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의 부활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약점의 하나가 바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예지력(叡智力)의 부족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신 없이 살아간다. 때문에 인생길을 보다 겸허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지난 세월을 나락(奈落)으로 침몰시키는 일들이 연이어 반복된다. 모두가 제 마다의 판단에 의한 운명의 길이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엄청난 재앙임을 알고 때늦은 후회를 한다. 이는 지혜의 부족이 가져다 준 자신의 업보(業報)에서 비롯된 일인지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현대는 저주와 증오의 시대이다. 물질문명은 앞서가며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피폐한 정신의 몰락은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겉으로는 포용과 화합을 외치면서도 안으로는 상대에 대한 멸시와 저주를 퍼붓는다.
물론 우리 전통사회는 약자는 더욱 무시하고 철저히 짓밟는 경향이 컸다. 더구나 양반사회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그 변방에서 겨우 생명을 부지했던 일반백성은 힘 있는 권력의 편에 서는 것이 생존에 유리함을 익혔다. 식민시대와 해방이후 사악한 권력자들의 통치술에 절로 순종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권위와 권력에 순치되었다. 목표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위기속에서 교육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경쟁도 그런 현상의 발로였을 것이다.
엊그제 살다가 처음으로 군인들의 집단 ‘고해성사’ 장면을 온 국민이 시청하였다. 미증유의 ‘친위 쿠테타’의 원인을 규명하는 자리에 다수가 등장한 것이다. 누구도 속 시원히 책임을 진다는 말이 없는 가운데 구석에 몰린 사냥감 신세였다. 민주사회의 기본은 의무에 따른 책임의 완수인데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이성마저 상실한 권력자를 부추겨 온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주모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함에도 시종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한 마디로 참담할 뿐이었다.
이는 분명히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없었고 극형을 집행하지 않아 온정을 베푼 역사의 형벌이었다. 다시는 조국을 배반하지 않도록 응징의 철퇴를 가한 프랑스의 「드골」을 거울삼아야 한다. 차제에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일벌백계하여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군 복무규율』에 명시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무조건 명령에 복종한 결과는 자신과 가문의 파멸은 물론이고 국가의 위상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 때는 국가발전의 주역에서 이제는 한낱 권력에 맹종하는 주구(走狗)로 전락하고 말았다. 권력자에 휘둘린 특정학교 출신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면서 그 반역의 터를 이전하라는 구실만 쌓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한 죄로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를 결박하여 ‘코카서스산’의 암벽에 묶어두고 독수리를 보내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 밤새 재생한 간을 독수리는 끝없이 쪼아 먹었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제복을 입은 그들의 사명이고 천직이었다.
하지만 우리 최근대사에는 벌써 세 차례나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포식자가 등장하였다. 나중에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그 독수리를 죽이고 「프로메테우스」와 화해하였다. 차제에 걸핏하면 우리 역사에서 국민과 대적하는 이런 저주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할 것이다.
때로 무한정한 자유의 구사는 위험하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한계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언론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보장을 받아야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친 경우는 엄청난 손해보상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그릇된 정보를 공개적으로 부추겨 최고 권력자의 판단마저도 흐리게 한 사이비 언론에 대한 정리와 처벌도 필요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인의 무분별한 언행도 문제다. 상당한 학식과 판단력을 구비한 사람들조차 부정선거 문제로 국가기관과 자기를 부정하는 집단최면에 빠져있다. 이들은 정통보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문명인이길 포기하고 야만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한 때는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무작정 반대세력에 대한 비난에 더해 어퍼컷을 흉내 내면서 환호하더니 지금은 변방으로 내몰려 완전히 균형감각을 상실하였다. 툭하면 나서던 각 단체도 쿠테타 그 자체를 규탄하는 성명에는 침묵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어렵지만 가장 합리적인 논거와 분석으로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일이다. 억지나 편견이 개입되면 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냉정한 이성과 엄정한 판단으로 감정을 이기는 사람만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 형제에게 완벽한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어 보냈다. 「판도라」는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무수한 재난이 세상에 퍼졌지만 요행히 상자 안에 한 가지가 남았으니 바로 ‘희망’이었다. 어떤 횡액이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그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어차피 세월이 가면 상처는 아물 것이다. 하지만 수 십 년을 후퇴시킨 국가의 위상은 회복할 길이 요원하다. 그러나 우선은 이 누란의 위기에 냉철한 이성으로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키는 일에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 온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 일련의 과정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시민정신에서 미래를 보았다. 앞으로 깨어있는 젊은 세대들은 이 나라에 세상의 혼탁한 분진(粉塵)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특히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가 부활했듯이 오욕의 과거를 씻어내고 민주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위상을 정립해야한다. 그리하여 부당한 수난에 대한 영웅적인 인내와 압제에 대항하는 의지력의 상징으로 남길 바란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당하지 않은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재탄생하길 바란다.
사실 누구라도 명령을 받는 순간에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사(戰史)에서 바른 결정을 내린 사람은 위인으로 기억한다. 반면에 아무 생각 없이 맹종하는 경우는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교육기관에서는 평소에 정당한 명령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윤리교육을 통한 ‘역사적 통찰력(Historical Insight)’을 길러 주어야한다.
(2024.12.14.작성/12.24.발표)
※ 성탄절과 새 해를 맞이하여 더욱 건강하시고 행운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묵묵히 천직으로 알고 복무하는 성실한 군인들을 응원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생각이 정리되면 뵙도록 하겠습니다.