2등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그는 이미 불혹의 나이인데도 아직도 일개 나이많은 과거준비생이었다. 그후 얼마 있다가 대학사 풍부(馮溥)의 집안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강희 17년(1678) 조정에서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를 열자 풍부는 호위에게 응시할 수 있도록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호위는 고사하면서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주위에서 호위는 대신 자제분의 선생인 만큼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 가지 않으려느니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 의외에도 최후에 추천명단에 도리어 자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호위는 심각한 타격이었으며 그 때부터 과거를 그만두고 경의(經義)를 전공하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강희 21년(1682) 풍부는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호위는 또 대신 서건학의 부(府: 옛날 귀족 고관의 저택)에서 일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몇 년 동안 당대의 명사들인 주이존(朱彛尊)·모기령(毛奇齡)·오임신(吳任臣)·염약거(閻若璩)·이진유(李振裕)·만사동(萬斯同)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학문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강희 29년(1690)에는 또 서건학의 초청에 응해 소주 동정 동산으로 가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1년 동안 호위는 벌써 58세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편찬에 참여한 짧은 2년의 기간 동안, 호주의 연구작업에 대해 매우 주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당시 호위는 역대로 《상서(尙書)·우공편(禹貢篇)》에 대한 경서주석가들의 해석에는 적지 않은 착오(錯誤)와 결루(缺漏)가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하였으며, 이 편에 대해 대대로 해석을 한 가작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를 해 보겠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호위와 더불어 편찬작업에 참가했던 자들 가운데 고조우(顧祖禹)·황의(黃儀)·염약거(閻若璩)·사신행(査愼行)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연혁지리학(沿革地理學)에 교양이 많은 학자들인데 마침 이들과 서로 연구하면서 열심히 가르침을 청했다. 이와 동시에 조정에서 찬수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지지에 기초하여, 천하의 군국지서(郡國之書)를 마음껏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틈타 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할 수 있었다. 호위는 사실상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우공(禹貢)》의 체계적 연구를 시작하였다.
《우공(禹貢)》은 《상서(尙書)》 중의 1편으로 비록 겨우 1193자에 불과하지만 역대로 중국의 "고금지리지지조(古今地理志之祖)"로 받들어졌다. 그것은 우임금의 치수 후의 정치구획(政治區劃)을 가탁(假托)하였으나 실제로는 지리구획(地理區劃)으로, 전국을 9주(九州)로 나누어 이 아홉 개 구획의 산령(山嶺)·하류(河流)·수택(藪澤)·토양(土壤)·물산(物山)·공부(貢賦) 및 교통도로 등을 각각 기술하고, 이 밖에도 중국의 주요 산맥(山脈), 하류의 주향(走向)과 유경(流經)이라든가 중원지구 이외의 5개 각이한 층차구역(層次區域)의 중앙과의 관계 등등을 나열하여 중국 최초의 과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구역지리저작(區域地理著作)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서 중의 1편인 까닭에 역대로 연구자들이 수십백가에 좀 못되었다. 정현(鄭玄)·마융(馬融)·왕숙(王肅)·공영달(孔潁達)·채침(蔡沈) 등 몇몇 저명한 경학가 외에 역대로 주석(注釋)·소증(疏證)을 한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가운데서도 문자(文字)·명물(名物)·제도(制度)·지리고증에 대한 것은 널리 방증(旁證)을 인용한다거나 문장이 장황하여 지루하고 길다고 느낄 정도로 각자 자기의 소견이 있지만 항상 쓸데없이 중복된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장황스러웠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그 결점은 주로 유교 경전의 각도에서 연구에 치중하였는지라, 간혹 겨우 자료의 나열일 뿐 그것을 완벽한 구역지리(區域地理) 저작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호위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편찬하면서 능히 국가도서관 장서를 열람할 기회를 이용하여, 대량의 지리자료를 수집하고 정밀한 고증연구를 진행하여 마침내 24권 40만 자의 전저(專著)를 탈고하게 되었는 바, 책이름은 《장자(莊子)·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以管窺天, 以錐指地"라는 의미에서 취하여 《우공추지(禹貢錐指)》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공헌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분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한이래 명말청초에 이르기까지 제가의 전주(銓注)를 포함한 전인들의 《우공(禹貢)》연구의 모든 성과를 휘집하였는 바, 특히 《사기(史記)·하거서(河渠書)》 이하 역대 정사의 하거지(河渠志), 《수경주(水經注)》 이후의 역대 하거(河渠)·수리(水利) 전저를 주의 깊에 이용하였고, 또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이하 역대 총지(總志)·방지(方志)로써 《우공(禹貢)》시대의 지리를 실증하였다. 역대 주소(注疏)·지리 전저 외에도 "무릇 고금이 기록된 말이라면 경사자집(經史子集)은 막론하여 《우공(禹貢)》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사실상 뭇 서적을 널리 채집하고 중설을 모았던 것이다. 역대 제가의 일치하지 않은 견해에 대해서는 애써 통일된 견해가 되도록 힘썼으며, 오류를 답습한 것에 대해서는 바로잡아 고쳤다. 이와 아울러 또 역대 산천(山川)·능곡(陵谷)의 변천의 연구에도 뻗혀 규모가 웅대하고 사려가 주밀하였으니 올연히 볼 만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역대 《우공(禹貢) 연구를 집대성한 저작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찬이라 할 수 없다.
