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태복음 28:18-20의 재발견
문법적으로 이 문장의 주(主) 동사는 “제자 삼으라.”는 것이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지키게 하는 것은 분사형으로 모두 동사 “삼으라.”를 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3가지가 기본인데, 즉 먼저 전도해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하고, 다음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서 교회의 한 몸 된 지체로 만들어야 하고, 그 다음은 말씀을 가르쳐지키게 함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고 완성되면 제자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떤 교회에서는 회심자를 만든 상태에서 그대로 있는 교회가 있고, 어떤 교회는 세례만 주고 그대로 방치하는 교회가 있다. 집사, 권사, 장로 만들어서 감투만 잔뜩 주어서 그대로 방치하는 교회가 너무나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회는 정말 철저하게 예수의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가르쳐지키게 하는 교회가 있다. 어떤 교회는 전도는 하지 않고 3가지 중에서 마지막 것만 하는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가르쳐지키는 것만 물고 늘어지는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균형을 잃은 목회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균형 있는 목회를 하려면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고 가르치는 일도 열심히 하고 예수를 닮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도 하여 교회를 건실하게 세워나가야 한다.
4.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제자 개념
⑴ 복음서와 사도행전 : “제자도”라는 말은 성경에 없지만 “제자”라는 말은 사복음서에 무려 250번 이상 나온다. 어찌 보면 가장 흔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이며 제자의 인격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게 많이 나와 있다. 마태는 이 제자라는 말을 협의적으로도 사용하고 광의적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제자라는 말을 협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12사도에게만 붙이는 이름일 때를 말하며, 광의적으로 사용하는 곳이 두 곳에 나오는데 마 27:57이라든지, 마 28:19절에 나오는데 12사도 이외의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가는 철저하게 협의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였고, 요한은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하는데 광의적인 의미는 사도 이외의 믿는 자들을 보고도 제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 6:66절과 요 8:31절에서 광의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혁명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누가이다. 누가는 12사도에게는 제자라는 말보다는 사도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고 제자라는 말은 예수를 쫓는 모든 사람을 제자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회개하고 돌아온 3천명, 5천명을 제자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믿는 자”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다음에는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저의 생각으로는 제자라는 말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차원이 하나 높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자는 예수를 쫓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기름부음을 받은 작은 예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들이 붙인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안디옥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그들에게서는 예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누구 닮았는가? 예수를 닮아서 예수 냄새가 나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참으로 좋은 이름을 사용하는데 실상은 속이 텅텅 비어있기 일수이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 목회의 하나의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5. 서신서에 나타난 제자의 개념
⑴ 왜 서신서에서 제자라는 말이 사라졌을까? : 사도행전을 지나서 서신서로 넘어가면 갑자기 제자라는 말이 사라진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도 하고 이 주제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서신서는 헬라권 문화의 배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대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제자라는 말을 헬라문화권에서 그대로 사용하면 마치 기독교가 하나의 철학적 운동처럼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말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실 동안에는 이 제자라는 말이 적합했지만 승천하신 다음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그 이름을 바꿨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성경에서 그것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자라는 말이 서신서에서 사라진 것은 그 시대에 와서는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악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만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지 현장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역사적으로 볼 때, 신약의 계시의 통일성과 계시의 발전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활발하게 제자를 만드는 것이 사역의 주제였다고 하면, 그 계시의 중심사상은 서신서에 그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 사라졌다고 해서 제자훈련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통일성과 발전을 무시하는 것이다. 제자라는 말이 사라지고 성도라는 말 등으로 대치되었지만 내용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⑵ 완전한 자, 온전한 자(고전 14:20, 엡 4:12, 골 1:28, 딤후 3:17) : 서신서에 보면 “완전한 자”, 또는 “온전한 자”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저는 이것을 제자의 변형된 단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전 14:20절에 “지혜에 장성한 자(teleios)”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온전한 자”로도 번역이 된다. 엡 4:12절에는 헬라어로 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라는 말이 나오는데 번역은 “온전한 자”이다. 골로새서 1:28절이나 딤후 3:17절에도 “온전한 자”라는 말이 나온다. 서신서에서 “온전한 자”와 “완전한 자”는 구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온전한 자” 또는 “완전한 자”를 정리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성경구절이 에베소서 4장 12-13절이다.
⑶ 에베소서 4:12-13절의 비교검토
① 엡 4:12절/ 성도를 온전케 하며(katartismos) : 교역자를 교회에 주신 가장 큰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 우선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데 있다. “카타르티스모스”라는 말은 “준비 시킨다”, “갖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 교역자의 하는 일이다. 그래서 봉사의 일을 하게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② 13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teleios) : 13절에서도 “온전한 자”라는 의미로 카타르티스모스와 같은 의미의 텔레이오스를 사용하였는데 그 온전한 것의 내용이 뒤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도달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장성한 분량이라는 말은 장성한 몸의 “키”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말은 예수님만큼 키가 자라고 예수님만큼 몸무게가 나가는 성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로 복음서에서 제자를 만들라는 말의 서신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전한 자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보면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이 세상에서 성도가 추구할 수 있는 최종의 푯대, 영적 완성의 푯대라고 할 수 있으며 예수님처럼 온전한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 성숙 또는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나타나게 될 영화로운 우리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자”라는 말은 우리가 불완전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만큼은 완전한 것, 온전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제자와 온전한 자는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4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