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진주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진주에서는 대구 10월사건 이후 본격화된 시위와 관련하여 1946년 10월 7일 경찰과 미군의 발포로 6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10월 14일에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10명이 피살되고 11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진주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은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인민위원회와 대중적 조직들의 공개적 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형무소사건>
전쟁 발발 후 진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기 시작한 민간인들은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이었다.
1949년 8월 진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수는 803명이었으나 전쟁 당시에는 1,000여 명의 재소자가 수감되어 있었고, 대부분 좌익사범이었다. 이들 1,000여 명의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중순에서 진주경찰서가 후퇴하기 전날인 26일까지 진주지구 CIC, 진주지구 헌병대,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형무관 등에 의해 명석면 우수리 갓골, 관지리 화령골짜기 등 여섯 곳에서 집단희생당했다.
명석면 우수리 갓골(산5)에서는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43명이 버스에 실려와 총살당했다. 시신은 경찰의 위협을 받은 우수리 주민들에 의해 매장되었으므로 여러 명의 주민들이 현장을 목격했다.
갓골 근처인 명석면 우수리 콩밭골(산84)에서도 집단학살이 있었다. 트럭에 실려 온 40여 명의 재소자들이 사복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했는데, 모두 줄에 묶인 채 죽어있었다고 한다.
명석면 관지리 화령골(산88-1)과 닭족골(산72)에서는 재소자 150여 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관지리 신촌마을에 버스 3대가 들어왔으며 화령골 앞에 두 대, 닭족골 앞에 한 대가 멈춰 선 뒤 대나무 통발 용수를 쓴 재소자들이 골짜기로 끌려 올라갔다. 시신에는 살아있는지 확인하려 한 듯 팔과 다리에 창 같은 것으로 찔러 놓은 모습이 주민들에게 목격됐다.
명석면 용산리 용산치(산241-1, 산417-2) 다섯 곳에서 718명의 재소자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이 718구의 시신을 매장했는데, 구덩이를 팔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너무 많아 골짜기 고랑에 시신을 두고 그 위에 흙을 덮어야 했다고 한다.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산312)에 있는 논바닥에서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1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버스와 트럭 세 대에 실려 온 ‘죄수복 입은 사람과 평상복 입은 사람들’이 경찰에 의해 고개로 끌려 간 뒤 총 쏘는 소리가 났다. 매장하러 간 주민들이 현장을 목격했으며 시신이 많아 매장하지 못하고 흙을 덮어주기만 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주지역에서는 1950년 7월 15일경부터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거나 연행되어 진주경찰서 유치시설과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등지,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 등에서 희생되었다.
진주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진주뿐 아니라 산청, 하동, 의령 등 인근 지역 주민들도 있었다.
이들은 형무소내에서 심사를 당한 뒤 7월 21일부터 26일까지 재소자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당시 진주형무소 계호과 근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살해된 보도연맹원이 2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진주경찰서에는 최소 100여 명, 진주형무소에는 최소 20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가해집단은 진주 CIC파견대(대장 탁성록)와 헌병대(5사단 진주지구 헌병대장 윤기옥),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특공대 등이다.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 숯막, 너덜겅, 폐광에서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 163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이곳은 2002년 9월 태풍 루사에 의해 유골이 노출됨에 따라 알려졌다. 2004년 경남대 박물관팀이 조사한 결과 3개 지점 7개소에서 163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출토품으로 보아 희생자들이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진주형무소를 거쳐 희생된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은 1,300여 명 이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진주에서는 모두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진주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이 아니었어도 좌익일 것이라는 의심만으로도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조사되었다. 1950년 7월 25일오후 5~7시경 함양, 산청 등 서부경남지역에서 마산방면으로 피난민들이 이동하면서 이반성면 대천리 마을 주민들에게 저녁식사 제공을 요구하였다. 당시 임시로 마을 대표를 맡고 있던 고영기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추렴하여 저녁을 제공하였으나 전쟁 중이었으므로 밥과 반찬을 넉넉하게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피난민 중 일부가 심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에 고영기가 “전쟁 중이라 넉넉하지 못한 점을 이해하여 달라. 우리 주민들도 곧 피난을 가야 할 형편이다”라고 말하자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몰려 와서 고영기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며 구타하여 실신시켰다. 이 소식으로 들은 친척 고위수가 달려 와서 항의하자 “저놈도 빨갱이다”라고 소리치며 집단 구타하여 실신 시킨 후 두 사람을 마산에서 진주 방면으로 가던 군인들에게 ‘빨갱이를 잡았으니 처리하라’고 하며 지프차에 태워 보내진 후 희생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이 진주를 점령하고 있던 동안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이 있었다.
1950년 8월 3일 해질 무렵 나타난 미 전투기 4대의 폭격으로 진주 망경동, 강남동, 주약동에서 진치령터널로 피난했던 주민 50여 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진치령터널은 240미터 정도 길이의 철도 터널로서 당시 수백 명의 피난민들이 20일 전부터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사건 발생 3일전부터 정찰기의 정찰이 있었다. 사건 전날에는 조명탄까지 터뜨렸으며, 전투기들은 터널입구를 향해 30여 분간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300여 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8월 6일에는 지수면 청담리가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60여 호의 가구가 전소되고 주민 6명이 사망했다. 당시 마을주민 대부분은 폭격소식에 따라 남강변 모래사장 등으로 피난을 갔으며 희생자들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었다.
8월 7일에는 금곡면 정자리도 폭격을 받아 주민 전말주가 사망했다.
9월 21일 이반성면 장안리가 미군의 폭격을 받아 주민과 함안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고 진주경찰서에 의해 치안이 획복되자 인민군 측에 부역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금산지서로 연행된 금산면 장사리 구장 정종락이 1950년 11월 7일 진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하동방면으로 끌려가 다른 주민들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 진주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