둘째로, 전인들의 연구에 기초한 독창적인 연구라는 데 있다. 전인들의 전주(傳注)를 널리 수집하여, 자기의 비교고찰과 변이(辨異)를 통해서 그 시비를 확정하고, 최후로 자기의 견해를 언급함으로써 일반 해경자(解經者)와 같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구주(九州) 방역(方域)에 대한 정위(定位), 구하(九河)의 형위(形威)에 대한 견해, "灉、沮會同"에 대한 해석, "浮于淮泗, 達于河"의 "河"는 "荷"로 써야 한다는 결론 등등 모두가 전인에 비하여 훨신 우수하였다.
셋째로, 역대 하류의 변천, 수리의 흥쇠에 대해 특별히 기울인 관심이다. 호위는 《우공(禹貢)의 아무 강을 주석함에 있어, 지금 어떤 강이라고 언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강물의 변천과 수리의 흥쇠에 대해서 모두 전면적인 논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우공(禹貢)》시대의 아무 강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국 이래 이 강물의 역대 변천, 수리쇠흥 및 사회경제 방면의 영향도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넷째로 역대 각지구 산업과 경제개발에 대해 기울인 관심이다. 우공의 각주에는 공물에 관한 기록이 있어, 전국시대 각지의 산업을 반영하고 있는 바, 종전의 경제가들이 주로 착안한 것은 명물(名物)의 고증에 있었으나, 호위는 더 나아가 전국시대 이후 각 역사시기의 당해 물산의 본주 및 기타 각주에서의 생산정황과 변천을 상술하였다.
《우공추지(禹貢錐指)》의 책이 완성된 것은 강희 36년(1697)으로 호위의 나이 65세였으니 참으로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 41년(1702)에 소주에서 찍어 냈고, 44년(1705)에 이진유(李振裕)·사사승(査士升)이 강희제에게 바쳤다. 같은해 3월 강희제가 남순을 하던 중 소주에 주필을 하였다. 호위가 친히 이 책을 가지고 가서 바쳐 강희제로부터 표창을 받았는데 황제가 직접 쓴 시선(詩扇)과 "기년독학(耆年篤學)"이란 4자의 편액을 하사받았다고 한다.(출처, 인터넷 자료, 원문은 파일로 만들어 올렸다)
3. 《우공(禹貢)과 구주(九州)
《우공(禹貢)》이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우임금의 가장 큰 공적인 치수(治水)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임금은 중국의 역사시대인 하·은·주 삼대 중의 하나인 하나라의 개국 군주이다.
우임금이 치수를 하고 9주를 나눴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일 뿐이다. 그리고 《우공(禹貢)》 중의 9주(九州)라는 것도 자연강계에 따라 획분된 지리구역(地理區域)인 것이지 결코 행정구역(行政區域)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국 역사에서 주(州)라는 제도가 실제로 행정구역에 반영된 것은 한나라 때 맨 처음 실시되었다.
이제 우임금의 치수(治水)와 분주(分州)의 전설에 대해 중국의 석학 고힐강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대(夏代) 이전은 문헌상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에게 오직 결의(缺疑: 의혹에 대해 억단을 하지 않고 잠시 논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을 말함)만 있다. 하대의 역사는 비록 후대의 기록에 겨우 근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갖가지 방법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 만큼, 은상(殷商) 이전에 이러한 왕조가 하나 있었던만은 확실하다. 하(夏)의 시조는 전설에 의하면 우임금이라 한다. 그러나 우임금이 결국 하나라 사람과 혈통상의 관계가 있는지의 여부는 또 의문이다. 전국(戰國) 이전에 우임금은 단지 우(禹)라고 칭했을 뿐 우하(禹夏)하고 하지 않았으며, 혹자는 우의 전설은 바로 중국의 《창세기(創世記)》 일뿐이라고 한다. 우의 전설에 관해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치수(治水)와 분주(分州) 두 가지 업적이다.
