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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인문학자로 출발해서 개혁적인 복음전파자로 변모해갔지만, 그의 주변에 있던 상류층의 인문학자들은 가톨릭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개혁적 사상을 따르고 있었다. 르페브르의 제자이자 성직자인 제라르 루셀, 사제이자 대성당의 참사원인 친구 뒤 틸레, 그리고 문학을 사랑했던 앙굴렘의 마르궤리트(나바르의 왕비) 등에게서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다. 최초의 프랑스어 성경을 번역 출간한 르페브르 데타플은 그의 개혁사상으로 소르본느 파에게 이단자로 몰려 추방까지 당했지만 가톨릭 신학자, 인문학자로 분류되고 있다.
칼빈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상류층으로서 안정적인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부친과 형이 고향에 있는 성당에서 이단자로 파문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스위스에서만큼의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구분선 아래의 글은 인문학자들의 면모를 보여 준다. 칼빈은 이들과 어울리는 은둔기간을 거쳐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더욱 과감한 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534년 4월, 칼빈은 네락(Nérac)에 갔다. 거기서 프랑수아 1세의 친동기이자 나바르의 여왕이며 잔 달베르(Jeanne d'Albert)의 어머니인 앙굴렘의 마르궤리트가, 소르본느와 대법원의 철옹성을 위협하는 사람들이었던 인문주의자들과 복음전파자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네락은 추방자들의 망명지였던 것이다. 제라르 루셀은 거기서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쟁점의 미사"를 거행하고 있었다.
여왕은 복음적인 교리에 열중했다. 그것은 그녀의 남편 앙리 달베르의 취향과는 달랐으므로, 그가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잔 달베르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매우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인 왕이 왕비가 그 여자의 방에서 목사인 루셀, 파렐과 함께 기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목사들이 동요해서 자리를 비킨 후에 왕은 왕비의 따귀를 때리고, 나에게는 회초리로 꾸짖으면서 교리를 뒤섞어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교훈했다."2)
칼빈은 네락에서 특히 한 노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Etaples)을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는 전에 르므완(Lemoine) 추기경 대학의 교수였으며, 『시편 주석』(1509)과 『바울서간 주석』(1512)으로써 종교개혁적인 주석의 길을 열어 놓았던 인물이다. 그해 1534년에 성서 완전 번역의 신판이 발행되었다. 그 성서의 제목은 이렇다. 『프랑스어 성경, 성 제롬의 순전번역으로부터 번역됨. 가장 고대의 그리고 정확한 판본에 따라 완전히 검토되고 대조됨』. 이 성서의 초판은 프랑스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데, 1530년에 나왔으므로 1535년에 뉘샤텔 근방에 위치한 세리에르(Serriéres) 피에르 드빙글(Pierre de Wingle) 인쇄소에서 발행된 올리베탕 역보다 5년이 앞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유명한 80세의 노인과 25세의 젊은이의 만남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성서학과 신학에도 불구하고 교황청과 감히 공개적으로 단절하려고 하지 않았던 반면, 또 한 사람은 그 단절을 결행하려는 시점에 서 있었다.
앙굴렘의 마르궤리트가 1538년 파리에서 가졌던 팔라티나(Palatin) 선거후작(侯) 프레데릭 2세와의 면담에서 했던 신기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노인의 사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시대에 가장 학식있는 인물 중의 하나인 피카르디의 위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소르본느 파에 의해 파리에서 심하게 박해를 당했으므로, 나바르 왕비 마르궤리트가 있는 네락으로 은둔했다. 문학을 사랑했던 이 왕비는 그 노신사를 기쁨으로 맞이했고, 자주 그와 함께 중대하게 제기된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그의 집에서 저녁만찬을 계획했던 어느 날, 그녀는 많은 학자들을 불렀다. 식사 중에 그 노위인은 매우 슬퍼보였고 때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왕비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는커녕 슬퍼하는 그를 더 눈에 띄게 빈정거리면서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그 노위인이 대답했다.
“부인, 유감스럽게도 지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인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비가 응수했다.
“어려서부터 거룩하고 무흠한 생활을 하셨던 것 같은 당신이 무슨 큰 죄를 범했다고 그러시나요?"
