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놓친 어느 날
조계선
오늘도 그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가스밸브를 잠갔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시 데운다고 불에 올려놓은 찌개 냄비마저 내려놓았는지 아리송해졌다. 한번 찜찜한 생각이 들면 확인해야만 편한 외출이 된다. 일층까지 내려와 다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생각이 떠오르는 것보다는 낫다. 이럴 때 마다 현관문에 가스조심이라는 글씨를 그것도 붉은 사인펜으로 커다랗게 써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자존은 비에 젖어 찢어지는 종이봉투에서 비죽이 밀려나오는 물건처럼 느껴진다.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을 감추려고 애써 봉투를 끌어안듯 스스로를 안으로 두텁게 감싼다.
마음이 급하면 비밀번호도 머릿속에서 잘 조합이 되지 않는다. 전두엽에 쌓아놓은 수많은 정보가 교란을 일으킨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멍해진 머리는 윙 하는 소리를 귀로 전한다. 이럴 땐 몸이 먼저 기억해 낸다. 도어록에 닿는 손가락의 섬세한 감촉을 믿어본다. 집 안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가지런히 지키고 있던 신발들이 낯설다. 그제야 집을 나서기 전에 밸브를 만지고 확인한 기억이 뇌의 깊은 곳에서 스믈 거리며 올라온다.
요즘 들어 가끔 생기는 일이라 아이들에게 얘기하면 젊은 자기들도 그렇다니 염려 말란다. 그래서 이 현상을 누구에게나 오는 건망증이라 굳게 믿기로 했다. 급하게 벗어놓은 신발을 찾아신고 정지해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에 닿기가 빠듯하다. 긴 횡단보도 끝에서 붉은 신호등이 느릿한 시선으로 조바심 내는 마음을 훔쳐본다. 타야할 버스가 건너편 정류장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집에서 나오기 전 휴대폰 앱으로 확인한 버스는 약속을 지키고 15분 후를 기약하며 떠난다. 몇 초의 시간이 15분의 시간을 붙들었다. 멀어져 가는 버스의 뒷모습에 준 아쉬운 눈길을 거두고 체념을 했다. 잠시 후 거침없이 흐르던 자동차의 거센 물살이 모세의 바닷길처럼 길을 내어주며 일제히 멈췄다. 맞은편에 서있는 신호등의 초록색 숫자를 헤아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정류장의 빈 의자에 앉았다. 다시 움직이는 자동차의 물결 위에 소음이 거칠게 실린다. 친절한 it왕국의 위엄이 머리 위 작은 전광판에서 쉼 없이 뽐낸다. ‘당신이 타야 할 버스는 몇 분 후에 도착할 것입니다.’ 언제나 정확했다. 인간의 말처럼 허언증은 없다. 우리들 각자에게 허용된 삶의 시간을 시시각각으로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불안할까? 내일을 모른다는 것은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이 허황된 것이라 해도 꿈을 가진다는 것은 행복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수도 있다.
건망증이 얻어 낸 무료한 시간에 느긋하게 어깨를 기댄다. 내가 속해 있는 대로변 건너의 세계가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흐르는 자동차의 강변에 높이 선 빌딩들, 위로 올라가야만최선이라고 믿고 있는 아파트. 교회의 첨탑위에 높이 선 십자가는 오늘따라 하늘 위의 구름에 기대어 무거운 짐을 나눈다. 왜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기만을 지향하는 것일까. 신은 낮은 곳에서 함께 하신다고 했거늘. 높이 선 십자가를 향하는 것이 인간의 갈망이라면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만 닿을 수 있는 깃털 같은 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오늘도 내게 찾아온 건망증이란 손님은 헛된 것들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채우려 한 욕심들을 비워 내라는 몸이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전광판엔 버스를 기다려야할 시간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자동차의 소음과 저리도록 따가웠던 여름의 햇살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꽃 피웠던 배롱나무가 계절에 순응하며 무거운 옷을 벗는다. 그 아래엔 청설모 꼬리를 닮은 수크렁의 비워낸 깃털 같은 몸이 소리가 일으키는 바람에도 가벼이 흔들린다.
버스가 온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15분 동안만큼 덜어낸 존재의 무게를 빈 의자에 남겨두고 조금은 가벼워진 몸으로 버스에 올랐다.
첫댓글 "상처받은 자존은 비에 젖어 찢어지는 종이봉투에서 비죽이 밀려나오는 물건처럼 느껴진다."
멋진 비유입니다. 종이봉투가 비에 젖도록 방치하고 있다가 거기서 뭔가 나와 상황을 알아챘다는 것, 정말 속상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게 단순한 물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게 삶이라면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한 게 돋보이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고 있는 느낌입니다
욕심으로 너무 많은것을 채우려 해서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높이 오르려 하지 않고
일상을 가볍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입니다
사색하게 하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