세계 여러 민족들에게는 모두 홍수의 전설이 있고, 그 중에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는 바빌론·유태·인도·페르샤·운남과과(雲南猓猓) 등에게도 모두 이러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중국 고대 문명은 황하유역에서 남상하여 하민족이 또 이 지역으로 전전하여 옮겨왔다. 황하는 자고로 범람의 재앙이 많았던 곳으로 혹시 부분적인 수재(水災)를 보편적인 대해(大害)로 오해하여 마침내 치수(治水)·분주(分州) 등의 전설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시대가 더 뒤질수록 홍수의 전설은 갈수록 한결같지 않아 수인씨(燧人氏)·전욱(顓頊) 및 요임금·순임금 때에도 모두 치수를 걱정하는 전설이 있으니, 치수사업은 역시 우임금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한 전설 가운데는 우임금의 애비 곤(鯀)이 일찍이 치수에 실패하였다는 것들도 있다.
치수(治水)의 뒤에 나온 전설이 구주(九州)를 획분하였다는 것이다. 구주(九州)라는 말이 비록 춘추시대에 동기(銅器)인 《제후박종(齊侯鎛鐘)》 및 《시(詩)·상송(商頌)》에도 이미 나오고 있지만, 전체 구주 중 매주의 명칭 및 강역의 분획은 아마 전국(戰國) 이후에 마련된 듯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우공(禹貢)》에 기록된 우임금 때의 구주의 공부(貢賦) 및 치수(治水)·간산(刊山)에 관한 서(書)는 비록 우임금 때의 실록은 아닐 지라도 전국(戰國) 시대인들의 고대지리관념을 충분히 대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9주로, ⑴기주(冀州) ⑵연주(兖州) ⑶청주(靑州) ⑷서주(徐州) ⑸양주(揚州) ⑹형주(荊州) ⑺예주(豫州) ⑻양주(梁州) ⑼옹주(雍州) 등이다.(고힐강 외 저, 《중국강역연혁사(中國疆域沿革史)》, 상무인서관, 12~13쪽 참조)
4. 《우공(禹貢)》편 연구의 목적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남의 나라 고대 지리서에 이토록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공(禹貢)》 9주 가운데 청주(靑州)의 강역을 둘러싸고, 그 표지(標志)라 할 수 있는 우이(嵎夷)가 산동반도 지역임이 분명하고, 그들이 말하는 조선(朝鮮)은 오늘날의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안에 있던 고조선(古朝鮮)이었음데도 불구하고, 아마 《상서(尙書)·요전(堯典)》에 나오는 "처음으로 12주의 강계를 획정하였다(肇十有二州。)"라는 기록을 근거로 무슨 순임금 때 청주(靑州)를 갈라 영주(營州)를 만들었다는 둥 주장을 하면서 마치 요동이 영주요 청주의 강역은 발해 넘어 그 지역까지 걸쳐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한 술 더떠 더 한반도 서부지역까지 청주의 강역이었다는 식의 해석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같은 중화주의자들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공(禹貢)》편에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중국의 창세기인 《상서(尙書)》에 들어 있는 《요전(堯典)》는 언제쯤 만들어진 책이냐 하는 것이다. 《요전(堯典)》 일문은 비록 금문 28편 안에 들어 있지만 그 글의 내용의 진위와 그것이 쓰여진 연대는 여전히 의론이 분분하여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하나이다. 고인들은 요임금 때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당연히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문자가 생긴 것이 은대의 일이니, 요임금 때에는 문자 기록이 없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금인들이 《요전(堯典)》의 대한 글의 진위 및 그것이 쓰여진 연대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로, 곽말약(郭沫若) 선생은 전국시대의 것으로, 자사(子思)의 제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다.(《십비판서(十批判書)》 제2항)
둘째로, 범문란(范文蘭) 선생은 대개 주왕조의 사관이 전문을 주워모아 짜맞추어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이다.(《중국통사간편(中國統史簡編)》)
셋째로, 고힐강(顧頡剛) 선생은 《요전(堯典)》은 진·한(秦漢) 때의 작품이다.(장서당 《상서인론(尙書引論)》 제174쪽 인용)
이러한 의견은 모두 추측일 뿐 궁극적으로 어느 때 쓰여진 것이진 아마도 확정하기가 곤란한 것이라 함은 두말 것도 없다.(왕세순, 《상서역주(尙書譯注)》, 18쪽 참조)
요컨대 《상서(尙書)》라는 책은 요임금 때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빨라야 전국시대 늦어도 진·한(秦漢) 시대라는 말이다.