“부인, 나는 여성과 관계한 적이 없이 백한 살3)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떠날 때, 양심에 걸릴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한 가지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여왕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독촉했다. 그 노인이 울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가르쳤는데, 내게 배운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나이에조차도 이렇게 죽음에서 벗어나 있으니, 나는 차라리 죽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4)
그날 밤, 그는 왕비로부터 위로를 받으면서 평화롭게 죽었다. 플로리몽 드 레몽에 의하면, "르페브르는 그의 제자 제라르 루셀보다 칼빈의 견해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진 두려움, 즉 끓어오르는 신사상이 모든 것을 무질서 가운데로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억제하고자 처음에는 그에게 충고했는데, 그것은 멜란히톤의 사상에 그의 의견을 맞추라는 것이었다."5)
칼빈은 네락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1534년 5월, 자신의 교회성직록을 포기하려고 노용에 갔다. 사제로 임명될 수 있는 만 25세가 되는 나이였다. 과연 그는 브리소네(Brisonnet)나 미셸 다랑드(Michel d'Arande)나 제라르 루셀이나 뒤 틸레 같은 인문주의 성직자가 되어서, 카톨릭 교회와 끊지 않고 복음적 교리를 설교하는 인물이 될 것인가? 아니었다. 칼빈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카톨릭과 단절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결정적인 날에 제진느 성당과 퐁 레베크 사제로부터 얻어 온 그의 성직록을 끊으면서, 그 단절을 선언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 파기일은 5월 4일이었다. 5월 6일, 성당은 그의 형 샤를르 코뱅을 규탄하는 소동을 벌였다. 바로 그 소동이 노용 성당이 코뱅 가문을, 샤를르와 마찬가지로 칼빈을 이단자로 여겼고, 그들을 탄압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1534년 9월, 칼빈은 노용으로부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에게 편지를 썼다.6) 이 편지는 복음전파자들의 전형적인 인사양식으로 시작된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당신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칼빈은 부처에게 재침례파의 혐의로 부당하게 수감된 한 "형제"를 추천한다. 그는 거기서 형제들과 친구들에 대해 말했는데, 그것은 노용에 이미 복음적 공동체를 비밀리에 구성한 소그룹이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아직 해가 바뀌기 전에, 우리는 파리에서 칼빈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거기서 에스파니아의 한 젊은 의사 미셸 세르베투스(Michel Servet)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었는데, 이 사람은 1531년 아그노(Haguenau)에서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Sur les Erreurs de la Trinité)라는 작은 책을 발간했던 바 있다. 그 책에서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래 최초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했다. 칼빈은 파리가 자신에게 위태로우며,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 앙트완느 가의 한 집에서 몇몇 사람들 앞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세르베투스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세르베투스도 약속에 동의했으나 오지는 않았다.
칼빈은 남서지방으로 길을 택해서 프와티에(Poitiers)로 갔다. 바일르도 그것을 전하지만,7) 플로리몽 드 레몽이, 의심할 수 없이 정확하게 그 도시에서 금방 칼빈을 중심으로 친구들이 모여 한 서클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바세스 트레이유(Basses-Treilles) 가에 있는 육군장성의 정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플로리몽 드 레몽은 말한다. “마치 우리들의 최초의 조상이 (에덴의) 정원에서 홀려서 잘못된 것처럼, 바세스-트레이유 가에 있는 그 정원에서, 이 소수의 사람들은 칼빈에게 현혹되어 그에게 열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가 잘 쓰는 것만큼 말하는 재주를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생각나는 대로 매우 격렬하게 연설하면서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능력이 있었다. 최초로 칼빈주의 공회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거기였다."8) 그 회합의 주요 주제는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이었다. 같은 저자에 따르면, 지하실이나 동굴 같은 비밀의 장소에서 칼빈주의적 예배가 최초로 거행되었던 곳도 바로 그 지방에서였다. “칼빈은 성령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이 작은 모임에 강림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권면했다-초기에는 사람들이 설교를 그렇게 불렀다-그리고 몇몇 성경구절을 읽었으며, 그 시간에 사람들은 어려운 내용을 풀고 해결해 나갔다. 마치 사적인 자리에서의 토론인 것처럼 각 사람은 자기의 견해를 말했다."9)(중략)
1534년의 말쯤에 칼빈과 그의 친구 뒤 틸레는 프랑스가 자신들이 살기에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느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서 바젤로 갔다. 여정 도중에 메츠(Metz) 근처에서 시종 중의 한 사람이 그들의 돈이 든 가죽 여행가방 하나를 훔쳐감으로써 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하인이 가지고 있던 돈 덕분에 바젤까지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학생들은 여행을 많이 했다. 칼빈은 1534년에 앙굴렘, 네락, 노용, 프와티에, 오를레앙, 바젤 등지를 다녔고, 이곳들은 그로부터 배우기를 열망하고, 책과 그가 쓰려고 계획했던 작품의 자료를 모으려는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1) Florimond de Raemond, Op. cit., p. 854.
2) Marc Forissier, Nérac, Ville royale et huguenote, p. 41에서 인용.