[위 그림은 명나라의 지리학자 애남영(艾南英)의 《우공도주(禹貢圖注)》에 그려진 그림으로 당시까지 마융(馬融)·정강성(鄭康成: 정현)·공안국(孔安國) 등의 주장을 근거로 작성한 지도라고 한다. 《우공추지(禹貢錐指)》에도 들어 있는데 호우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에 유의하되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고힐강 선생이 명쾌하게 갈파하였듯이 중국의 전설시대의 역사인 우임금 이전의 역사는 문헌상으로 입증할 증거가 없고 후대의 기록으로나마 겨우 은상(殷商) 이전에 우임금의 나라인 하(夏)나라가 확실히 있었다는 정도이다. 잘해 보아야 이 나라는 인류역사의 발전단계로 보아 겨우 원시 부족연맹단계를 벗어 난 상태일텐데 무슨 국력으로 그 세력이 오늘날의 한반도까지 미쳤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청주의 지역이 한반도의 서부까지 미쳤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위 《구주분성도(九州分成圖)》지도에 나오는 마융의 주장이라는 것은 필자의 확인 결과 마융의 《상서주(尙書注)》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위총서(漢魏叢書)》에 수록된 마융의 《상서주(尙書注)》에서 캡쳐했다.]
마융(馬融)(79~166)은 《상서(尙書)·순전(舜典)》의 "조십이주(肇十二州)"를 인용하여, 우임금께서는 수토(水土)를 평정하시고 9주를 두셨다. 순임금께서는 기주(冀州)의 북쪽이 넓고 크므로 이를 갈라 병주(幷州)를 설치하고, 연·제(燕齊) 지방이 아득히 멀므로 연(燕)을 갈라 유주(幽州)를 설치하고, 제(齊)을 갈라 영주(營州)를 설치하여 드디어 12주(州)가 되었다.(禹平水土, 置九州; 舜以冀州之北廣大, 分置幷州, 燕、齊遼遠, 分燕置幽州, 分齊營州, 於是爲十二州。)"라고 하였다.
요컨대 종전에 9주(九州)였던 것을 순임금 때 12주(十二州)로 되었다가 우임금 때 다시 9주로 환원되었다는 것이다.
위 그림에 나오는 정강성(鄭康成)은 동한의 경학가 정현(鄭玄)의 자이다. 우리는 중국 고사를 공부하면서 정현(鄭玄)이란 이름은 숱하게 들어 보았어도 정강성(鄭康成)의 이름은 처음 들었을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전혀 다른 인물인 줄로 알고 있었다.
정현(鄭玄)(127~200) 그는 누구인가. 저명한 경학가로 동한 북해 고밀인(高密人)다. 세칭 후정(後鄭)이라고 불러 선정(先鄭)인 정중(鄭衆)(?~83)과 구별하였다. 일찍이 태학에 들어가 금문《역(易)》과 공양학(公羊學)을 공부하였고, 또 장공조(張恭祖)를 스승으로 모시고 《고문상서(古文尙書)》·《주례(周禮)》·《좌전(左傳)》 등을 공부했으며, 나중에 또 마융(馬融)에게서 고문경(古文經)을 배웠다. 학문에 일가를 이룬 뒤 고향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모아 가르렸는데 제자들이 1천여 명에 달했다. 나중에 당고사건(黨錮事件)으로 인해 구금이 되었다가 학문저술에만 전력하면서 14년간 두문불출하였다. 정현은 고문경설(古文經說)을 위주로 하되 금문경설(今文經說)을 동시에 수집, 뭇 경전을 두루 연구, 한대 경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다.