3) 이 숫자는 잘못된 것 같다. France protestante에 의하면 르페브르는 1455년에 태어났고 1537년에 죽었으므로, 그의 나이는 82세였다.
4) E. Doumergue, Op. cit., I, pp. 402-403. 바일르(Bayle)는 그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이유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Dictionnaire philosophique에 실린 논문 "Fèvre"). 이 이야기는 파렐에 의해 확인된다.
5) Op. cit., p. 922.
6) 우리는 Herminjard가 기록한 날짜를 택한다. Correspondances des Réformateurs, III, p. 201.
7) Bayle,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article “Calvin", note AA.
8) Op. cit., p. 892.
9) Ibid, p. 893. 카톨릭 저자의 차가운 평가 속에서도, 상호 건덕의 따뜻한 예배가 엿보인다.
장 카디에 지음, 이오갑 옮김,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pp. 57-62, 66.
첫댓글 기다리던 좋은 글입니다. 어느 회원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길들였다는 표현이 멋지고 그 길들임의 과정에 은둔생활도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제라르 루셀
에타플스의 제자로 라틴어 대신 지역 토착어로 설교하는 등의 개혁운동을 펼쳐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비난받은 가톨릭 인문주의자. <--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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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분은 카톨릭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으오 중간 과정 정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톨리과 개신교 사이에 위치했지만 더 진보한 종교개혁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종교개혁에 분명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노용 --> 칼뱅이 출생한 느와용(Noyon)
...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한 필자는 북부의 피카르디 지방으로 향했다. 칼뱅이 출생한 느와용(Noyon)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현지에서는 위그노 연구의 권위자인 권현익 선교사가 동행했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국경과 접하고 있어 일찍이 외부로부터 문물과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배출된 역사적인 땅에서 칼뱅이 태어난 것은 태초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칼뱅이 1509년 7월 10일 태어나 생후 수개월간 살았다는 생가였다. 지금은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칼뱅의 주석과 ‘기독교강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롯해 다양한 그의 저술을 보관하고 있어 칼뱅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그의 친필 사인이었다.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다. ...
https://v.daum.net/v/20160731202801593
노용은 누와용 정도로 발음해야 합니다. 프랑스어 사전을 보면 그렇습니다.
또한 감동적인 기사내용이네요.
느와용(노용)은 피카르디에 속하는데 르페부르와 루셀도 피카르디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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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뱅의 고장인 피카르디는 종교개혁을 위해 예비된 땅이었다. 루터에게도 영향을 끼친 쟈크 르페브르와 제라르 루셀 등 당시 종교개혁자 중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유서 깊은 느와용은 도시의 규모는 작았지만 참사원의 숫자가 파리 노트르담보다도 많았던 곳으로, 반가톨릭 개혁가들이 일어난 저항의 땅이기도 했다. ...
https://v.daum.net/v/20160731202801593
어느 한 지역에서 종교개혁자와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나바르 왕비가 있던 '나바르 왕국'은 스페인어 '나바라 왕국'입니다. 부르봉 왕조에 속하는 '프랑스와 나바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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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은 산초 3세(Antso III.a Garzeitz Nagusia) 시기인 11세기에 가장 강성했으며, 산초 3세는 카스티야 백작과 아라곤 백작의 지위를 모두 계승하여 일시적으로 스페인의 황제로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초 3세가 죽고 나서 동군연합은 해체되었으며, 나바라 왕국은 이후 프랑스 왕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반 속국 상태에 놓이게 된다.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B%B0%94%EB%9D%BC_%EC%99%95%EA%B5%AD
여왕 마고와 마고리트 왕비는 다르고 나라도 다른 점에 유의해야 하겠네요.
데타플(d'Éaples)은 르페브르의성(姓)을 연음으로 읽은 것입니다. 데타플은 '에타플/'에서 의(d)입니다. 르페브르의 풀 네임과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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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페브르 (Jacques Lefèvre d'Éaples)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2755a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좋은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 관련 좋은 내용의 교회사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락 지역 전경:
https://t1.daumcdn.net/cafeattach/1x6/079a7038dc97f067f04a5e9aaf2f965ead1d0013
네락에 있는 앙리 4세의 동상:
https://t1.daumcdn.net/cafeattach/1x6/2af26c11cf4523a9643f2fab213febf6829b36ad
칼빈과 위그노 삶의 현장들 기고문(권현익 선교사): 관광을 간듯한 현장감이 있고, 칼빈과 주변 인물에 대한 상세한 내용입니다. 강추해요.
https://cmc902.tistory.com/m/6052372
좋은 내용의 첨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