정현(鄭玄)은 순임금이 청주가 발해에 걸쳐 있으므로 제(齊)를 갈라 영주로 만들고, 기주의 남북이 너무 멀므로 위(衛)를 갈라 병주를 만들고, 연(燕)이북을 유주로 만들어 새로 3주를 설치하여 모두 12주가 되었다. (舜以靑州越, 而分齊爲營州, 冀州南北太遠, 分爲爲幷州, 燕以北爲幽州, 新置三州, 幷九爲十二州也。)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순전히 억설이다. 선진의 고서에는 중국의 강역을 모두 9주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이 책을 정리·개편한 자에 의해, 한편으로는 요·순의 강역의 광대함을 과장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대(秦代)의 12수(數)의 제도에 부합(符合)시키기 위해서 전설로 전해오던 9주를 12주로 개찬(改竄)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장선국, 《상서종술(尙書綜述)》, 상해고적출판사, 153쪽 참조)
우리가 9주(九州)와 관련하여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전설로 내려온 지리구획관념이지 결코 행정구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주(州)와 같은 개념의 행정구획이 시행된 것은 한나라 때일 뿐 그 이전에 시행된 적이 없는 이상, 9주를 12주로 재분할했다는 것은 또 다른 신화 전설 다름 아니다. 중국 역사상 행정구획으로 주(州)가 제도로 실시된 것은 서한 때 실시된 행정구획인 13부(部) 중에 11주(州)가 시행된 것이 처음이다.(이와 관련하여 중국학자의 논문을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하왕조 이전의 역사는 전부 신화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권위있는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에서 하(夏) 이후의 강역 지도만이 나와 있을 뿐 그 이전의 요순시대는 물론 9주(州)로 구획된 지도조차 자체 아예 찾아 볼 수 없다.
5. 공안국이 전(傳)한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위서로 판명되었다.
공안국은 공자님의 11세 후손이다. 그가 전한 고문상서는 그뒤 1천여 동안 중국의 경학가들의 최고의 교과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은 이미 송나라 때 주희(朱熹)에 의해 위서(僞書)로 의심할 만한 대목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래, 마침내 청나라 때 염약거(閻若璩)라는 학자에 의해 백일하에 위서로 들통이 나버렸다. 따라서 그에 근거해 주석을 한 마융이나 정현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접한 이론일 뿐이다.
왕세순이 《상서역주(尙書譯注)》에서 정리한 위고문상서의 변위 내막은 다음과 같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복생의 금문상서 이외에 또 공안국의 소위 고문상서가 있었다. 《사기(史記)·유림전(儒林傳)》에 말하기를, '공씨 집안에는 고문상서가 있었지만 공안국은 당시의 통용되던 금문으로써 이를 능히 읽고 통하여 이때부터 그의 학파를 창립하였다.(孔氏家有古文《尙書》, 而安國以今文讀之, 因以起其家。"라고 하였다. 공안국이 공부한 고문상서의 출처가 어디인가에 대해 《사기(史記)》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서한 말년에 유흠(劉歆)이 《이서랑태상박사(移書讓太常博士)》라는 한 편의 글에서 말하기를, '노공왕(魯恭王)이 공자님의 집을 헐어 집을 지으려고 하다가 무너진 벽속에서 고문을 얻었는데 잃어버린 《예(禮)》 39편, 《상서(尙書)》 16편이었다, 천한(天漢)(한무제 유철은 재위기간 동안 10번이나 연호를 고쳤는데 8번째 연호가 천한임, 필자주) 후에 공안국이 나라에 바치려다가 무고사건이 창졸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뒤 반고의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와 왕충의 《논형(論衡)》 및 위서서(僞《書序》)에도 모두 이러한 견해를 답습하였는데 사실은 이러한 견해는 믿을 수 없다. 청대 초기 염약거(閻若璩)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에서 지적하기를, 노공왕(魯公王)이 공자님의 집을 헐었던 것은 경제(景帝) 때(재위 B.C 156~142) 발생였으나 무고사건(巫蠱事件)이 일어난 것은 도리어 한무제 정화 원년(B.C 92)과 2년(B.C 91)으로, 이 둘 사이에는 35~6년이라는 오랜 시차를 두고 있다. 경제 때 공안국은 이미 박사(博士)로서 나이가 가장 어려 보아야 스무살 남짓이었고, 거기에 35~6년이 지났을 때는 공안국은 이미 60세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공안국의 제자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공안국이 요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기록이 정확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미 요절한 이상 오륙십세까지 살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추단하건대 무고사건(巫蠱事件)이 발생하였을 때는 공안국은 이미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고문상서를 나라에 바치려던 사람도 당연히 공안국일 수는 없다. 염약거의 이러한 논증은 매우 일리가 있다. 이외에 문제(文帝)·경제(景帝)· 무제(武帝) 때 모두들 온갖 노력을 다 하여 고대 경전을 수집하려고 하였거늘 만약 경제 때 고문상서가 이미 출토되었다고 한다면 또 하필이면 35~6년을 기다려서야 다시 나라에 바칠게 무에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도 해석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벽 속에 고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실재로 확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왕세순 역주, 《상서역주(尙書譯注)》, 3쪽 참조)
한편, 《상서(尙書)》가 어떤 내용의 책인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본란에 소개한 바 있는 전묵의 《중국사학명저 〈상서(尙書)〉강의》의 일독을 권한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갈석(碣石) 등을 연구하기 위해 일찍암치 이 책을 읽어보았지만 정작 어떤 글에서 인용하려면 택스트가 없으니 맨날 새잽이다. 국내에 《우공추지(禹貢錐指)》에 관련된 전저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 분야를 연구하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자료인 것 같이 생각되어 천학비재를 무릅쓰고 우리 고대사와 가장 관련이 많은 장절만 우선 선별적으로 번역해 볼 생각이다.
우선 권4 부분을 번역해 볼 생각으로 책장을 열었다가 한 쪽도 번역하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으면서 별로 진척이 없다. 중국의 고전에서 인용한 구절이 너무 많아 일일이 확인하여 번역해야 하기 때문에 말처럼 번역이 그리 만만치 않다. 중국 고전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으니 생전 듣보지 못한 구절이 나오면 무턱대고 정보의 바다에 뛰어 들어 우선 인터넷 검색을 시도해 본다. 그럴 경우 누어 낚시바늘에도 고기가 걸려 나오듯이 왠만한 것은 다 걸려 나오기 마련이다. 주로 《좌전(左傳)》 등이 많이 인용되었다. 검색어를 다시 《좌전(左傳)》에서 찾아, 문제의 해당 기사에서 그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야 비로소 그 말의 함의를 깨닫게 된다. 본문에서 일례를 들자면 "成王賜太公履曰: 東至于海"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처음에 필자는 성왕(成王)이 태공(太公)에게 무슨 신발(履)을 하사한 줄 알았다. 신발을 하사했는데 무슨 동쪽으로 바다까지 이르렀다는 것인지 도무지 무슨 말인 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이 글귀는 《좌전(左傳)》에서 나오는 말이요, 履자는 신발이라는 명사도 있지만 동사로 이르다, 다다르다는 뜻으로 쓰여, "발길이 미치는 곳, 곧 어떤 나라의 강역을 가리키는 말"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 참조) 매사가 이러하니 전후 문맥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사건을 추론해 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매우 힘든 작업으로 생각되지만 이 방면의 연구자에게 조금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이 책의 원문을 당장 구하기 힘든 분들을 위해 인터넷에서 편리하게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소개해 줄테니 참조하시라. 주소는 http://www.booksforest.com/thread-215000-1-1.html 이 주소를 주소창에 쳐 넣으면 아래와 같은 바탕화면이 나올 것이다. 우상단의 "查找本文" 이라 표시된 글자 좌측에 화면 확대표시가 있으니 이를 클릭하면 전체화면을 볼 수 있다. 이 전자책 자료는 336쪽부터 시작하니 336쪽을 쳐 넣고 엔터를 치면 《우공추지(禹貢錐指)》 권4 부분이 나온다. 마우스를 상하로 크롤하면서 해당 원문을 일일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자책은 확장명이 djvu로 되어 있어 독자의 컴퓨터에 데자뷰로 된 파일을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깔려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이 자료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데자뷰 실행파일을 별도로 구하여 깔아야 할 것이다. 이 전자책 전반부에 47폭의 지도가 있다. 이 지도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요동반도에 있어야 할 "우이(嵎夷)"가 한반도 지역에 표시되어 있어 다소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이 지도 중 16폭은 명나라 애남영(艾南英)(1583~1646)의 《우공도주(禹貢圖注)》의 번각으로, 작자 호위와 관계없이 참고용으로 제시한 것이니 혼동이 없으시길 바란다. 아울러 이 책 전반부는 《우공장전(禹貢長箋)》인데 해당이 없으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우공추지》항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주 희한한 자료인 만큼 많은 성취 있으시길 바랍니다.<관리자>
글 쓴이 : 구산 장동균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